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김형욱 친필편지 '금번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 1977년 7월 26일 김형욱설득편지
근계
유영수씨와 백태하씨로 부터 소식 잘 전달 하였습니다, 그동안도 건안하신지요?
세상사 여의치 않음이 상례라고는 하나 금번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다소나마 김형을 위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여 왔었는데 저의 뜻이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는 것은 정말 원통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여권연장문제와 부인께서 한국을 내왕하는 문제는 제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또 대장부의 신의를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사과와 문안을 겸해 각하 알현을 원한다면 제가 책임지고 주선토록 하겠습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들은 유영수씨로 부터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내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7월 26일
서울에서
김재규 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1977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하원 프레이저소위원회 증언이후에도 김전부장에게 사신을 보내 설득을 계속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지난 1977년 6월 22일 김형욱 전 부장이 프레이저소위원회에 출석, 증언을 함으로써 그간의 증언저지시도가 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약 한달뒤인 같은해 7월 26일 김 전부장에게 다시 설득편지를 보내는등 김형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중앙정보부가 한자로 인쇄된 편지지를 사용한 김재규 부장은 '금번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 이라고 밝혔습니다
김부장이 언급한 '금번 사건'은 1977년 6월 22일 김형욱 전 부장이 프레이저소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재규부장은 김형욱을 '김형' 이라고 지칭하며 '김형을 위해 도움되려고 노렸했는데 제 뜻이 무산되니 원통하기 그지 없다'며 심한 배신감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장은 (김형욱) 자녀들의 여권연장문제와 부인(신영순)의 한국내왕문제에 대해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직을 걸고, 또 대장부로서 신의를 걸고 보장하겠다고 김형욱을 설득했습니다
김부장은 또 한발 더 나아가 부인(신영순)이 박정희 대통령 면담을 희망하면 자신이 책임지고 주선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김재규 부장이 언급한 유영수, 백태하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한 메신저로 유영수씨는 뉴욕에서 PR회사를 운영하던 교포이며, 백태하는 육사 8기로 김형욱의 동기생으로 1961년 516때 한강다리를 넘었던 사람입니다
특이 이 백태하는 516 당일 아침 당시 박정희등 혁명군이 장도영 육참총장등 육본 수뇌부를 설득하는 회의석상에서
권총을 뽑아든 장본인이며 김형욱은 혁망과 우상 1권에서 자신이 당시 백태하를 진정시켰다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김형욱과 막역한 사이로 추정됩니다
김재규는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도 1977년 1월 17일, 그리고 1977년 2월 14일 김형욱에게 친필 사신을 보내 박정희 비방활동 중지등을 요청했었습니다만 김재규의 시도는 무산되고 김형욱은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청문회에 서고 말았습니다
김형욱은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1977년 7월 11일 프레이저소위 조사관의 조사에 응한 외에도 김재규의 7월 26일 사신이 전달된 뒤인 이듬해인 1978년 7월 20일과 1978년 8월 15일 두차례 더 증언에 나섬으로써 김재규의 사신설득작전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차 1977년 1월 17일 편지 일부
각하께서는 그 친구가 돌아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자유롭게 왕복한다면 남이 봐도 좋고 본인은 얼마나 떳떳하겠느냐, 또 돌아와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 원하는 중책도 맡기지 라고 하시더군요 김상근망명이라는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김전부장님께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신다면 이 얼마나 의의가 깊은 일이겠습니까
2차 1977년 2월 14일 편지 일부
백의종군한 충무공은 지금은 민족의 성웅으로서 모든 동포의 추앙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필귀정을 신념으로 삼고 지금까지 지켜온 김전부장님의 침묵을 귀국이라는 행동으로서 깰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싱긋이 웃으며 김포공항의 트랩을 내리는 김전부장님의 그리운 모습을 바라며
김형욱의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고 김형욱의 큰 며느리가 2003년 7월 3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하자 외동딸등 가족들도 2003년 9월 진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쟁점은 '장남 정한이 죽기 전까지 유언장 존재사실을 몰라서 상속을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송이 진행되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며느리의 주장에 맞서
외동딸 신해는 2003년 9월 12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주된 내용은 '큰 오빠가 유언장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재산분배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피고인 어머니 김영순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딸 진술 -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9년 아버지 김형욱이 실종된 당시 나는 19살의 틴에이저로서 큰 충격을 받았다
