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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특사는 김기완 전 주일공사 아들, DJ 납치당시 '박정희 친필서명 없으면 못한다' 버티기도

차기 주한 미국대사 물망에 오른 성 김[한국명 김성용] 대북특사는 지난 1973년 DJ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사인을 확인하지 못하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며 반대입장을 폈던 김기완 전 주일공사의 아들로 확인됐습니다

복수의 관계자와 미국 주거기록,이민시기등을 확인한 결과 1960년생인 김성특사는 1926년생인 김기완 전 주일공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김기완 전 주일공사[가명 김재권]는 한때 그가 탄 비행기가 북한에 납치되기도 했고 1973년 주일공사 재직때는 DJ 납치사건에 연루됐다 1974년 사실상 미국에 이민을 갔으며 1979년에는 한국보험공사사장 임명돼 다시 한국에 돌아와 신군부집권뒤까지 직책을 수행하는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지난 1994년 6월 69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김기완 전 주일공사의 아들이 그 아픔을 딛고 사상 첫 한국계 주한미국대사에 임명될 가능성이 커진 것입니다

김기완 전 주일공사는 공군 정훈감시절인 지난 1958년 2월 16일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 여의도로 향하던 KNA기[2호기] 창랑호 납북사건때 이 비행기에 탑승한 26명중 1명으로 같은해 3월 7일 극적으로 송환되기도 했습니다 

김 전 공사는 또 1973년 김재권이라는 가명으로 주일공사로 재직할 당시 DJ 납치지시가 내려오자 당시 이철희 중앙정보부차장에게 강력히 반발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서명을 확인하기 전에는 실행할 수 없다'고 버텼고 이철희 차장은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부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19980219 이철희인터뷰-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공작단장인 윤모씨도 '김 전 공사가  본부에 전문을 보내 '박대통령의 결재사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고 버틴 일이 있다며, 확인을 받았는 지는 모르지만 그 후에 정보제공등 협조를 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김대중납치사건진상보고서 519페이지]


'그늘 속에서 일할때 국가와 국민이 행복하다'는 정보요원의 숙명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 전 공사는 납치직후 부하들에게 절대로 DJ를 죽여서는 안된다, 살려서 돌려보내야 한다, 불필요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고 지시했으며 김대중전대통령은 지난 1987년 이 사건이 납치사건이냐 살해미수사건이냐 논란이 일자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김기완 공사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김 전 공사는 중정 주일거점장으로서 공사라는 직책을 가진 백색요원으로 납치공작 실행책임자는 한국에서 급거 파견된 윤모씨였으며 실제 납치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납치지시를 받았을때 불가능하다, 박대통령 결재사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추진할 수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이 사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 전 공사는 김형욱과의 인연도 각별해서 73년 1월 5일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이 극비리에 미국으로 출국할때 재일교포 김희순명의의 여권을 제공했고 1973년 4월 21일 김형욱이 비서실장 문학림과 함께 대만박사학위수여를 빙자, 미국에 망명할때 일본 동경 하네다공항에서 우연히 김형욱과 마주치게 되기도 합니다 
이때 김형욱이 자신의 망명이 발각된 것으로 판단, 극도로 긴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김형욱은 미국망명뒤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그 이듬해인 1974년 2월 24일 일본을 방문, 김기완 공사를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국정원보고서]

김전공사는 1974년 5월 일본인으로 위장, 미국에 들어가 체류하면서 김형욱을 만났고 김형욱은 이자리에서 김전공사에게 50만달러를 주며자신과 함께 반박정희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국정원보고서]

한국정부는 또 김형욱이 미 프레이저청문회에 출석, 한국정부를 비방하자 김형욱의 망언이 계속되면 김 전 공사를 청문회에 자진출석시켜 반격하도록 한다는 계획도 세우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지시보고서 19770617,국정원보고서]

김전공사는 실제 1974년부터 사실상 미국에 이민[부인등은 DJ납치사건직후 먼저 도미], 체류했으나 이때도 1급 공무원 신분을 유지했고 귀국을 희망해 1979년 3월 27일 한국보험공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신군부 출범뒤에도 사장직을 수행하다 1982년말 다시 미국 LA로 돌아와 UCLA인근등에 거주했습니다  

김 전공사는 검사였던 김성과장과 함께 살다 1994년 6월 23일 로스앤젤레스 굿 사마리탄병원에서 6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인생행로를 따라가 보면 항상 한국 현대사의 중요현장에 서 있음으로써 아픔을 겪었고 남모를 갈등과 번민에 몸부림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김성특사는 1985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변호사자격번호 121859], 검사로 근무하다 90년대 중반, 국무부에 들어갔습니다

김성특사는 정모씨와 결혼한 뒤 지난 2006년 5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그레이트폴의 주택을 구입,살고 있습니다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품어 안은 김기완공사의 삶에 개개인의 평가와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것이 그의 아들 김성특사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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