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본인의 특사자격으로 귀국을 방문하게 되는 김종필 의원을 통하여 각하와 귀국 국민에게 정중한 인사와 평안을 비는 본인의 뜻을 전화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김종필특사는 동료 국회의원을 포함한 수명의 수행원을 동반하게 될 것입니다
김종필의원은 과거 국무총리와 민주공화당 의장직을 위시하여 정부와 기타기관의 여러가지 중요한 직책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여당총재의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는 매우 훌륭한 정치인입니다, 본인은 금번 그의 귀국 방문시 각하및 귀국정부의 주요지도자들과 함께 양국간의 공동관심사를 협의함으로써 우리 양국간에 전통적으로 지켜져 온 우의와 협력관계가 더욱 증진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대한민국과 귀국간의 관계가 서로의 이익에 합치되게 발전되어 온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정부지도자간의 빈번한 협의를 통하여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더 한층 강화되고, 보다 광범한 협력관계의 증진을 위하여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김종필특사로 하여금 각하와 더불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국제정세를 검토 평가하고 우리의 쌍무관계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귀국에 파견합니다
이 기회를 빌어 본인은 양국간의 우의증대를 위하여 각하와 함께 계속 협조해 나갈 것임을 다짐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각하의 훌륭한 영도하에 귀국국민이 보다 큰 번영과 복리를 위하여 계속 매진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967년 4월 22일 경향신문 1면에 실린 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 기호 6번 박정희의 대선광고입니다.
'보수보다는 진취를' 이라며 자신은 보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선거운동에 필요하다며 걸프사를 압박해 백만달러를 받았습니다. 그 4년뒤인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70년 걸프사에 천만달러를 요구해 3백만달러를 스위스 ubs 계좌로 받았습니다. 걸프사관계자는 의회증언을 통해 '한국에서는 선거때 돈이 참 많이 드는 모양이구나. 이상하다'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들이 당초 5·16쿠데타 하루 전날인 5월 15일 밤 10시에 6관구 참모장실에 모이기로 했지만, 쿠데타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몇 명만 나오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도 현장에 나오지 않았으며 서울호텔에서 쿠데타를 지휘했다고 말했다.
“5월 15일 10시에 6관구 참모장실에 모여라. 그게 박정희 장군의 혁명군 명령이에요. 우리가 움직일 제때에 우리 체포령이 내렸어요. 그러니 10시에 모이라고 하니까 그때 모인 사람은 내가 기억할 정도로 몇 사람밖에 안 나오고 나머지는 도망가고. 박정희 장군도 전화로만 ’지금 어딨어. 어떻게 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전화만 나한테 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있다가 ’거 지금 계신 데가 어디에요?” ’여기 서울 호텔이야’“
”그분(박 전 대통령)이 서울호텔에서 지휘했어요. 부대는 6관구에서 내가 지휘하고. (중략) 내가 (박 전 대통령에게) ’왜 안나왔느냐’고 그랬더니 ’아니 나 실패한 줄 알았어’ 그러더라고.“
김 전 부장은 4·19혁명이 나기 전부터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예행연습도 했다고 증언했다. 또 원래는 4·19 혁명일인 4월 19일에 쿠데타를 하려 했지만 5월 12일로 연기했으며 또다시 5월 16일로 한 차례 더 연기했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은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장면 총리가 몸을 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집권을 포기하고 도망간 사람을 위해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 쿠데타 성공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강원도지사였던 박영록 전 의원은 쿠데타 계획 소식을 듣고 장면 총리, 이한림 1군사령관과 연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증언했다.
또 2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긴급 개최해 민기식 1군단장과 함께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진압 작전을 결의했지만 쿠데타를 인정한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가 발표되면서 진압 작전이 결국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한중연 구술자료관은 명지대, 서울대, 한국외대, 한신대 구술자료 수집 연구단과 함께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2009년부터 ’현대 한국 구술사 연구 사업’을 벌여왔다.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등의 구술 자료를 5일 인터넷(http://mkoha.aks.ac.kr)을 통해 일반에 공개한다.
