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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0. 6. 5.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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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내리던 지난달 24일 밤 9시. 서울 강남의 한 음반 제작 스튜디오. 한 젊은 여성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하 녹음실로 내려온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곧장 녹음실에 들어간다. 가수 이은민(32·예명). 지금까지 싱글 앨범 두 개를 발표했다. 그는 3집 ‘기어이’ 출시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잠깐. 시곗바늘을 몇십분 전으로 돌려보자. 그는 서울 중구의 한 고층빌딩 사무실에 앉아 있다. 옷은 정장으로 바뀐다. 법무법인 세종의 4년차 변호사 이승민이다. 그가 맡고 있는 분야는 국제중재.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이 수백억, 수천억원대의 돈을 놓고 치고받는 전쟁터다. 이날 하루만 회의가 세 차례 소집됐다. 이 중 한번은 영어로 진행되는 국제 콘퍼런스 콜(전화 회의)이었다.

원본출처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004/4220004.html?ctg=1700&cloc=home|piclist|piclist2

녹음실을 나와 대기실에 앉은 그의 눈은 충혈돼 있다. 짙은 눈 화장도 피로까지 감추진 못한다. “사흘 연휴 내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야 했어요. 어제도 밤새워 서류 검토하고 두 시간 정도 토막잠을 잤어요.”

사무실에서 1, 2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구한 것도 음악을 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를 감지 못한 채 사무실로 달려간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고객 미팅이 없는 점심시간엔 집에 가서 발성 연습을 한다. 종종 옆집에서 항의를 받곤 한다.

한영외국어고-서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수료, 대형 로펌 입사…. 해외지사 근무를 하던 아버지(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두바이에서 국제학교를 다녀 영어 실력도 네이티브(원어민)에 가깝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코스를 밟아온 ‘엄친딸’이 왜 ‘가수 욕심’까지 부리는지 궁금했다.

“엄친 딸요? 저 ‘수퍼우먼’ 아니에요. 능력이 많거나 한가해서 이러는 게 아닌데….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고 버겁지만, 변호사와 가수, 내가 사랑하고 원하는 두 길을 걸어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어느 쪽에도 느슨해질 수가 없네요.”

법무법인 세종 사무실에서의 이 변호사.
그래도 이승민(변호사), 아니 이은민(가수)의 절박함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음악이 ‘안전한 줄타기’ 아니냐는 혐의를 지울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뮤지션(musician)은 제게 취미가 아니라 또 하나의 직업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하지 않는 저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대학 입학 후 노래동아리 ‘쌍투스’의 보컬로 활동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도 인터넷을 뒤져 기획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봤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마이크 앞에 섰고 나훈아·조관우 등의 공연에서 코러스를 하기도 했다.

“온전히 내 음악, 내 목소리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직업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거예요.”

그의 정체는 지난해 9월 2집 앨범 ‘리하트(Re:Heart)’를 낸 뒤 인터넷을 통해 탄로가 났다. 밤샘과 과로, 고열, 그리고 가십거리가 되고 있다는 정신적 부담. 방송 출연 제의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를 버티게 한 건 타이레놀 몇 알과 근성이었다.

“‘변호사 가수’가 아니라 ‘가수 이은민’으로 대중 앞에 서고 싶습니다. 제 노래가 순위 차트에 오르고 블로그에 퍼지는 걸 보면 가슴이 벅차올라요. 아, 내 감정과 의미가 전해졌구나…. 저는 두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성공하고 있는 거라고 봐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가수 활동이 변호사 일에 어떤 영감과 도움을 주는지 물었다.

“우선은 클라이언트(의뢰인)와의 회식에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죠. (웃음) 스트레스로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도 힘을 얻곤 해요. 또 변호사로서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한번 더 돌아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어요. 음악을 하면서….”

글=권석천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