-오빠들과 엄마등 우리가족은 매우 친밀했지만 실종사건이 더욱 우리를 결속시켰다
-실종당시인 1979년 큰 오빠는 미혼이었고 1980년 결혼했다
-당시 우리가족변호사인 알란 싱거변호사가 끊임없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싱거 변호사가 큰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했다
-아버지 김형욱도 1975년 유언장 작성뒤 내용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뒤 저녁식사자리에서도
유언장내용을 언급했다, 당시 나는 14살 이었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유언장내용은 아버지의 재산 50%는 어머니가, 나머지 50%는 우리 3남매가 가진다는 것이었다
-실종뒤 싱거변호사등으로 부터 유언장 복사본을 받았다
-실종뒤 사망판결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재판부가 전가족이 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해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법원에 갔다
-한국내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받기위한 소송을 통해 큰 오빠의 부인은 2003년 4월 26만1천여달러를 받았다
-내 일생동안 단 한번도 큰 오빠가 재산분배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81년 5월 12일부터 유언장 집행자가 돼
김형욱 재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21년이 지난 2002년 9월 장남 김정한이 죽게 되자
큰 며느리등 장남 가족과 김영순 사이에 재산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형욱의 큰 며느리는 남편이 생전에 유언장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며
이는 시어머니 김영순씨가 유언장 집행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고 2003년부터 뉴저지 버겐카운티 지방법원에서
원고 며느리 피고 김영순씨의 법정공방이 시작됩니다
2003년 7월 3일 원고인 큰 며느리는 재판부에 자신의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며느리 진술 5매 -
이 진술서에서 큰 며느리는
- 시어머니 김영순이 유언장 집행자로서 유언장에 기록된 상속인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 시어머니 김영순은 직장을 다닌 적이 없고 소득소스가 전혀 없다
- 김형욱은 한국의 중정부장으로서 197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1978년 6월 30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김형욱이 7만5천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적발됐다고 보도했다
- 이 기사는 김형욱이 시티뱅크 뉴욕에 2천만달러, 해외은행에 6백만달러등을 예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형욱 본인은 3백50만달러만 인정했지만
- 시어머니 김영순은 1983년부터 알파인 저택 신축을 시작했고 가치는 1천만달러에 이른다
- 시어머니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받았다
- 한예로 뉴저지 테너플라이 P모 은행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방문해 세이프티박스에 10만달러를 넣어두었으나
그뒤 남편이 확인했을때는 5만달러밖에 없었다
- 스위스 은행에 막대한 자금이 예치돼 있다
- 알파인저택은 김형욱 재산으로 건축된 것이다
- 남편과 김정우 김신해등 3자녀가 동일하게 김형욱 재산에 대해 16.65%를 가질 권리가 있다
는 등의 진술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형욱의 2남 김정우와 외동딸 김신해는 2003년 9월 12일 며느리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는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게 됩니다
이 주택의 주소는 PO BOX 295, TAMARACK ROAD, ALPINE, NJ 로
알파인 다른 주택들처럼 번지 없이 사서함 번호로 표시됩니다
지적도상으로는 알파인 블록 22 랏 25입니다
대지가 2에이커, 약 2천4백여평인 이 주택의 가격은 3년전인 2006년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가
고시한 공시가격만 3백78만천9백달러 입니다
공시가격이 시세에 한참 못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현시세가 최소 6백만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부동산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이후락 사위 알파인 주택
또 이들부부는 MMGK LLC 라는 법인을 설립해 지난 2007년 4월 13일
뉴저지주 에지워터의 땅을 구입합니다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MMGK LLC의 주소는 바로 이들부부의 알파인 집 주소입니다
이땅의 매입가격은 무려 6백90만달러 였으며 양도세만 8만9백여달러에 달했습니다
이후락 사위 엣지워러 2007
그이전인 1987년 이들 부부는 MONDA ASSOCIATES 라는 법인을 설립해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을 매입합니다
이 빌딩의주소는 172 MADISON AVE, NEW YORK, NY 으로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입 1987
이 빌딩을 팔때 위임장서류를 통해 MONDA ASSOCIATE의 주인이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 정화섭-정명신[이명신] 임이 드러났으며, 매도서류에도 정화섭이라는 이름과 서명이 있으며
2002년 4월 2일 매도시 가격은 8백97만5천달러 였습니다
이 빌딩은 2007년 다시 다른 주인에게 팔리는데 그때 가격이
천5백90만달러였으므로 현시가가 천 7백만달러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씨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자에 재직할때 사위인 정화섭을 1972년12월
국제문제 담당 국장으로 임명했다 박정희의 질책을 받고 물러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정유회사인 G사가 1969년 8월 21일 스위스 유니언은행 서정귀씨[이후락 사돈] 명의로
