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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액티비스트' 고 양우석 선생 영결식 조사 및 동영상

양우석선생 추모 블로그 : http://yangho.tistory.com

OBITUARY

고 양우석 장로의 일출은 1929년 2월 13일, 일몰은 2010년 3월 17일 오전 1시 30분 이었으니 조선땅 경북 대구에서 미국 뉴욕으로의 인생여정은 81년을 소요했다. 그의 생년에 일어난 네가지 역사적 사건 곧, 광주학생운동, 뉴욕 주가폭락으로 인한 세계공황의 시작,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논문 “이성의 기능 THE FUNCTION OF REASON”출판,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출생의 색깔로써 고 양우석 장로의 80평생을 스케치하려는 기자[Obituarist]의 욕구는 의미있다. 이는 시대의 아들로 태어난 양장로의 ‘삶의 자리’와 그가 경험한 역사의 역풍을 은유하기에 족하다.

고인은 전쟁의 소식으로 해가 지고 날이 새던 청소년 시절에 한국 서울의 경기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그가 뛰어든 사회생활의 주무대는 학생운동, 문화계몽운동, 사업기획운영, 교육과 사회의 정의운동 등이었다. 그의 학생운동의 정신은 1948년 경기고등학교 재학시 ‘성화회’라는 서클에 가담함으로써 발아되었고 그것이 한국 기독학생운동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대학생 시절 그는 전국 기독학생회 회장을 두번이나 맡아 활동했으며 그후에는 이른바 OB[OLD BOY] 멤버로 남아 후배들 지도에 남다른 적극성을 보였다.

1968년에서 16년동안 서울 YNCA이사, 한국 기독학생회 총연맹[KSCF] 이사 및 부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참여한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은 일의 당연한 계속성이었다. 그는 1956년에서 1963년사이에 20대 후반과 30대의 열정을 문교부 차관 비서실장, 공보처 장관 비서실장, KBS 라디오 편성과장, 연세대학교 강사, UNESCO 한국위원회 총무부장으로서 아낌없이 태웠다. 1968년 이후에는 한국합판협회 전문이사, [주]공간사 대표이사, JSY CORP 대표이사로서 사업경영에도 헌신했다.

고 양우석 장로는 평생 신앙적인 종교철학도였고 또 그 액티비스트였다. 그는 미국의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행동하는 신앙’에 심취하여 평생 교회의 ‘반골’의 자리를 선택했다. 1984년에서 88년 New York Korea YMCA 총무로 일하면서 목요기도회 멤버, 우리민족서로돕기 뉴욕공동대표로서 통일운동 일선에 서기도 했다. 그는 야당장로라 자칭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장로로, 뉴욕 브루클린 한인교회 시무장로로 신앙의 기븜과 멍에를 언제나 함께 메고 다녔다. - 차원태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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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양우석 장로님 영전에

우리들 가운데 빛나는 모습으로 살아오셨던 양우석 장로님 영전에, 그리고 양 장로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우리들 서로의 애절한 마음을 나누며, 이 땅 위의 이별의 아쉬움으로 고합니다. 지난 1월 플러싱 유니온 양노원에서 뵙고 나오면서, 저는 이미 아마도 양 장로님을 마지막 뵙는 시간이었다고 느끼면서 그 문을 떠나 태평양 너머 지리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떠나실 소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남겨드리고 온 난초 꽃 한 송이조차 제대로 바라보시지 못하시는, 아니, 격동하는 시대의 물결을 함께 헤쳐 온 평생의 동반자요, 젊은 날의 간절한 연인이요, 사랑하는 두 아드님의 어머니이신 그 아내, 돌올한 생기에 여전히 한 떨기 꽃이신 김명숙 님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던 장로님의 흐려진 시선에 깊은 절망을 느꼈던 저는, 오늘 장로님 떠나신 소식을 듣사옵고,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양 장로님 2010년 춘분을 나흘 앞두고 떠나가신 발걸음에, 가시는 자욱마다 새봄에 피어나는 꽃잎을 뿌려드리 듯이, 천지에 난만하게 피어오르는 꽃 소식으로 환송하옵니다. 차갑고 음습했던 한 겨울을 견뎌낸 땅 속의 낡은 뿌리들이 이 봄 새로운 순들을 밀어 올려 태양을 향해 키워내는 생명의 힘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장로님 그 긴 겨울에 추위와 웅크림 속에서 고단하셨던 역사 위의 힘들었던 발걸음, 이제 훨훨 저 먼 창공으로 새로운 생명의 비상을 하시고 계시지요?

대한민국의 겨울이 아직 추웠던 1929년 2월 13일 장로님은 경북 대구(大邱)에서 태어나셨고, 2010년 3월 17일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든 미국의 뉴욕에서 길이 잠드셨습니다. 81년 풍상은 유난히 역사의 파랑이 거세었던 한국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도 거부하기 어려운 발자취를 엮어내신 고난의 길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한 시절을 휘저으신 현란한 발걸음에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그늘 속의 투쟁의 자취가,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나름으로 공헌한 여러 선배들의 배경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도우시며 서로 사귀어 오신 즐거움도 크셨으리라 여깁니다. 언론인으로 사셨던 시대의 암흑 속에서도 늘 경쾌한 유머와 날선 비판을 함께 종횡으로 구사하신 양 장로님의 인품에 깊은 경의를 드리는 후생들 가운데 저도 하나입니다. 기업인으로 경영의 일선에 서신 때에도, 고귀한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에는 남몰래 도움의 손길을 베푸셨던, 그래서 나라와 시대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셨던 의연한 기개의 양 장로님을 기억합니다.

