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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욱의 마지막 기회 - 스스로 밝혀라 : 김진국 중앙일보 논설주간 [중앙시평]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강원도 어느 산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퇴임한 이후 일주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친척 집 신세를 지고 있고, 내연녀로 의심받는 임 여인도 피신해 있다. 채씨 변호인은 “나의 변호사로서의 역할도 일단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임 여인이 머물고 있다는 아파트에서 흘러나온 말처럼 ‘한 달쯤 숨어 있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질까. 그때쯤은 문제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조차 가물가물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

원본출처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3/10/05/12365873.html?cloc=olink|article|default


 이 사건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혼외아들 의혹과 관련한 채씨의 도덕성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정치 의혹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인데 선명하게 편이 갈렸다. 서로 한쪽만 보려 했다. 한쪽에선 ‘있지도 않은’ 음모설로 도덕성 문제의 초점을 흐리려 한다고 분개했다. 다른 쪽에선 혼외아가 개인 문제라면 정보 공작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본질이라고 반박했다. 어느 쪽도 사실 확인은 안 된 상태였다. 그러나 채씨가 소송을 취하하자 앞쪽이 맞고, 뒤쪽은 억지를 부린 것으로 정리가 돼 간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큰 책임은 채씨에게 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채씨를 다시 추궁하는 것이 가혹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온 나라를 휘저어놓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진실로 가는 열쇠를 쥐고 있는 그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채씨에게는 이미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다. 일찌감치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혼외아들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사과했어야 했다. ‘한때 실수로 자식이 생겼으나 아이를 버릴 수 없어 돌보았다. 공직자로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면 인간적으로 동정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제 사실로 드러날 경우 혼외아들 문제보다 거짓말 때문에 더 큰 비난을 받게 됐다. 더군다나 퇴임식에 부인과 딸을 참석시키고, 죽은 딸까지 들먹이며 결백을 주장했으니, 더 이상 갈 곳 없는 한계점까지 가버린 셈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말로만 ‘유전자 검사를 받겠다’고 할 게 아니라 객관성을 담보할 제3자를 대동하고 임 여인을 만나 협조를 부탁했어야 했다. 굳이 소송을 벌이지 않더라도 유전자 검사는 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이 “채 총장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녀 공직 사퇴의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그 정도 협조도 못하겠는가. 굳이 임 여인과 아들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니 유전자 검사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이용해 ‘기교’를 부린 것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그것을 밝힐 기회들을 깔아뭉갬으로써 국민의 시선은 혼외아들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관음증’이라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두 가지 의문 중 분명한 것은 한 남자아이의 존재였다. 그가 제기한 압력설은 심증만 있었다. 그러니 외도 문제로 눈길이 쏠려도 탓할 수 없다.

 채씨가 어느 쪽으로건 아들 의혹을 정리해버렸다면 논란은 공작 여부로 옮겨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보 공작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건 진짜 아들이냐 아니냐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채씨의 납득하기 어려운 처신으로 초점은 아들 문제에 머물렀다. 과거 중앙정보부가 야당 탄압 수단으로 공작을 벌인 사례를 아무리 늘어놔 봤자 부도덕한 공직자의 아랫도리를 가리려는 염치없는 짓으로 비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특히 그가 평생 몸담았던 검찰조직에는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그는 퇴임사에서까지 검찰의 독립을 당부했지만 이제 후배 검사들이 무슨 염치로 그런 주장을 하겠는가. 총장의 임기 보장, 정보기관의 사생활 추적과 공작의 부도덕성을 거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문제를 꺼내는 순간 채씨와 꼭 같은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리게 생겼으니 채씨가 후배들의 입을 틀어막고 나간 꼴이다. 그의 말을 믿고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후배들의 낙담은 또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정치 권력을 거스르면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는 선례를 만들어놨으니 후배 검사들의 기개는 또 어떻게 회복할 건가.

 그는 많은 기회를 놓쳤다. 이제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 민간인으로 돌아갔어도 그는 평생 국록을 먹은 공직자다. 뒷모습만은 깔끔하고 당당해야 한다. 가족을 보호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침묵은 비겁함이다. 그가 바란 검찰 독립, 개혁을 위해서도 사생활 관련 의혹만은 스스로 털어내고 떠나기 바란다.

김진국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