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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위한 ‘1인 친위쿠데타’ 그때 민주주의 시계가 멈췄다 - 펌 ‘유신 40돌’ 유신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유신 40돌’ 유신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17일이면 5·16 군사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장기 독재의 정점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로 꼽히는 ‘유신체제’가 시작된 지 40년이 된다. <한겨레>는 유신체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그림자와 오늘에 주는 교훈을 짚어보는 전문가 연속 기고를 4차례 싣는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유신이 한국 정치·사회와 경제에 가져다준 모순과 문제들을 살펴보고, 임지봉 서강대 교수는 헌정체제에 드리운 유신의 그늘을 분석한다.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은 유신체제에 대한 거시적 평가와 역사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안병욱/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원본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55844.html

1972년 10월17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를 해산했다.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다. 뒷날 유신으로 불린 ‘대통령 특별선언’을 감행한 것이다.

박정희는 권력층 내부에서조차 합의나 동의가 없었고 공고한 지지 세력도 없이 사상 유례없는 개인 중심의 친위쿠데타를 밀어붙였다. 그는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계엄 포고령으로 알려 일체의 비판을 봉쇄한 뒤 투표율 91.9%에 찬성률 91.5%를 이끌어냈다.

유신체제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찬반토론 없이 간선제로 선출했다. 6년 임기로 연임 제한은 폐지했으며, 박정희 1인만 후보로 추대된 선거는 요식행위였다. 이른바 ‘통대의원’들은 읍·면·동에서 새마을 지도자, 예비군 중대장 등 미리 낙점받은 친여 인사들이었다. 두 차례 선거를 치렀지만 반대표 하나 없이 무효·기권표 두셋을 제외하고 전원 찬성으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신체제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로 대통령 일인에게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집중시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고 여당 후보도 공천했으므로 실제 국회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했다. 사법부도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법관들을 직접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재임명제를 두어 통솔했다. 곧 민주주의 원칙을 원천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종신집권은 물론이고 여러 정황상 세습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했다.

다음으로 주요 국가정책은 박정희 일인의 전횡으로 결정되었고 그의 감정에 크게 좌우되었다. 따라서 ‘엽기적 사건들’이 빈발했는데, 초법적 긴급조치, 김대중 납치, 인혁당 인사 8명의 사법살인 등이 단적인 예다. 대외적으로도 주변 일본·미국과 최악의 대립 속에서 고립무원을 자초했다. 애초 유신을 통일을 대비한 개혁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나 경북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는 1976년 발표 등에서 드러나듯, 박정희는 이미 사실이 아님을 알고도 뻔한 거짓 발언을 반복했다. 이와 함께 집권 말기 여성 편력 등 추문들로도 확인되는바, 그는 부도덕한 행태와 잔인한 성격으로 2인자는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폭군 스타일의 전형이었다.

셋째, 유신체제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대중의 자발적 동원에도 실패했다. 박정희 서거 직후 미국 국무부의 홀브룩 차관보조차 “서울에서 슬픔에 젖은 눈은 찾아볼 수 없었다”며 박정희를 보필한 공직자들에게서도 진정한 애도의 감정이 없음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했다. 유신체제는 이권 특혜로 얽힌 권력구조의 총체적 부정부패, 외채위기와 물가폭등을 야기해 국가와 서민을 파산 위기로 몰아갔다. 그에 따라 유신체제는 박정희 피살과 더불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넷째로 유신은 국가나 사회의 위기 탓이 아니라 주변 상황의 긍정적 변화를 왜곡하고 역사를 오도하면서 등장했다. 1970년대는 한국 사회가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민주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모처럼 만난 역사적 기회였다. 70년대가 민주사회였다면 국민들이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해, 광주학살·5공화국 같은 80년대의 파탄은 물론이고 90년대의 경제위기나 지역갈등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날의 양극화 현상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정상적인 역사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했다.

1977년 12월 실시된 야간 등화관제 훈련은 유신통치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다. 6·25 전쟁 때에나 통용되었던 시대착오적 훈련으로 당시 상점에서 팔던 창문 커튼이 동났고 시계탑 불빛까지 꺼야 했다. 그 밤에 박정희는 남산타워에서 서울 시내의 불야성 불빛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광경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그날 밤처럼 유신시기 국민들은 칠흑 같은 시대를 숨죽이면서 견뎌야 했다. 전제군주제와 같았던 박정희의 유신통치는 회복하기 어려운 인권탄압의 상흔을 남겼다. 유신체제는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민주주의사에서 지울 수 없는 반민주 독재로 기록될 것이다.

안병욱/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