수집된 자료 중에는 5·16 쿠데타 직후 쿠데타 세력에 대한 진압 시도를 비롯해 공화당 창단자금과 4대 의혹사건, 1967년 신민당 통합 관련 공화당 사전 조직 활동,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75년 박정희와 김영삼의 영수회담, 외자도입법 제정 과정, 한국군 창설 과정, 민주화 운동 당시 종교인의 역할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한중연 구술자료관은 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난 63년 군정연장선언을 한뒤 케네디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자신의 군정 4년연장 선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박정희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3월 16일 516 혁명뒤 발표한 63년 민정이양계획을 백지화하고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이른바 '316 군정연장 선언'을 한뒤 사흘뒤인 3월 19일 케네디대통령에게 이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미국무부 공개자료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박의장은 이 친서를 작성한뒤 전달여부를 두고 고심을 한듯 실제로는 열흘뒤인 3월 29일 오후 6시 정일권 주미대사를 통해 케네디대통령에게 전달됐다고 미국무부 외교문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국내언론이 4월 8일 박의장이 케네디대통령에게 2차친서를 보냈다고 보도한 것으로 미뤄 박의장이 이에 앞서 한차례 더 친서를 보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친서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친애하는 케네디대통령각하'로 시작하는 박의장의 친서는 모두 13장분량으로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한 케네디의 노력에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밝힌뒤 최근 한국정세의 진전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습니다
박의장은 공산분자의 침투로 부터 한국을 구출하고 부패와 무능한 정치질서를 일소, 자유민주주의의 소지를 확립시키키 위해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1961년 8월 12일 밝힌 민정이양약속에 따라 1963년 1월부터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218성명, 227선서등은 민정이양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충정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의장은 그러나 정치활동허용뒤 정계혼란이 극심해지고 정치인들은 민심을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했다고 분석하고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것은 혁명당국으로서는 무책임한 처사라는 결론에 도달, 최대 4년간 군정을 연장하는 316성명을 발표했다고 말했습니다
박의장은 개인적 안일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민정이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서 한국사태에 있어 현지당국과는 다소 의견차이가 있는듯 하다고 밝혀 주한미국대사관이 군정연장에 반대하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박의장은 완전민정이양의 과도적 조치로서 4년간 군정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붙일 것이라며 케네디대통령이 316성명의 불가피성을 이해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기를 희구하여 마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박의장은 케네디대통령이 한국의 민주적 발전을 염원하는 만큼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민주적 성장을 희구하는 자신의 충성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는 말로 글을 맺었습니다
한자 한자 붓글씨로 정성들여 쓰여진 이 편지가 실제 박대통령의 필체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미에는 '서기1963년 3월 19일 대한민국대통령권한대행,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라고 쓰여져 있었으며 대통령도장과 박의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미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실제 이편지는 작성 열흘이 지난 3월 29일 오후 6시 정일권 주미대사가 케네디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으며 이자리에서 케네디대통령은 '미국민들이 한국의 장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 한국이 잘되기를 희망하는 만큼 민주주의 발전을 막는 정치적 불안정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케네디대통령은 버거대사가 미국의 견해를 대신한다며 군부와 민간지도자가 스무드한 민정이양을 위한 타임테이블에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일권 주미대사는 박정희 의장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군부지도자들이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으며 케네디대통령은 재차 민정이양에 따른 제반문제에 대한 한국적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에 앞서 3월 25일 미국무부는 군사정부와 야권지도자들의 타협을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군정연장 반대입장을 명확히 했고 박의장이 타협의사를 보이지 않자 4월 2일 케네디대통령이 민정이양을 촉구하는 친서를 전달하는등 강력한 반대입장을 거듭 밝혔습니다
결국 박의장은 4월 8일 군정 4년연장안을 철회하고 다시 케네데대통령에게 2차 친서를 보내 이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박정희, 케네디친서 전문
친애하는 케네디대통령각하
본인은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부터 세계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우방제국을 영도하시는 각하의 노력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발전과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으므로 이 기회에 최근 한국정세의 진전과 이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각하에게 알리고저 생각하는 바입니다
