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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5 내가 본 이병철 삼성회장 - 정준명 비서팀장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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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자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2월 12일)을 맞아 호암을 추모하는 정준명(65) 전 삼성재팬 사장의 기고를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정 전 사장은 1980년대 초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비서팀장을 지내는 등 7년여 동안 호암의 지근거리에서 근무했습니다. 호암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갖가지 구두 지시를 받아 기록했던 그는 삼성 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호암을 잘 기억하는 인물로 꼽힙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564/4000564.html?ctg=1100&cloc=home|list|list2

◆호암은 한국 현대경영의 아버지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 온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이하 호암)의 탄신 100주년을 2월 12일에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분이 흠모하며 학문적 접근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부족하나마 온고지정(溫故之情)으로 삼가 추모한다.

호암을 직접 뵙고 성장해온 삼성의 임직원들은 이제 그룹 내에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타이름과 꾸지람, 칭찬을 받던 임직원들이 호암의 창업정신과 선견지명, 그리고 에피소드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음은 틀림없다.

호암은 희망과 꿈을 실현해낸 스토리를 갖고 있고, 그의 인간적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는 국경도 넘는 것 같다.

국민소득에 걸맞은 사업 전개란 말은 요새 와서 이해가 되지만, 호암의 경공업적 소비재 사업이 비난받던 때가 있었다. 설탕 만드는 기술은 당시 첨단기술이었는데, 그럼 그때 배곯는 국민을 위해 유조선을 만들 수 있었는데 안 했다는 건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기초가 무너진 전후(戰後)에 고아와 상이용사, 가난과 폐허가 보이는 것의 전부이다시피한데 무슨 사업을 했어야 칭송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산업의 발전은 사회자본의 여건과 단계에 따라 큰 강물처럼 꾸준히 흐른다고 본다. 호암은 경영력과 자본력을 갖출 수 있게 되자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역설했다. 그 기술의 출처는 사람밖에 없음을 알고, 호암은 잘 뽑고 잘 배치하고 잘 대우하는 것을 늘 생각했다. 1957년 한국인의 연고성을 탈피하는 철저한 실력 위주, 인물 위주로 공채사원 모집을 국내 처음 실시했다. 68년엔 최초로 여비서 공채를 단행했다. 인재제일의 공정한 실천 의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그룹의 경영자원 조정 시스템으로 창안한 것이 비서실이란 독특한 조직이었다. 호암의 경영이념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정리되는데, 그중의 으뜸이 인재제일이라고 확신한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는다면 호암은 사람을 심었다. “의심 나는 사람 쓰지 말며, 쓰는 이상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논어)를 시스템에 접목했다. 호암은 직관력과 경륜으로 어떠한 난관도 안정적인 도형인 삼각구도로 보았다. 단순화하는 통찰력(insight)이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에 대하여

호암은 와세다(早稻田)대를 다녔으며 아들 셋을 모두 일본의 유명 대학에 유학하게 하였고, 손자도 그 길을 택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지리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 존재가치를 유익하게 활용했다. 당시 도쿄(東京) 지점장은 매일 아침 9시에 어김없이 걸려오는 호암의 국제전화에 보고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으며, 출장 때 만나는 일본 재계 인사들과의 일정 짜기와 인맥관리를 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 일본의 TV 프로를 보고 녹화할 것을 지정해 줬으며 VCR 테이프를 본 후에는 유관 부서로 내려보냈다. 옆에서 보고 배운 필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감탄하였으며 고위 임원이 되기까지 필자는 일본인과 일본 산업사회를 참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국내엔 ‘수요회’라는 재계 모임을 개최해 소통의 장을 열었다. 도움을 나눈 친구, 지금 필요한 친구, 필요할 친구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만났는데, 이는 국내외 어디서나 한가지였다. 호암은 앞으로 일본이 중요하니 공부하고 노력해 일본통이 될 것을 지시했다.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무수히 접하면서 그들은 한국사람 중에 최고의 일본통으로 단연 호암을 꼽는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다.