2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송금하자 유니언은행은 이돈의 입금사실이 기재된 구좌명세서를
1969년 9월 2일 이후락의 사위인 정화섭에게 발송함으로써
이후락씨 사위인 정씨가 이후락씨의 부정축재 자금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30년전인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덮기 위해 부정축재자 조사에 나서
1980년 6월 19일 권력형 부정축재자 10명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부정축재액은 김종필이 2백16억원, 이후락은 백94억원, 이세호 백 11억원등이었습니다
이후락과 관련해 1977년 로스앤젤레스에 빌딩을 매입했다는 소문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이부분은 고위관리를 헐뜯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대충 이러한 부분과 함께 부정축재 내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LA의 빌딩 매입소문을 듣고 확인을 진행중이지만
아직은 사위나 며느리 이름의 빌딩 매입 계약서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10 26 으로 잘 알려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한지 30년이 됐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을 전후한 국무부와 CIA 전문. 즉 국무부의 비밀훈령, 주한 미대사관의 보고, CIA 본부와 한국지부간의 문서등을 한번 정리하고 분석해 보려 했지만 시간관계상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돼 극히 짧은 기간 10월 19일경부터 11월2일 정도까지의 전문들만 올려봅니다
글라이스틴대사가 11월 2일께 국무부로 보고한 '미국이 저지하지 않으면 한국은 군사정권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라는 전문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또 박정희 사망, 박정희 암살등으로 사건을 표현했지만 '제거' 즉 'REMOVAL OF PRESIDENT PARK'라는 표현도 사용한 대목에서 박정희 전대통령 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과도정부를 책임질 대통령대행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정일권 전총리도 물망에 오른다는 내용도 있네요
1026 전부터, 특히 약 1주일전부터 주한 미대사관 특히 글라이스틴대사의 행보가 빨라지며 박준규 공화당 당의장, 태완선 유정회회장, 이철승, 고흥문, 김영삼등을 빈번히 만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약간 '고집불통'으로 본 듯한 내용도 있고 한 야당정치인은 한국을 움직이는 4대 파워로
학생, 국민, 정치인 그리고 미국을 꼽았군요
전문을 원본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에서 올렸습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1026을 거쳐 1212 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역사의 분수령, 승자의 기록을 전할 사람들은 아직 많이 생존해 있지만
패자의 진실을 남길 사람들은 이미 너무도 많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1212 당일밤 전두환등 신군부가 최규하 전대통령을 압박해 정승화 총장 연행에 재가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재가 현장에 배석했던 사람은 전두환쪽을 제외하고는
최광수 당시 비서실장이 유일합니다
사실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한 궁정동 안가도 최광수 비서실장의 처가쪽 집이었으나 어쩔수 없이 중앙정보부에
매도한 집입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의 용기있는 증언을 기대해 봅니다
30년전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망명이전부터 미국에 주택을 구입한 것은 물론 대형쇼핑센터를 매입하는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6년여를 중정부장에 재직하다 1969년 10월 해임된뒤 국회의원등을 지내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1973년 3월 유정회 명단에서도 제외되자 박정희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판단해 1973년 4월 15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73년 1월 5일 시무식의 어수선한 틈을 타 일본인명의의 위조여권으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김형욱은 수차례의 간청끝에 간신히 해외여행 승낙을 받아 4월 15일 대만으로 출국, 중간에 미국행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경유지인 일본공항에서 중앙정보부요원들과 예상치 못한 조우를 하는등 우여곡절끝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7년 10월 발간한 김형욱 실종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김형욱의 미국 망명 결심시점을 1973년 3월, 빠르게 잡더라도 1972년 10월 유신선포에 따른 국회해산 이후로 미뤄 짐작하고 있습니다
1973년 3월 김종필이 총리로 기용되면서 행동에 제약을 받자 탈출을 구상하게 되고 이때부터 사채를 회수하고 외화를 환전하고 외화밀반출을 했다는 것이 1973년 3월설이요, 1972년 10월 17일 해외국정감사도중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자 그때부터 영어회화공부에 매달렸다는 것이 1972년 10월 결심설입니다
1971년 1월 4일 김영순명의 뉴저지 테너플라이 주택 매입
16만5천달러짜리 주택 – 당시 1인당 이민자 외화허용환도가 백달러
그러나 김형욱 일가가 부동산등을 구입하며 미국정부에 제출한 계약서등을 중심으로 행적을 추적한 결과 최소한 1971년이전부터 치밀한 미국 망명을 추진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계약서 사진 참조]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확인한 결과 김형욱은 자신의 부인 신영순[미국 서류에서는 신영순과 김영순 표기가 혼재]의 명의로 1971년 이미 호화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신영순 명의로 주택을 구입한 것은 1971년 1월 4일이며 주택소재지는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트라팔가로드 60번지, 대지가 1.3에이커로 1,591평 규모에 건평이 81평, 매입가는 16만5천달러였습니다.