각하께서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516 군사혁명은 당시 불안정한 정국을 이용한 공산분자들의 침투로 부터 한국을 구출하고 부패와 무능한 정치질서를 일소하여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켜 자유민주주의의 소지를 확립시키려는 목적으로 애국적인 군인에 의하여 취하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혁명정부는 과감한 시책으로 온갖 성의와 노력을 다하여 이와 같은 혁명과업을 완수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 발전할 민정의 터전을 확립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여 왔던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 안정의 기초가 될 경제적 안정달성을 위하여 의욕적인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진 우방의 협력을 얻어 착착 성과를 거두어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정하에 본인은 1963년까지에는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에 1961년 8월 12일에 민정이양에 관한 약속을 하게 되었고 동년 11월 귀국방문시에도 각하에게 그러한 의향을 전한 바 있었으며 이와같은 민정이양계획에 따라 금년 1월부터는 정치활동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지난 218성명이나 227선서는 모든 격동하는 정치정세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민정의 터전을 확립하기 위한 정부충정의 표현이었으며 또 평화적 민정탄생을 위한 정치적 체질개선에 최선의 인위적 노력을 다하겠다는 열망의 표현이었었음은 두말할 나위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활동이 허용된 후에 지난 수개월 동안의 추이는 결코 전도의 희망을 주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인의 추잡한 파쟁등 정계의 혼란은 극심하였고 이에 편승한 일부 극열분자들의 반국가적 음모등은 민심을 다시 없는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질서하고도 불안한 분위기속에서 정치적 안정에 대한 하등의 보장없이 구태의연한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국가적 안정을 위하여 위험한 일이며 또한 혁명당국으로서도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현 한국사태에 대하여 현지당국과는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는 듯 하나 본인의 개인적 안일을 위하여서는 지금 이순간이라도 민정이양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현재 정치적 안정과 국가의 장래에 직접적이고도 제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본인으로서 316 성명은 좌시할 수 없는 너무나도 절박한 사태에서 기인되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완전하고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정부수립의 소지를 확립시키는 것이 혁명정부의 이념이며 또한 혁명정부가 실천하여야만할 책임인 줄믿고 있는 까닭에 완전민정이양의 과도적 조치로서 최대 4년간 군정기간의 연장에 대하여 그 가부를 국민투표에 부하여 국민의 의사를 묻기로 결정한 것이며 316성명은 이러한 결심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본인은 이와 같은 조처가 어디까지나 민의를 존중하여 군사혁명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과도적 조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각하께서도 전술한 대한민국의 실정을 참작하시어 본인의 316성명을 하게된 불가피성을 깊이 이해하시고 전폭적인 지지를 하여 주시기를 희구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이에 있어 본인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의 대한민국의 건전한 민주적 발전을 각하께서 염원하시고 계심을 확신함으로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민주적 성장을 희구하는 본인의 충성 또한 각하께서 충분히 이해하여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본인은 이 기회에 각하에게 거듭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서기 1963년 3월 19일
대한민국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516 혁명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방미할 당시, 미 행정부는 케네디대통령에 대한 박정희의장 브리핑자료에서 박의장이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의 누나와 결혼했다고 잘못된 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61년 11월 박정희의장의 방미와 관련, 미 행정부가 케네디대통령에게 사전보고한 브리핑북에 따르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의 누나와 결혼해 아들 1명과 딸 2명등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브리핑북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유양수 최고회의내 외교분과위원장[CIA-P-146666]등에 대한 인물정보를 담고 있으며 박의장에 대한 자료는 CIA 인물자료에 있는 사진등을 포함해 모두 3장으로 돼 있습니다
박의장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박의장의 CIA 인물정보 등록번호는 142532[CIA-P-142532] 였으며 한국 육군의 장군으로 돼 있었습니다
미 행정부는 1917년생인 박의장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육사에 진학한뒤 가나가와의 일본육사로 전학해 1944년 졸업한뒤 1년남짓 일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해방뒤 한국으로 돌아와 1946년 12월 육사 2기로 졸업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박의장은 남노당 당원으로서 1946년 대구폭동당시 경찰에 의해 처형당한 그의 형[박상희, 김종필의 장인]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로 기울었으며 1948년 여순반란사건직후 공산주의자임이 발각돼 군법행위에 회부됐으나 명석한 청년장교라는 점이 그의 구명에 도움이 됐다고 기록했습니다
