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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주씨, 한미경제협의회 존재함에도 한미경영원 설립,갈등빚자 미국예의주시[미국무부 비밀전문]

장흥순 인수위원의 부친인 장우주씨가 한미경제협의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미경제교류를 증진한다며 한미경영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으며, 주한미국대사관이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미국무부에 보고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장우주씨[이하 장장군]는 한국기업인들의 도움을 받아 1974년 한미경영원을 설립, 지금까지 38년간 이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는 것이 한미경영원 홈페이지의 설명이며 설립과정에서 대한무역협회등 기존 경제단체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http://www.kabi.or.kr/

 

한미경영원 홈페이지를 보면 '제5차 한미상공장관회의 공동성명 제6항에 근거하여 1974년 한미합작으로 재단법인 한미경영원 설립'이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한미상공장관이 지난 1973년 7월 19일 회담을 통해 미국의 대 한국 수출증대를 위해 서울에 교역센터를 두겠다고 발표하자 장장군이 자신이 그 같은 단체를 운영하겠다고 나서서 한미경영원을 설립한 것입니다.

 

장장군은 1974년 6월 27일 창립이사회를 갖고 정인영 한라건설회장, 정수창 동양맥주사장, 김종희 한국화약그룹회장, 이은택 제일모직사장, 김현기 대한상의 전문이사등 5명을 한국측 이사로 선출하고 자신이 한미경영원 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5차 한미상공장관 회담직후인 1973년 8월 대한무역협회등 경제 3단체가 한미간 교역증진을 위해 한미경제협의회를 설립했으며 박충훈 대한무역협회 회장이 한미경제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미경제협의회가 이미 설립됐음에도 장장군이 비슷한 목적의 단체를 설립하려하자 경제계에서 곱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중복투자',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와바리 침범'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장장군은 한미경영원 창립이사회에서 박충훈 한미경제협의회 회장과 밥 도시 걸프사 회장등 2명을 고문으로 추대했으며 박충훈회장은 창립이사회 이후인 그해 7월 5일 명예회장직을 수락했다는 것이 당시의 언론보도였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제6차 한미상공장관 회담을 앞두고 1974년 5월 24일과 5월 31일 두차례에 걸쳐 5차 상공장관회담에서 논의된 '[가칭] 한미경제연구소' 문제를 미 국무부에 보고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1974년 5월 24일 '제6차 한미상공장관회담 아젠다관련보고'라는 제목의 전문을 보냈습니다. 1974년 한미상공장관회담에서 거론될 수 있는 의제를 미리 점검하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대응방안을 검토한 보고서성격입니다. 이 전문에서 미국은 장장군이 추진중인 '한미경영원'이 제대로 출범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될지 회의적 견해를 보였습니다. 이는 유사한 단체가 이미 설립돼 있으며 이에 따라 경제계등 이해관계자의 일치된 지원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먼저 한미경제연구소 추진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한미경제연구소'는 한국측이 의제로 제안한 것으로 한미 양국 기업인들이 서로 어떻게 비지니스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연구소가 필요하며 이같은 연구소는 미국기업의 한국수출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안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민간차원에서 설립돼야 하며 양국정부가 설립을 장려하겠지만 직접적인 지원은 할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새 연구소는 [1973년 발족된] 한미경제협의회의 산하에 설립한다는 것이 당초 논리였으나 한미경제협의회는 진행이 느렸던 반면 국방대학원 교수부장출신이며 한국내 하버드비지니스클럽회장인 장우주 예비역소장이 연구소의 청사진과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밝혔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됨으로써 대한무역협희등 경제 3단체가 설립한 한미경제협의회와 장장군이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1973년 11월 오찬회동을 마련했고 이 회동에서 한미경제협의회 간부는 장장군의 계획에 건설적인 비판을 가하고 자신의 지시아래서 연구소를 운영한다면 지원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말하자면 한미경제협의회 산하기구가 된다면 경제적 지원이 가능하지만 장장군이 별도의 단체를 만든다면 지원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그뒤 수개월간 장장군이 한국의 선도적 기업인들로 부터 재정적 지원을 확약받고 장소와 사무실도 기증받았으며 한미기업인들이 참여한다는 약속, 그리고 하버드 비지니스스쿨과 초보적인 커넥션도 구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창립이사회에서 한라, 동양맥주, 한국화약, 제일모직등 굴지의 기업인들이 이사에 선임됐으며 아마도 자의든 타의든 이들이 일부 지원을 함으로써 한미경영원이 설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장씨의 연구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한미양국 경제인들의 지원을 얻는 것이며 이같은 지원이 없다면 연구소는 시들어 버릴 것이라고 전망하고 장장군이 연구소를 시작할 수 있는 돈과 조직을 마련했다 해도 경제계로 부터 연구소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지원을 얻는게 필수라며 현재로서는 지원여부를 알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또 한미양국정부의 자금지원등 직접적 지원은 없다고 재차 강조하고 돈과 조직이 있는 한미경제협의회가 강력하게 서포트한다면 보다 더 원할하게 운영되겠지만 한미경제협의회의 지원이 없다면 장장군이 이를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며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만장일치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처럼 진행상황을 설명한뒤 토킹포인트 즉 대화요지를 건의했습니다. 한미경제연구소라는 컨셉은 휼륭한 것이지만 물질적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못박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구소를 준비하는 장장군이 똑같은 목적을 가진 한미경제협의회로 부터 직접적 지원을 얻는게 중요하다고 충고한다는 것이 대화요지였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5월 24일 전문에 이어 5월 31일 다시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 전문에서 주한미국대사관은 지난주에 한미경제연구소[KABI :한미경영원] 소장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장우주 장군과 대한상공회의소 김현기 전무 [HK KIM], 그리고 한미경제협의회측과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김현기 대한상공회의소 전무가 동석한 오찬회동에서 장장군이 한미경제협의회가 대한무역협회등 경제 3단체로 부터 강력한 서포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한미경제협의회의 지원을 받는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미경제위원회가 한미간 교역증진이라는 목표로 1년전인 1973년 이미 출범했을 뿐더러 한미경제협의회가 산하에 한미경제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 최초 구상이었다는 것이 5월 24일 주한미국대사관에 기록된 미국측 견해였습니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단체는 경제계의 출연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경제계가 이미 자신들이 설립한 한미경제협의회외에 비슷한 목적의 단체를 지원하는 것을 이중부담으로 여겼을 것이며 특히 이해가 충돌되는 당사자인 한미경제협의회는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까봐 장씨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장군은 따라서 자신이 한미경제협의회에 의존하기 보다는 대한상공회의소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고 김현기 대한상공회의소 전무도 장장군의 주장에 동조하며 힘을 실었습니다. 김전무는 한미경영원의 당연직 이사를 맡는 미국측 상공회의소 회장이 함께 하는 것은 대한상공회의소의 서포트를 받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은 얼마나 지원이 가능할지는 애매모호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측은 장장군에게 한미경영원은 연구소의 실질적인 유저[실수혜자]들로 부터 지속적인 재정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며 한미경영원이 한미경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물었고 장씨는 연구소 조직이 완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한미경제협의회의 김태동 전무이사도 만나 한미경영원에 대한 솔직한 입장을 물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자리에서 김전무는 장씨가 한미경제협의회를 비판한 것과 똑같은 논리로 장씨의 한미경영원을 비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전무는 한미경영원의 계획이 너무 거대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김전무는 만일 한미경제협의회에 어떠한 종류의 지원을 요청한다면 협의회차원에서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며 전문을 끝맺었습니다.

