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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테러때 김일성사살 보복작전 벌초계획 세웠다 - 그때 벌초했더라면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였던 지난 1983년 10월, 정부가 북한 테러에 대한 응징을 위해 세웠던 이른바 ‘벌초계획’의 구체적 내용이 27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작전계획에 참여했던 당시 특수부대의 한 관계자는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을 사살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다”며 “하지만 구체적 귀환방법은 현장에서 선택하기로 했었다”고 말했다.

원본출처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10/2010041000321.html?Dep1=news&Dep2=top&Dep3=top

이 계획은 1979년 ‘12·12 사태’를 일으켰던 육사 12기 출신 군지휘관들이 주도한 것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지만 전 전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계획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손으로 일일이 작성됐으며, 복사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도 손으로 직접 쓴 문서를 들고가 보고한 뒤 문건을 소각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웅산테러 직후 우리 군부가 이에 대응하는 응징계획을 마련했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와 관련된 구체적 증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83년 12월 부산 다대포로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후 도주하다 해군고속정에 받혀 침몰한 북한 간첩선이 1984년 4월 9일 인양되는 모습. / photo 조선일보

“30명 투입… 4시간이면 상황 종료”

이 관계자는 “소련 상공에서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된 지 8일 뒤인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에서 한국 국가원수와 각료들을 시해하려는 북한의 테러가 발생, 군 내부에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며 “당시 1군단과 6군단에서는 북으로 밀고 올라가자는 주장까지 대두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1군단과 6군단에선 소속 장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해 전투 준비를 갖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포천에 주둔하고 있던 6군단은 “출동 준비를 갖추겠다”고 대통령에게 청원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군단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육군 대령은 “당시 군은 초긴장 상태였고, 완전히 전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작전계획엔 아무런 공식적인 이름이나 작전번호가 붙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작전계획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벌초계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1·6군단 일부 병사들엔 실탄 지급

존재 자체가 극비였던 이 작전 계획은 약 두 달 뒤인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로 침투했던 무장간첩을 생포하면서 없던 일로 돌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다대포로 무장 간첩선이 들어온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 평양으로 보내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투입했다”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간첩 침투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무장간첩 두 명을 생포하고 북한 반잠수정을 침몰시켜,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평양을 치자’며 격앙돼 있던 군 지휘관들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히려 말리는 입장이었고, 미국 정보기관도 작전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데다, 버마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끊는 등 우리 정부가 얻은 외교적 수확이 적지 않았고, 다대포로 침투한 무장간첩을 생포해 군부의 사기를 올릴 수 있었기에 작전을 백지화시켰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존스홉킨스대학의 오버도퍼 교수는 지난 2005년 8월 25일 한국 언론에 “워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만나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은 동북아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만류했으며, 이 말을 들은 전 대통령이 ‘보복공격을 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답했다”고 말한 바 있다.

평양 거리·주석궁 모형 만들어 침투 훈련

‘벌초계획’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극비 작전의 개요는 ‘특수부대원 30명을 투입해 공중으로 침투, 평양 주석궁을 폭파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이용해 귀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 특수부대 관계자는 “비행기가 고공으로 올라가 상공에서 대원 30명을 떨어뜨린 뒤 돌아오고, 대원들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했었다”며 “기류를 타고 수평 방향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 고도로 훈련된 사람의 경우 수십㎞를 날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 주석궁에 잠입해 폭탄을 설치, 폭파시키고 김일성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예상 시간은 약 4시간. 이 관계자는 “4시간이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이를 위해 평양시내와 주석궁 모형을 만들어놓고 대원들을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에) 들어가는 것보다 (평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더 문제였다”며 “육로를 이용해 산을 타고 돌아올 경우엔 15일, 배를 타고 올 경우엔 2일이 필요한 것으로 (계획을) 잡았지만, 실제 어떤 귀환 방식을 택할지는 현장에서 결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분위기가 몹시 격앙돼 있었기에 장교들 중에선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주석궁에 침투해 모조리 폭파시킨 뒤, 김일성을 자루에 집어넣어 납치해 오겠다고 호기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 작전 계획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특수부대원들은 매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침투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군견 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그런데 사람이 남길 수 있는 흔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배설물로, 대원들은 (배설을 최소화하기 위해) 굶는 훈련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수부대원들은 특수하게 제작된 영양식을 보름치 식량으로 갖고 갈 예정이었다”며 “이 영양식은 배설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별히 제조된 것으로, 열량은 최대로 높이되 부피는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보름치 식량이라고 해봐야 한 움큼 분량밖에 안됐다”고 했다.