세계를 편력하시면서 행보를 하신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작은 선물 하나씩 기어코 사들고 돌아와 자그마한 여인 앞에 멋쩍게 마음을 드러내신 큼직한 도량도 지니셨고, 자식들에 대한 간곡하고도 섬세한 염원에도 매우 열린 태도를 지녀 오신 선각자다운 아버지로 사셨던 것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양 장로님을 뵈온 첫 인상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저 80년대의 한국 독재정부들이 발호하던 시절, 뉴욕 만하탄(Manhattan)에 있는 뉴욕한인교회의 그 낡고 작은 지하실 방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타오른 뉴욕목요기도회의 뜨거운 불꽃 속에서입니다. 자주 기도회 모임에 오셔서, 대체로 가볍게 농담과 유머를 날리시면서 주변 사람들의 입을 찢어 웃게 만드시다가도, 정작 본론에 들어가 심각한 토론이 전개될 때는, 돌연히 그 넓으신 이마에 홍조조차 떠올리시며, 누가 뭐라든 반대할 것은 반대하시던 특유의 뚝심을 내시기도 했지요. 그 때 함께 자리했던 여러 선배님들 가운데 벌써 여러 어른들이 양 장로님을 앞서 떠나셨습니다. 임순만 목사님, 김윤철 장로님, 박성모 목사님, 손명걸 목사님, 정춘수 목사님, 그리고 이제 양우석 장로님,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저희들도 하나씩 곧 뒤를 따를 것입니다. 한 시대를 공유한 신념의 정열들이 시들어지듯 지금 시대는 여전히 하늘 뜻을 역행하는 현실이 눈 앞에 있건만, 선배님들 하나씩 떠나실 때마다 저희 후생들의 애절한 탄식은 살아 계셨을 때 좀 더 좋은 말씀 좋은 마음 배우고 나누지 못했던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그런 선배들과 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직 생생하오니, 문득 저희들 생애의 기쁨과 보람이 되기도 합니다. 양 장로님께도 그 점 깊은 감사를 드리옵니다.

2002년 뉴욕한인교회에 제 14대 담임 목사로 부임한 저를 특별히 환영해주신 양 장로님은, 부드러운 시선과 목소리로 가끔씩 여전히 순발력 있게 유머를 날리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준열하시던 비판의 목소리는 나오시자 않게 되셔서, 저의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하셨습니다. 양 장로님을 존경하고 감히 사랑했지만, 그만 아쉬워서 미워하기도 한 것은 -- 아 그 멋있던 사나이 양우석도 그만 세월 속에서 녹슬어 가는구나 -- 저의 아쉬운 실망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든 인생이 겪는 엄숙한 발걸음인 것은 이제 와서는 저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자기 앞에 배당된 삶의 한 자락만 누릴 수 있구나.
지난 3월 11일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하신 법정(法頂)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된 순천 송광사에 지인 몇 명과 그 자리에 다녀오면서, 저는 사람들의 생애의 한 단면씩만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더구나 온 세상이 좁다고 해내외를 헤집고 다니셨던 활발한 발걸음이 작은 양로원 복도조차 제대로 밟지 못하시는 70 넘은 쇠잔해진 몸을, 작은 침대 하나에 의지하고 견뎌 오신 양 장로님의 세월은 정말 너무도 지루하고 빛바랜 시간이었습니다. 딱히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공부하신 탓은 아니겠지만, 양 장로님께서 출석하셨던 교회는 서울 경동교회, 뉴욕 브룩클린 한인교회, 만하탄 뉴욕한인교회 모두 나름대로는 그 시대의 선구자적인 비전과 신앙의 등대를 자부했지만, 그리고 긴 세월 봉사하셨던 YMCA 를 통한 신앙적인 헌신을 기억했지만, 막상 양 장로님 자신의 비젼이 제대로 성취된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 발걸음 디디신 여러 곳에서 모두들 양 장로님의 자취가 크셨음을 모두 기억하고 기리면서, 아쉬움과 존경으로 고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양 우석 장로님, 이제 그리고 드디어 가시는군요? 이 세상이 장로님의 삶을 평안하게만 누리시도록 하지 못한 것은 마침내 접으시고, 예수께서 불러내셔서 내리신 숭고한 명령에 생애를 바쳐서 충성을 약속하셨던 지난 세월 앞의 그 죄송함은, 주님의 넉넉하신 은혜 앞에 고하시고, 이후로는 평생을 믿고 따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도 삼키지 못하는 새 생명의 힘으로 솟아나셔서, 부활의 영혼으로 깊은 평강을 누리소서. 양우석 장로님 곧 다시 우리 모두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오며.

2010년 3월 21일 한국 지리산에서 언재(焉哉) 한성수(韓盛洙) 두 손 모아 절하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