 

이처럼 한미경영원은 한미간 교류증진이라는 목표로 출범했지만 적지 않은 갈등을 격었던 것입니다. 장장군은 1972년 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재징중일때 하비브 주한미국대사에게 박성철 북한 부수상의 극비서울방문사실을 귀뜸했고 하비브대사가 부랴부랴 김용식외무장관등에게 연락해 사태파악에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바로 장장군이 한미경영원을 추진할때 주한미국대사는 하비브였습니다. 그러나 하비브는 1974년 9월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로 임명돼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미경영원이 1974년 6월말 경제계 일부의 반발속에서도 출범할 수 있었던 이유, 그러나 그뒤가 순탄치 않았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장장군의 의도가 기존 단체와 맞부딪히면서 불협화음이 빚어졌다, 이렇게 좋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장장군은 욱사 3기생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20여개에 달하는 훈장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장장군은 예편한 1970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유학중 박정희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대화를 주장했고 1971년 귀국해 그해 7월 동아일보에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그해 9월 2일 대한적십자사 초대 사무총장에 기용돼 남북대화의 물꼬를 텃지만 1년만인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10월 30일 물러나게 됩니다. 장장군으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그뒤 1974년 한미경영원을 설립했으나 한미경제협의회등 기존 단체들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기대만큼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못한 대신 1975년 3월 건설회사의 합작회사인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 수석부사장에 선임됐다가 9개월뒤인 12월 9일 사임하고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고 기업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장씨는 1977년 5월 20일 현대종합상사 사장에 선임됐다 1978년 9월 28일 물러나고 1079년 현대건설 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이명박사장에게 현대건설사장을 물려준뒤 1980년 2월 28일 대한알루미늄 사장에 임명됐다가 1981년 8월 12일 한라건설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85년 2월 물러나게 됩니다.

 

현대종합상사사장과 한라건설사장에서 물러날때는 다소 불미스런 이유였다는 것이 당시 언론의 보도였습니다만 열사의 나라 중동의 건설현장에 뛰어드는등 해외건술 수주에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씨는 1974년 한미경영원을 설립한뒤 1975년부터 1985년 2월까지 약 10년간은 대기업 CEO로 이름을 날렸으며 한라건설사장을 그만둔다는 보도 1주일뒤인 1985년 2월 18일 신문에 장씨가 한미경영원을 설립한다는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1974년 설립된 한미경영원이 그가 CEO 였을 당시 어떻게 운영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한미경영원 홈페이지에는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2009년까지를 기록한 홈페이지는 1974년부터 3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돼 있습니다만 1985년에 다시 설립 기사가 보도된 것을 보면 조금 앞뒤가 안맞는것 같습니다.

 

장흥순 위원이 지난 2010년 카이스트에 교수로 재직할때 자뮨료조로 전기자동차회사에서 주식을 받았다가 문제가 되자 돌려줬다고 말했습니다만 바로 그 직후 그의 부친 장우주씨가 이 회사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사실 시티앤티라는 이 회사는 장위원에 앞서 부친 장우주씨가 이 회사대표와 친분이 있었으며 그래서 장위원과 맺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장우주 19740524 by pooh8582

 

 

장우주 19740531 by pooh8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