평소 숙제를 많이 냈는데 필자의 보고서를 본 후 또는 직접 지시한 말씀 중에 “일본을 등한시하지 말라. 가까이 있는 일본부터 배워라.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고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 “일본에서 평가 받으면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일본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노?” 등을 누누이 강조했다. 무엇이 부족한지 철저히 분석하게 했다.

한때 삼성그룹 임원의 약 70%, 간부의 약 절반이 일본어를 구사했으며 일본에 출장 또는 주재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옆 가게처럼 활용했다. 호암은 먼저 임직원들의 사물을 보는 눈높이를 중시했다. 언행과 용모와 태도를 강조했다. 골프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기본에 충실한 장기적 인재 관리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주재원들이 선진국에서 보고 배운 것을 고국에 돌아와 제대로 활용해줄 것을 기대했다. 도쿄는 물론 세계 주요 도시의 지점 사무실은 그 도시 최고 평판의 고층 건물에 두게 하여 주재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이끌어내게 했다. 필자가 경기도 수원에 근무하다 74년에 도쿄 주재원으로 부임했을 때는 가스미가세키(霞が關) 빌딩이 가장 높고 현대식 고층 빌딩이었는데, 그곳 사무실에 출입하면서 대단히 자랑스러웠다. 당시 양국 관계가 썰렁할 때인데 도쿄에 태극기가 걸려 있던 곳은 대사관, 민단(民團) 이외에는 이 빌딩밖에 없었다. 삼성이 입주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주재원들에게 집을 잘 빌려주려 하지 않을 때인데, 회사가 이 빌딩에 있다고 하면 우리를 다시 보았다.

제일모직 대구공장의 한국 최초 최고의 여사원 기숙사는 당시 호텔 수준이었다는 전설 같은 실화(實話)가 있다. 일본의 전자합작사(Sanyo)가 겨울 준비로 사내에 김장을 대량으로 해두어야 한다는 호암의 제안을 따를 수 없다고 했고, 전 세계에 없는 김장보너스 지급을 반대했지만 끝내 관철시킨 일화는 호암의 임직원 사랑의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70년대에 수원에 주재했던 일본 기술자들은 삼성을 도왔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제자가 스승이 되었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회고했다.

◆인사와 정보 연결의 테크닉

호암은 그룹의 구심점이며, 정말 끊임없이 현장의 정보를 모으고 나누고 확인하고 장악해 빈틈이 없었다.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나 거짓말, 매너가 그릇된 것은 받아주지 않았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정보라면 대소경중(大小輕重)을 가리되 놓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마치 커다란 스펀지와 같았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직접 만났고 보고서와 다큐멘터리를 읽었다. 하루하루가 궁금하여 못 견디는 성품처럼 보였으며 엄격한 시간관리로 자기 연마를 반복했다.

기술자는 경영을 알아야 하고 경영자는 기술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해마다 정기 임원 인사를 했는데, 사장이 인문계이면 부사장은 이공계로, 사장이 기술계이면 부사장은 경상계로 했다. 조직과 경영의 밸런스를 위해 경영의 기본은 같다면서 업종이 다른 회사의 사장들을 맞바꾸기도 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사람에 주목하고 이미 멀티플레이어(multi player)를 기대했고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학문보다 인간이 우선이란 말씀에서나 전인적(全人的) 교양을 갖추어야 전인적 인재라는 말씀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상을 강조하곤 했다.

정보-지식-지혜라는 사이클을 일찍이 실천했다. 성과를 내게 하는 혜안과 조련술에 감탄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학력이나 학위, 출신보다 능력과 효율, 시너지, 그리고 사람 됨됨이를 중시하여 인사를 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기준이었다. 성공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사내 파벌 같은 것도 없도록 했다.

성공의 자만을 경계해 냉탕 온탕의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좌천이라 할 인사를 한 후에도 용의주도하게 긴장하게 하고 목표관리를 하게 했다. 버릴 사람은 아예 야단도 치지 않았으며, 눈여겨본 사람은 매정하게 다루며 중용(重用)했다. 심부름을 시켜 보고,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해 보며, 해답이 없을 것 같은 숙제를 내 보며 끊임없이 사람 됨됨이를 체크했다.