박의장은 한국군내 약 3백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제공함으로써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현재 주미대사인 정일권과 주프랑스대사인 백선엽의 도움으로 10년형으로 감형된뒤 한국전 발발로 사면됐으며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적 행적을 보인 적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박의장은 한국전당시 뛰어난 업적을 세웠고 그뒤 성실하고 정직하고 쳥렴한 이미지로 존경을 받았으며 1960년 315부정선거와 부정선거에 군이 개입된 데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1960년 쿠데타계획을 세웠으나 419 학생운동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면서 쿠데타 계획이 연기됐다는 것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설명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뒤 장면정부가 수립됐지만 박정희와 추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1961년 쿠데타계획을 세우고 사전에 일부 정보가 누설됐음에도 불구하고 쿠테타를 성공시켰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군당국은 1956년 박의장을 책임감있고 지적있고 과감하고 리더십있는 장교로 평가했으며 1961년 당시 주한미대사관도 그가 능력있는 지도자로서 한국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2페이지에서 미 행정부는 박의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누나와 결혼해 아들 1명, 딸 2명등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군인월급으로 살다 보니 매우 곤궁한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이 브리핑자료대로라면 박의장은 김종필 부장의 매부이지만 실제로 김종필은 박정희 의장의 형인 박상희씨의 딸 영옥씨와 결혼한 박의장의 조카사위입니다
또 박의장은 적당한 정도의 음주와 흡연을 즐기지만 최근 몇달간은 음주량이 늘었으며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하고 요즘 매일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박근혜한나라당 전 대표가 올 초 자신의 미니홈피에 수십 개의 비방글이 올라오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는데, 비방글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표 동생 근령(55·전 육영재단 이사장)씨의 남편인 신동욱(41·전 백석문화대 교수)씨인 것으로 조사됐다.
26일 검찰 등에 따르면, 지난 2~5월 사이 박 전 대표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박근령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해임되는 데 박 전 대표가 배후역할을 했다는 취지의 글이 수십 개 올라왔다.
'박근혜의 묵인하에 박지만(박 전 대표 남동생)이 주도해 육영재단을 강탈했다' '박지만의 측근이 중국에서 신동욱을 납치하려 했는데 박근혜 전 대표가 사과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박 전 대표측은 "계속 글을 올리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대응했지만 비방글은 중단되지 않았고, 결국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네티즌 10여명을 지난 5월 서울중앙지검에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이 사건을 서초경찰서에 내려 보내 수사를 지휘한 결과 비방글의 대부분은 신동욱씨가 타인의 명의를 빌려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최근 신동욱씨 등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비방글을 직접 작성한 신동욱씨를 포함한 4명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신동욱씨를 조만간 소환조사한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한편, 박 전 대표 동생 근령씨는 1990년부터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아 운영해오다, 2001년 편법 운영과 불법 해임 등이 문제가 돼 성동교육청에 의해 이사장 취임 승인이 취소됐다.
근령씨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지난 5월 대법원은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결해 이사장직을 잃었다. 육영재단은 1969년 4월 고(故)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 등을 위해 세웠다.
박근혜한나라당 전 대표가 올 초 자신의 미니홈피에 수십 개의 비방글이 올라오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는데, 비방글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표 동생 근령(55·전 육영재단 이사장)씨의 남편인 신동욱(41·전 백석문화대 교수)씨인 것으로 조사됐다.
26일 검찰 등에 따르면, 지난 2~5월 사이 박 전 대표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박근령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해임되는 데 박 전 대표가 배후역할을 했다는 취지의 글이 수십 개 올라왔다.
'박근혜의 묵인하에 박지만(박 전 대표 남동생)이 주도해 육영재단을 강탈했다' '박지만의 측근이 중국에서 신동욱을 납치하려 했는데 박근혜 전 대표가 사과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박 전 대표측은 "계속 글을 올리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대응했지만 비방글은 중단되지 않았고, 결국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네티즌 10여명을 지난 5월 서울중앙지검에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이 사건을 서초경찰서에 내려 보내 수사를 지휘한 결과 비방글의 대부분은 신동욱씨가 타인의 명의를 빌려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최근 신동욱씨 등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비방글을 직접 작성한 신동욱씨를 포함한 4명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신동욱씨를 조만간 소환조사한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한편, 박 전 대표 동생 근령씨는 1990년부터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아 운영해오다, 2001년 편법 운영과 불법 해임 등이 문제가 돼 성동교육청에 의해 이사장 취임 승인이 취소됐다.