당시 미국에 이민가는 사람에게 반출이 허용된 이민정착금이 1인당 1백달러였으니 16만5천달러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큰 돈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부동산업에 종사한 한 재미동포는 ‘1971년보다 10년지난 1980년대초까지도 한인이민자들이 구입한 집들이 3-4만달러였다며 1971년 16만5천달러라면 호화주택’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지역은 뉴욕에 주재하는 한국외교관이나 지상사 주재원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공교롭게도 지난 2007년 3월 한국정부가 3백만달러를 주고 구입, 현재 모 공사가 살고 있는 집도 바로 김형욱이 1971년 구입한 주택과 이웃해 있습니다 [한국정부 2007년 3월 3백만달러 주택구입 계약서등은 이미 이 블로그에 공개돼 있습니다]
내일은 김형욱이 망명이전에 설립한 법인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글 싣는 순서는 - 김형욱 부인명의 법인 설립 - 법인명의로 망명 1년6개월전 대형쇼핑센터 매입
- 김형욱 79년 8월 파리방문직후 현 알파인 주택부지 매입 - 김형욱 실종 50일뒤 김형욱부인 나대지 7필지 구입 등의 순입니다
지난 30년전 1979년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미국 뉴저지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지난 5월 초순 그의 묘를 발견했습니다
516 혁명이후 박정희 정권의 지킴이 역할을 하다 중정부장자리에서 밀려나자 미국으로 망명, 미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권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렸던 김형욱.
박정권과 첨예한 갈등을 빚다 지난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30년만에 결국 공동묘지의 한켠에 누워 있는 그를 찾았습니다
이 공동묘지는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등 그의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뉴저지 알파인집에서 약 2.5마일 거리에 있었습니다
묘비에는 KIM 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IN LOVING MEMORY' 란 단어아래 왼쪽에는 김형욱을 의미하는 'HYUNG W' 오른쪽에는 그의 부인 신영순을 의미하는 'YOUNG S SHIN'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김형욱의 이름아래 그의 생일인 음력 1925년 1월 16일을 의미하는 '음 JAN 25 1925' 란 글이 눈에 띄고 아래에는 그의 실종일로 기억되는 1979년 10월 7일 'OCT 7 1979'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인 신영순은 아직 생존해 있어 출생일자만 적혀 있었습니다
한때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대한민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며 그후로도 오랬동안 '기구한 실종'으로 인구에 회자됐던 김형욱, 그의 묘비에는 'IN LOVING MEMORY' 라는 짧은 3단어가 전부였습니다
김형욱의 옆에는 그의 큰 아들 정한이 함께 묻혔습니다 10대 초반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갔다 발목지뢰를 밟아 발목을 다쳤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던 김정한은 그의 아버지 김형욱 실종이후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다 2002년 9월 세상을 등졌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를 찾아서 물어봤었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는 가족등 이해관계인이 아닌 이상 아무 것도 답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과연 이 무덤속에 김형욱 시신의 일부라도 묻혀 있는지, 아니면 가족들이 그의 추모를 위해서 가묘를 만들었는지는 가족만이 알고 있습니다
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역임했던 방준모 전 실장에게 전화했었습니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방전실장은 너무 놀라 말문을 잊지 못하면서 '그곳이 어디냐, 잘잘못을 떠나서 동기생으로, 또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로서 그의 무덤앞에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리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너무나 많습니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간헐적으로 미국정부 여러문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미국망명을 준비했는지등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JPRI Working Paper No. 20 Korean Scandal, or American Scandal? by Bruce Cummings
미국내에서 한국현대사 연구에 일가견을 가진 학자로 평가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 시키고대 역사학 교수이자 노스웨스턴대학 국제비교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문제에 대해 조금은 삐딱[?]한 시각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브루스 커잉스교수가 자신의 기고문에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 1996년 5월 샌프란시스코대학 일본정책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워킹페이퍼 제20권에 '한국의 스캔들 또는 미국의 스캔들'이란 기고를 했습니다
기고내용은 생략하고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커밍스는 껄끄러웠던 한미관계를 언급하다 김형욱 이야기를 들고 나옵니다
커밍스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 대충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미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의 중요한 증인인 김형욱이 지난 1979년 파리에서 실종됐다, 첫째 김형욱은 파리에서 살해돼 그의 목이 외교 파우치를 통해 박정희에게 보내졌거나 둘째 서울로 극비리에 압송돼 청와대 지하 사격장에서 박정희에 의해 2발의 총에 맞아 살해됐다'
Meanwhile the key witness before Congressman Fraser's committee, the former KCIA Director Kim Hyung Wook (who had defected to the U.S. and who testified under threat of perjury in the U.S. and "under a threat of death" from Korea[24]), was reportedly kidnapped in Paris in 1979 and (1) had his head cut off and sent to Park Chung Hee in the diplomatic pouch, or (2) was secretly shipped back to Seoul where Park personally executed him "by shooting him twice at point-blank range" in the basement of the Blue House.[25] Not surprisingly no high Korean official has come forward to testify about Korean wrongdoing in the U.S. since then.