유대인들은 훌륭한 답변보다 훌륭한 질문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하는데 정말 호암은 훌륭한 질문자였다. 질문할 땐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말문을 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재 획득에 대한 욕심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놓친 인재가 다른 그룹에 가 있으면 반드시 돌아오게 했다. 부하의 장단점은 본인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사장보다 처우가 더 좋은 전문가(고급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했으며, 독신자를 위한 호암생활관을 만들어 직접 환경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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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인사도 70%밖에 성공 못 했다고 봐야제, 아매”

◆인간미

동양 속담에 돈과 권력 가진 사람에겐 친구와 벌레가 낀다는 말이 있다. 호암은 벌레가 끼지 못하게도 하지만, 벌레를 잘 찾아냈다. 아니 벌레가 접근할 수 없는 치밀함과 철저함이 있었다. 작은 균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사람을 압도하는 안광(眼光)으로 두렵기도 했고, 엄숙한 침묵 앞에 굳어버리기도 했지만, 남다른 인간적 향기를 느끼게 깔끔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충격을 받은 호암은 국장(國葬) 행렬이 태평로를 지나갈 때 28층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린 분이었다.

평소 사장들과 임원들을 접하면서, 간혹 비서실장이나 비서팀장에게 “오늘 어느 누구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다, 한번 들어보라”고 할 때도 있었다. 슬그머니 들어보면 어김없이 무언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정, 자녀, 경제적 애로, 상하 간의 문제, 언로(言路)의 불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필자보고도 “오늘은 피곤해 보인다, 어디 아픈가, 내게 할 말이 있나, 회사가 잘 안 돌아가나” 등등을 타진했다. 어려워서 할 말을 못하는 것도 직감으로 알았다. 당시 비서인 필자가 무언가 들킨 듯 섬뜩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비서의 상태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비서를 가볍게 대하는 일은 물론 없었으며, 평소 숙제로 집중 단련시켜 놓고는 직관으로 다루기도 했다.

댁의 생활비, 공사 간의 개인적 지출 명세를 매달 찾아 점검하고 지난달보다 지출이 많은 달은 반드시 언급을 해서 바로잡았다. 1981년 말 필자는 비서팀장이 되어 보스턴 대학에서 호암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때 약 한 달간 미국 출장을 수행했다. 미국 재계·언론·학계 및 대기업 회장들을 두루 만났는데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주신 말씀이 평소 교육량의 일 년치는 되는 것 같았다.

▶에피소드=“요즘 사장들이 나하고 약속한 매출, 손익, 신규 사업, 이런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도 잘했다카더라. 사장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쟤? 고함을 치면 좋은 것, 잘한 것만 가져와 보고하니 날더러 우야라는 거고.”

“일을 잘해서 진급시켜줬더니 일을 잘 못하더라. 진급시키면 안 된다는 얘길 듣던 사람이 진급하고 나니 아주 잘하는 건 왜 그럴까. 나는 인사를 해보면 70%밖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제, 아매(아마).”

“부실경영은 형법에도 없는 죄다. 부정과 사람 잘못 보고 잘못 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삼성은 엄격한 사풍, 엄정한 인사와 감사 때문에 나를 냉혹하다고 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리 냉혹하나? 정군(鄭君)은 모른데이. 내가 임직원들, 사장들을 얼마나 사랑하나를.”

한번은 외부에서 회장님의 카리스마 때문에 삼성의 사장들은 손금이 없다는 우스개가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는 “누고? 손금 없는 사장이?”라며 웃으면서 “그런 사람 내는 안 쓴다”고 하곤, “있다 해도 그런 사람 오래 못 가쟤”라고 했다.

◆철저한 교육

기업문화라는 말이 생소하던 60~70년대에 호암은 자기성찰과 자기구현을 먼저 훈련하게 함으로써 성실하고 반듯한 유교적 자본주의의 일꾼, ‘삼성맨’을 가꿨다. 신입사원 교육과정부터 매년 실시하는 직급 및 직능별 집합교육과 승진자 보수(補修)교육 등의 재교육 제도를 확립하게 했다.