현지화 훈련도 필수적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은 북한군과 똑같이 아침에 눈을 뜨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쳐야 했고, 북한 담배를 피우고 북한 말씨를 써야 했으며, 북한 군복을 입고 북한 소총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평양에 진입했다가 검문을 받거나 붙잡혔을 경우를 대비해 시내 지리를 외워야 했고, 오랜 기간동안 혼자 숨어지내게 될 경우에 대비해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버티는 생존훈련도 거쳐야 했다.

암살과 저격에 대한 훈련도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부대원들은 철사줄 하나로 사람의 목을 자르고, 맨손으로 급소를 쳐서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며, 독침과 단도를 쓰는 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고, 금고를 열어 물건을 훔쳐내는 훈련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혼자 성인 남자 10여명과 맞대결을 할 수 있으며, 험준한 고산능선 10㎞를 50분 이내에 무리없이 주파할 수 있는 강철 체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요원들, 다대포 간첩 생포 작전에 투입

다대포 해안 침투간첩으로부터 노획한 50종 410점의 장비들. / photo 조선일보

기세등등했던 이 작전은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에서 무장간첩이 생포되는 바람에 없던 일로 됐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경계를 서던 육군 초병들이 간첩을 발견, 격전 끝에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특수부대 관계자는 “북한 간첩선이 다대포로 침투한다는 구체적 정보를 입수했다”며 “평양으로 들어가 주석궁을 폭파시키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돌려 (간첩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원들이 모래 속에 몸을 숨긴 채, 간첩이 뭍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생포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작전에 투입됐다는 정덕근(49)씨는 지난 2003년 국회 정무위 국감에 출두해 “강원도 해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뒤 1983년 12월 2일 다대포 해안으로 이동해 공비를 생포했다”고 증언했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북한군은 공해상에 모선(母船)을 띄워놓은 뒤, 어선으로 위장한 자선(子船)을 이 모선에서 내보내 공작원을 침투시켰다”며 “자선을 타고 들어온 간첩은 이 자선에 달려있는 반잠수정으로 갈아 타고 해안 1~2㎞까지 접근한 뒤, 개인용 해양 스쿠터로 다시 바꿔 타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개인용 스쿠터는 배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치 물새가 물을 가르는 것처럼 빠른 데다 소음도 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도망치는 北 반잠수정 침몰시켜

이 관계자는 “상륙한 무장간첩은 겨드랑이에 기관총을 끼우고 두 손으로 수류탄을 움켜쥔 뒤, 손가락을 수류탄 고리에 걸고 있었다”며 “손가락을 잡아 당기기만 하면 바로 수류탄이 터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무장간첩을 생포한다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총을 갖고 가지 않은 채 가죽 몽둥이와 대검, 그리고 맨손만을 이용해 제압해야 했다”며 “무장간첩 중 한 명은 머리를 가죽 몽둥이로 얻어맞고 바로 기절했지만, 다른 한 명은 격렬히 저항하다가 격투 끝에 제압됐다”고 말했다. 그는 “가죽을 물에 적셔 불렸다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다”며 “이렇게 만든 가죽 몽둥이로 뒤통수를 치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한 방’에 의식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격투 모습을 목격한 북한 반잠수정은 RPG-7(대전차화기)을 발사한 뒤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부산 다대포에서 출발한 반잠수정이 영도 앞바다까지 도망을 쳐서, 해군 고속정이 추격하며 함포를 쐈지만 격침되지 않았다”며 “해군은 결국 고속정 선체를 간첩선과 충돌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해 반잠수정을 침몰시켰다”고 말했다. 당시 생포된 간첩 2명은 이후 귀순, 현재 공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대포 작전 참가자들은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특수부대 관계자는 긴박했던 1983년의 상황에 대해 “27년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엔 ‘평양을 치자’는 계획을 수립했을 만큼 우리 군의 기세가 등등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