Meanwhile, the American CIA has refused to allow former employees to publish what they know about Koreagate because of the "identifiable damage to the national security" that would result.[26] ===========================================================================
즉 파리현지 살해설과 청와대 지하 살해설을 동시에 제기한 것입니다 사실 이 2가지 가설은 김형욱 실종뒤부터 프랑스와 일본 미국등에서 나돌던 소문으로 한국에서도 1985년께부터 기사화되기도 했던 가설입니다 그러나 나름 한국문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학자가 주장했다는 점이 관심을 끄는 이윱니다
커밍스는 기고문 본문에서는 2가지 가설을 제시했지만 기고문 주석에서 청와대 지하에서 살해됐다는 2번째 가설에 더욱 방점을 찍습니다
커밍스는 이 2가지 가설이 1981년 3월 31일 발행된 뉴저지주 일간지 버겐레코드에서 인용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커밍스는 김형욱 가족의 변호사가 자신의 친구의 형이라며 법원에서 2번째 즉 청와대 지하 살해설을 받아들였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이날은 김형욱의 시롲에 따른 사망판결을 받기 위한 심리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김형욱의 처 신영순과 그의 3자녀가 사망판결을 구하기 위한 재판을 청구했던 것이지요 커밍스가 자기 친구의 형이라고 말한 변호사는 바로 알란 싱거 변호사로 김형욱 망명이전부터 김형욱의 대리인으로 활동한 변호사입니다 김형욱은 이 변호사와 함께 이미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치밀한 망명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미국정부에 보관된 각종 서류에서 밝혀집니다만 이부분은 서류와 함께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결국 커밍스는 중정요원이 김형욱을 납치해 대한항공 비행기[화물기?]에 태워 서울로 압송한뒤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이 있는 가운데 박정희가 '너는 배신자다'라는 말과 함께 처단했다는 주장을 펼친 셈입니다
아래는 커밍스 교수가 기고문 말미에 제시한 주석이며 기고문 원문을 화면창으로 첨부합니다 ============================================================================= 24. New York Times, June 24, 1977. 25. The Bergen Record, March 31,1981. (The Bergen Record is a newspaper published in Bergen, New Jersey.) A lawyer for Kim's wife, who happens to be the brother of a friend of mine, succeeded in getting the court to declare Kim dead; the wife was waiting to gethold of his--very considerable--estate. The court accepted the second version ofKim's death. 26. New York Times, Dec. 22, 1979.
지난 79년 10월 발생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통째로 반영하는 사건입니다
올해로 김형욱이 실종된지 30년이 됩니다 하나씩 그동안 제가 조사한 자료를 밝혀나갈까 합니다
우선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한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을 보기쉽게 10부분으로 나눠서 올려봅니다
생각보다는 자료가 상세해 실종사건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데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저도 자료스캔이 끝나는 데로 하나 하나 공개하겠습니다 안치용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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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다시 한번 당시 사건을 찾아보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김대중 납치 사건 보고서 전문을 구해 블로그에 옮겨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검색도중 우연챦게 접한 일본영화 KT는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영화 KT는 이 사건에 일본 자위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아주 깊숙히 관련돼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세가지다 첫째 박정희가 지시했다 둘째 납치가 아닌 살해작전이었다 세째 일본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런 메세지에다 첩보요원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부차적인 메세지다
그동안 우리가 알기로는 자위대 출신 정보요원들이 사설 흥신소를 차려 디제이의 소재를 알려주는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한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 영화가 모두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탄탄한 취재에 바탕을 두고 있어 다시 한번 자위대 관여범위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하나 과감하게 자위대의 관여를 영화로 그린 감독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꼭 한번 이 영화를 보고 현대사의 비극을 되짚어보기를 간곡히 권한다
짧은 감상을 말하라면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면서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함과 무거움이 엄습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KT로 일본인인 사카모토 준지가 감독한 영화로 138분 길이이며
김갑수 최일화등 한국배우들이 출연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납치를 당한 디제이 입장이 아니라 납치를 실행하며 갈등하고 절규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어쩔수 없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본 자위대원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중정요원들을 미화 내지는 호의적으로 그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준지 감독이 디제이 납치에 자위대 관여사실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스파이 비밀경찰이면서도 인간으로서 어쩔수 없이 겪게 되는 번민과 갈등, 그리고 절규를 잘 전달했다는 생각이다
일본 자위대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도미타 삼좌는 이제 그늘속에 사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전역을 희망하지만 자위대 고위층에서는 ‘그에게 가계를 열고
중앙정보부 KCIA를 지원하라’고 명령한다
자위대 간부는 일광욕을 하고 싶다는 도미타에게 ‘그늘속에서 일할 때 국가와 국민이 행복하다’는 선배장교의 말로 설득을 하고 결국 도미타는 현역 자위대 대원들과 함께 흥신소를 차린다
도미타 삼좌와 김차운 1등 서기관은 여러 차례의 업무협조를 통해 잘 아는 사이.