연수원을 짓고 교육을 집중으로 하기로 했지만, 교과과정(curriculum)과 시간 배정 및 교안을 어떻게 꾸리는 것이 효율적이고 성과가 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외부로부터 좋은 강사도 초빙했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할 일이 많았다. 매일 교육과정과 인원 수를 보고받았다. 또 주요 외국어 교육전담 ‘외국어생활관’을 구상해 필자는 일본 소니·NEC·산요(Sanyo)·마루베니·이토추·NTT 등 주요 기업의 외국어 교육 실태와 제도, 교육 현장을 탐방해 보고드리곤 했다. 잘 내주지 않는 일본 교재를 수집해 번역 응용했고 선진국 회사교육제도 등을 서둘러 도입했다.

교육과정부터 글로벌 마인드를 염두에 뒀으니 70년대에 뿌린 씨앗이 이제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82년 용인에 종합연수원을 개원할 때 호암의 교육관(敎育觀)이라 할 어록을 현관 벽 대리석에 새겨두었다. “기업은 사람이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인간 중심, 인재 제일의 요람을 상징했다.

선배와의 대화 및 사내 강사제도로 현장 경험에 의한 스킬(skill)을 전수하고 내리 사랑으로 코칭을 중시했다. 그리고 기업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공부도 시켰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업 경영은 재무 판단도 중요하지만, 공정·공평·공명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엄격한 인사와 충실한 감사로 끊임없이 조절했다. 인재가 많은 회사는 외침(外侵)에 강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목표 관리 시스템으로 무장하도록 하였으니 회사가 잘 될 수밖에 없게 했다. 높은 목표 의식을 갖게 했다. 또한 본인께서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한 후 회의를 소집하곤 하였으며 선의의 경쟁을 시킴으로써 크로스 체크(cross check)가 쉽도록 하여 판단했다.

관성과 타성을 배제하는 기회로 인사고과는 좋은 제도였다. 인사고과 양식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아 일본의 종합상사와 주요 제조회사를 찾아 다녔다. 이를 참고로 삼성은 1년에 업적고과 두 번과 능력고과 한 번을 했는데 이 자료의 5년치를 보면 누구라도 누가 어떤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 공정한 인사가 정착할 수 있었다. 호암은 도덕성을 미리 알아서 사람을 뽑고, 배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이 없겠는가를 고민해 비서실의 당시 인사팀장과 도쿄 주재 중이던 필자에게 동시에 이 숙제 해결의 엄명을 내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채근을 받았는데, 도쿄의 대학·언론·병원·연구소 등을 찾아가 문의를 거듭하던 중 우치다(內田)라는 정신연구소를 소개받게 되어 독일에서 개발되고 일본에서 개량된 기발한 도덕성 테스트 기법과 분석 방법을 보고할 수 있었다. 이를 사원 채용 때부터 반영하라는 지시로 약 30년이나 그룹 내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게 되었다.

사회에서는 그룹이니 재벌이니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평가로 문어발이라고도 했지만, 호암은 관계 각 사가 각각 하나의 전문부서요, 팀으로 보고 시너지를 발휘하게 했다. 순수 기술, 미래 과제 기술을 전담할 종합기술원과 세계 정세와 경제 동향, 정책 입안의 아이디어를 다룰 경제연구소를 만든 것은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고급 두뇌를 방치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호암은 평소에 정말 쉬지 않고 호기심을 키웠고 사람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매주 붓글씨를 썼는데, 자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릴 휘호를 고르기 위해 4자성어를 열거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30가지를 올렸다. 당시 이건희 부회장을 위해 ‘경청(傾聽)’을 썼다. 필자에게는 ‘신상필벌(信賞必罰)’과 몇 주 후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써주셨다. 휘호마저도 긴장과 엄격함을 피할 수 없었다.

◆조율과 조련의 기린아(麒麟兒)

▶에피소드=80∼81년 해외 현지법인 감사를 광범위하게 했는데, 그 보고서를 도쿄 주재 중인 필자에게 주며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정군도 주재원 하고 있고 여러 일본 회사 사정도 잘 아니 읽어보면 느낌이 있을 것이고 동료 주재원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일하는지 알 거 아이가.” “거기 써 있는 게 다 맞다면 큰일이다. 해외 주재원들이 대체 왜 필요하며, 외화 낭비하고 바깥에 나가 있을 필요 있나. 재고는 늘어나고, 제값도 못 받고, 사업은 부실하고, 제대로 일도 못 배우고, 본사는 허위보고를 해도 모르고…. 어찌해야 되것노? 정군이 한번 돌아보고 오래이. 감사한 곳을 슬그머니 가 보고 감사 후의 동향, 사기(士氣), 개선 가능성, 일본의 상사나 은행들은 그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지 보고 오너라. 비행기도 호텔도 직접 예약하고 지점에는 알리거나 부탁하지 말고 갔다 온다! 밥 얻어먹지 말고 정군이 사주고 친구처럼 직접 얘기 듣고 와 내게 얘기해라. 돈은 좀 가지고 가거라.”

당시 필자는 일본 이외의 지역은 2년간의 월남과 반나절의 대만 이외엔 나가본 적이 없고 구미(歐美)라곤 가본 적이 없었던 한자(漢字)문화권의 간부였다. 출장비와 약간의 예비비를 들고 지시대로 3월 한 달을 주요 6개국의 해외 현지법인, 한국계 은행 지점, 일본계 은행 지점, 일본 종합상사의 현지법인, 현지 교수 및 주재원 다수를 ‘친구처럼’ 만나보는 기록적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겁도 없이 처음 겪는 시차를 이기지 못해 몽롱하기도 한데 호텔방에선 그날의 보고서를 대충 써가며 귀국해서는 다시 일주일간 정리해 350여 페이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는 모두 손으로 직접 써서 보고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혼쭐이 난 셈이었다. 호암은 이 보고서를 줄을 쳐가며 보시다가 전화를 주셨다. “이런 보고서는 역작(力作)이라 해야겠쟤? 욕 봤다. 그럼 이후 대책은 어찌하면 좋으냐. 이걸 감사반이나 물산 사장에게 보내면 많아서 못 읽는다. 5분의 1로 줄여서 다시 보내봐라.” 이 일로 필자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각 지역 현장의 형편과 해외 비즈니스의 냉혹함과 인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글로벌과는 거의 무관했던 시절이니 필자의 보고서 수준보다는 이러한 시도를 하게 했던 호암께 경복(敬服)하는 것이다.

◆새 삼성

20세기에 사업보국의 구국(救國) 결단으로 솔선수범한 호암은 실용과 현장, 효율과 효과를 기치로 하여 숨가쁜 시대를 이끌어 왔다. 그 창업정신은 곳곳에, 실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호암이 타계하신 지 22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일거오득’ ‘오고초려’ ‘이타(利他·Altruism)’를 중시한 경영을 통해 총매출 약 11배 이상, 순이익 약 86배 이상 증가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뤘다.

호암이 가장 잘한 것은 재산 상속보다도 경영 상속을 하며, 후계자를 잘 선정한 일이라고 단연코 말하고 싶다. 호암의 장점과 혜안이 후대에 의해 진화되고 심화돼 삼성이 세계가 사랑하는 좋은 회사가 되어 새로운 백 년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 하늘에 계신 호암도 매우 흡족해하실 것이다.

글 : 정준명 전 삼성회장 비서팀장
원본출처 : 중앙일보


삼성 창업자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2월 12일)을 맞아 호암을 추모하는 정준명(65) 전 삼성재팬 사장의 기고를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정 전 사장은 1980년대 초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비서팀장을 지내는 등 7년여 동안 호암의 지근거리에서 근무했습니다. 호암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갖가지 구두 지시를 받아 기록했던 그는 삼성 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호암을 잘 기억하는 인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