여기서 잠깐 영화에서 빠져나와 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암묵적 지시에 의해 이후락이 이철희를 통해 지시하고 김기완 주일 공사- 김동운 1등 서기관 – 한국의 제임스 본드라 불리던 윤진원등이 사건을 실제 주도한 핵심인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김차운 1등 서기관은 바로 김동운 1등 서기관.
김차운이 도미타에게 도저히 디제이를 찾을 수가 없다며 소재파악을 부탁하고 그 와중에 디제이 진영에서는 살해위협이 진행된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는다
이 제보의 당사자는 뒤에 밝혀지지만 바로 이 작전 가담을 명령받은 중정요원으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다 목숨을 걸고 제보를 하게 되지만 결국 제보사실이 드러나면서 동요요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김차운이 마땅챦아하는 도미타에게 ‘ 내 목숨이 걸린 일’이며 ‘조직의 일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일’이라고 설득하고 협조를 약속받는다
71년 대선때 트럭테러로 다리를 절게 된 디제이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일본에서 유신독재 타도에 나선다
이 회의에서 김대중의 입을 막는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할 때 김차운은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목’이라며 간접적으로 박정희의 살해지시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동백림사건때는 납치해 한국으로 데려가서 문제였지만 여기서 없애버리면 된다’며 강경론을 편다
어렵게 소재파악을 마치고 감시에 나서게 되지만 일본 경시청에서 디제이를 미행하는 중정요원들의 사진을 촬영함에 따라 다시 2명의 요원이 교체됐고 새로 투입된 요원은 임무수행에 갈등하다 이호 주일대사에게 이를 직보한다
이호대사가 김기완을 불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김기완은 ‘나도 수차례 만류했지만 어쩔 수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김차운등은 1973년 8월 9일 디제이가 자민당에서 연설을 하기로 했다며 자민당에서 연설을 하게 되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됨으로 그 전에 디제이를 납치 살해하기로 하고 요원들과 함께 최종 도상연습을 마친다
또 도미타에게도 8월 8일이 디데이라며 마지막까지 함께 해 달라며 2천만엔을 전달한다
도미타는 깜짝 놀라 ‘마지막까지 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자 ‘김차운은 끌어다 주면 뒷처리는 우리가 하겠소’라며 자위대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한다
김차운은 도미타가 결심하지 못하자 자신의 세 자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이가 문제가 있어 성형수술을 꼭 시켜주고 싶다고 말하는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도미타의 협조를 끌어낸다
도미타가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암살이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모두 죽는다’는 김차운의 말
결국 도미타는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암살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이에 갈등하는 중정요원이 디제이 인터뷰기사를 실은 신문기자에게 접근해 다시 한번 ‘중정의 디제이 암살계획’을 제보한다
일본의 포르노극장에서 중정요원은 기자를 은밀히 접촉, 내용을 전달하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이 기사가 다른 잡지에 게재된다
디제이를 미행해 납치하려던 중정요원들은 현장에서 이 기사를 접하고 다시 한번 철수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번은 디제이를 미행하다 경시청에 사진이 찍히게 되고 한번은 모든 요원을 동원해 결행할 준비를 마쳤지만 납치계획을 실은 기사 때문에 중단하는 것이다
도미타는 마침내 2천만엔 수표를 받아들이며 가담을 결심한다
도미타의 가담 결심은 김차운에 대한 의리와 우정이 가장 큰 이유지만 수표를 받은 것은 그가 사랑하던 한국여자, 학생운동을 하다 중정에 끌려가 고문으로 큰 흉터를 남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에게 수술비용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여자는 수표를 거부하게 되고 나중에 도미타는 다시 그 수표를 김차운에게 돌려주게 된다
잡지에 암살기사가 게재된뒤 김차운은 요원내 배신자를 찾게 되고 요원들을 동원 디제이 암살 예행연습이라며 그 배신자를 죽이고 시신을 절단해 유기하게 한다
각 요원에게 마취 절단 등을 시키던 김차운은 피를 모두 빼내고 절단하려다 도저히 못하겠다며 구역질을 하며 돌아서는 요원의 목을 붙잡고 ‘이제는 돌아설 수 없다’고 말한다
하수구 시설이 있는 방에서 비닐천막위에 사람을 누이고 절단을 하고 한 요원을 수도호스를 들고 피를 그대로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바로 이날 중정암살계획을 보도했던 기자는 다시 극장에서 중정요원을 만나기로 했지만 이미 살해당한 중정요원은 나타나지 않는다
드디어 1973년 8월 7일, 암살실행 하루전 최종점검에 나선다
김기완 주일공사는 ‘제군들 내일 반드시 신병을 확보하도록’ 이라는 말로 엄염을 내린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았던 자위대의 역할은 소재파악에서 끝났지만 이 영화에서의 자위대의 역할을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끝까지 가달라던 김차운의 말에 따라 도미타, 자위대 정보장교 도미타도 호텔에서 함께 디제이를 납치하게 된다
이들은 잘 아는 데로 디제이와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만난뒤 방을 나올 때 디제이를 납치하기로 했고 이 경우 목격자는 디제이뿐이라서 디제이만 살해하면 완전범죄라는 구상을 한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 디제이의 먼 친척동생인 김경인 의원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김차운은 디제이를 호텔복도에서 납치하려다 김경인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되고 디제이가 납치된 방으로 돌아와 침대를 걷어차고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절규한다 실패를 절감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작전변경이다 차에 실어’
감독은 이 말을 통해 디제이납치가 아니라 디제이 살해가 당초 계획이었음을 알리려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일본경시청이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을 발견, 한국정부를 압박한다
자위대가 깊숙히 관여해 사실상 납치를 묵인해 주었으면서도 바로 이 지문을 근거로‘얼르고 달래고 빰치는 식’으로 한국을 갖고 노는 것이다
이 지문에 대해 이 영화는 김동운 즉 극중 김차운이 의도적으로 지문을 남긴 것으로 해석한다
지문이 발견돼 신원이 확인되면 한국정부등에서 작전에 실패해도 이름이 알려지고 신원이 확인된 이상 자신을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김차운이 지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고 아마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들은 우여곡절끝에 마취된 디제이를 호텔주차장으로 끌고 나와 차에 싣고 오사카로 향하게 되고 자위대원 도미타는 납치 승용차 앞좌석에 앉아 검문검색에 대비한다
자위대원이 용금호가 있는 기다리는 부두까지 동행했다는 것도 이 영화의 첫 주장이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일본어에 능하다 하더라도 경찰 검문등을 당할 경우에는 당황해서 탄로가 날 수도 있으므로 일본인 1명을 동승시킨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뒤늦게 납치를 알게 된 재일동포 청년은 자신의 소홀로 디제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엉엉 소리내어 울게 된다
한편 부두로 가기전 미행을 눈치채고 안가로 가면서 김차운은 김기완에게 전화를 건다
김차운의 전화를 받은 김기완은 당초 살해작전이 실패했음을 알고 ‘이제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살든 죽든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반드시 살려시 돌려보내라’고 말한다
김차운은 김기완에게 ‘이제 어떻게 하실겁니까’라고 묻자 김기완은 ‘이제부터는 나보다는 자네를 먼저 생각하게’라고 말한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후배를 생각하는 말같다, 당신 살길만 생각하라는 말이다
김차운과 전화를 끝낸 김기완도 위협을 직감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즉시 미국으로 가서 영주권을 신청하고 자신과 딸을 초청해 달라고 당부한다
영화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후일 김기완은 미국에서 살게 되고 [망명인지는 모르겠음] 김형욱의 코치로 한국정부에 디제이 납치사건을 폭로하겠다고 협박, 한국정부로 부터 거액을 챙기게 됩니다
한편 김차운은 통화뒤 야음을 틈타 도미타와 함께 용금호에 가기 위한 통선부두에 도착하는데 느닷없이 검은 승용차가 굉음을 내고 달려온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자위대의 도미타 부하수사관들,
본부로 연행해 오라는 명령이라며 더 이상 관여하면 안된다고 설득한다
도미타는 중정요원들과 작별을 고하게 되고 오사카로 오는 도중 2천만엔 수표를 돌려받았던 김차운은 자신이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도미타에게 수표를 자신이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말로 작별을 고한다
중정요원들은 코만 내놓은채 얼굴을 비롯해 디제이 몸전체를 테이프로 둘둘 말아싼뒤 통선으로 한시간가량 달려 용금호에 오르고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일본 외해로 도망치는 속에서 갑판아래쪽에서는 디제이를 수장시키기 위해 무거운 추를 메달기 시작한다
디제이는 이제는 때릴 필요도 없다 때리지 마라 하느님 상어에게 몸둥아리 반이 먹히더라도 살아나게 해서 한국을 민주화시킬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바로 이때 한 중정요원이 추를 메달면서 디제이의 발등에 손가락으로 ‘안심’이라는 글을 쓴다
이 중정요원은 갑자기 총을 빼들어 김차운등에게 겨누며 ‘이사람을 죽이면 안됩니다 ,. 김선배님 상호 죽이는 일은 그만합시다’라고 울부짖는다
김차운은 ‘네놈이 배신자구나, 남산 지하 5층에서 이 세상 하직할 준비나 해’라고 외치다 헬기 소리라 들리면서 방심하는 틈을 타 ‘배신자’로 낙인찍은 중정요원을 총으로 제압한다[디제이의 생환뒤 기자회견에서 이 부분은 없어 '픽션'으로 추정]
그뒤 김차운은 갑판으로 뛰어올라와 헬기를 향해 총을 발사하며 ‘너희들이 무얼 알느냐 상관하지 마라 돌아가, 참여할 권리가 없어 라고 울부짖는다
김차운이 헬기에 총을 쏠 동안 헬기에서는 모르쓰전신을 통해 용금호에 무전을 보낸다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
역사의 전환점이다 만약 이때 수장됐다면 한국 현대사는 다시 쓰였을 것이다
헬기, 비행기부분에 대해서는 디제이는 들었다고 진술했지만 중정요원들은 완강히 부인한 부분이다
장면이 바뀌고 자위대로 연행된 도미타
도미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자위대에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가게 즉 흥신소를 열어 중정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간부는 권총 한정을 도미타에게 내민다 ‘총알은 한발만 들었네’ 라는 말과 함께
자결하라는 의마다
그러나 도미타는 ‘일본 자위대는 미군의 제2중대다, 일본은 미국의 엘로몽키다’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며 자신은 자결하지 않을 것이라며 쓸쓸히 자위대를 떠난다
조직에서 버림받은 도미타의 등뒤로 ‘자네는 이미 흥신소 차리기 전날 전역한 것으로 처리했네, 자네 몸은 스스로 지키도록’ 이라는 냉정한 말만 들려온다
디제이는 부산을 거쳐 결국 6일만에 서울의 집으로 돌아온다
도미타는 자위대에서 나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마지막 우정을 발휘한다
김차운이 보험을 든다며 지문을 남긴 것을 의식, 사건현장에 김차운의 지문이 있음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림으로써 김차운의 목숨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다
도미타는 중정 암살계획을 보도한 기자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며 보도를 부탁하고 자신은 이미 시골에 숨어 지내겠다고 작별인사를 ㅎ나다
그러면서 도미타는 다시 이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의 단서를 남긴다
일본 자위대 최고위간부가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라고
결국 그래서 자위대가 디제이 납치 살해기도사건에 관여했다는 배경설명이다
시골 깊숙한 것으로 잠적한 도미타, 자위대는 도미타의 행적을 찾지 못하다 납치사건 약 3개월뒤인 11월 2일 마침내 그를 찾는다
도미타의 한국인 애인이 도미타가 있는 시골을 방문하게 되고 자위대가 그뒤를 밟은 것.
도미타는 사랑하는 여인을 마중하기 위해 시골 간이역으로 나간다
간이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간이역은 만남과 헤어짐이요 설렘이자 아픔이다
도미타에게 간이역은 헤어짐이요 아픔이었다
그가 경멸했던 것들과의 영원한 헤어짐.
영화는 도미타가 총에 맞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마침 이날은 일본이 이사건이 한일 양국간에 원만히 마무리됐음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이상이 이영화줄거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일본 자위대가 깊숙히 개입했다는 전제하에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에 가담한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자위대의 백% 깊숙한 개입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이영화가 일본에서 제작, 상영됐음을 감안하면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국민을 어떻게 취급할까요
‘조센징은 역시 바가야로. 말도 한마디 못하구나’ 하지 않을 까요
사족입니다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그늘에 살아가는 정보요원들의 터질듯한 고뇌를 잘 그려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 갈등하면서도 일부는 목숨을 걸고 대항했고, 일부는 살기 위해서 무조건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속에 악역을 맡아야 했던 한일 정보요원들의 아픔이 어렴풋이 나마 드러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실감나게 느꼈다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꼭 한번 KT를 보시기 바랍니다
=====================================================================
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관련 국정원 진상보고서는 자위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정 전문, 보고서등이 수록돼 있어 한번
살펴볼 가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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