근령씨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지난 5월 대법원은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결해 이사장직을 잃었다. 육영재단은 1969년 4월 고(故)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 등을 위해 세웠다.
김형욱의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고 김형욱의 큰 며느리가 2003년 7월 3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하자 외동딸등 가족들도 2003년 9월 진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쟁점은 '장남 정한이 죽기 전까지 유언장 존재사실을 몰라서 상속을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송이 진행되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며느리의 주장에 맞서
외동딸 신해는 2003년 9월 12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주된 내용은 '큰 오빠가 유언장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재산분배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피고인 어머니 김영순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딸 진술 -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9년 아버지 김형욱이 실종된 당시 나는 19살의 틴에이저로서 큰 충격을 받았다
-오빠들과 엄마등 우리가족은 매우 친밀했지만 실종사건이 더욱 우리를 결속시켰다
-실종당시인 1979년 큰 오빠는 미혼이었고 1980년 결혼했다
-당시 우리가족변호사인 알란 싱거변호사가 끊임없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싱거 변호사가 큰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했다
-아버지 김형욱도 1975년 유언장 작성뒤 내용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뒤 저녁식사자리에서도
유언장내용을 언급했다, 당시 나는 14살 이었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유언장내용은 아버지의 재산 50%는 어머니가, 나머지 50%는 우리 3남매가 가진다는 것이었다
-실종뒤 싱거변호사등으로 부터 유언장 복사본을 받았다
-실종뒤 사망판결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재판부가 전가족이 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해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법원에 갔다
-한국내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받기위한 소송을 통해 큰 오빠의 부인은 2003년 4월 26만1천여달러를 받았다
-내 일생동안 단 한번도 큰 오빠가 재산분배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81년 5월 12일부터 유언장 집행자가 돼
김형욱 재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21년이 지난 2002년 9월 장남 김정한이 죽게 되자
큰 며느리등 장남 가족과 김영순 사이에 재산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형욱의 큰 며느리는 남편이 생전에 유언장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며
이는 시어머니 김영순씨가 유언장 집행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고 2003년부터 뉴저지 버겐카운티 지방법원에서
원고 며느리 피고 김영순씨의 법정공방이 시작됩니다
2003년 7월 3일 원고인 큰 며느리는 재판부에 자신의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며느리 진술 5매 -
이 진술서에서 큰 며느리는
- 시어머니 김영순이 유언장 집행자로서 유언장에 기록된 상속인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 시어머니 김영순은 직장을 다닌 적이 없고 소득소스가 전혀 없다
- 김형욱은 한국의 중정부장으로서 197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1978년 6월 30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김형욱이 7만5천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적발됐다고 보도했다
- 이 기사는 김형욱이 시티뱅크 뉴욕에 2천만달러, 해외은행에 6백만달러등을 예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형욱 본인은 3백50만달러만 인정했지만
- 시어머니 김영순은 1983년부터 알파인 저택 신축을 시작했고 가치는 1천만달러에 이른다
- 시어머니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받았다
- 한예로 뉴저지 테너플라이 P모 은행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방문해 세이프티박스에 10만달러를 넣어두었으나
그뒤 남편이 확인했을때는 5만달러밖에 없었다
- 스위스 은행에 막대한 자금이 예치돼 있다
- 알파인저택은 김형욱 재산으로 건축된 것이다
- 남편과 김정우 김신해등 3자녀가 동일하게 김형욱 재산에 대해 16.65%를 가질 권리가 있다
는 등의 진술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형욱의 2남 김정우와 외동딸 김신해는 2003년 9월 12일 며느리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는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게 됩니다
이 주택의 주소는 PO BOX 295, TAMARACK ROAD, ALPINE, NJ 로
알파인 다른 주택들처럼 번지 없이 사서함 번호로 표시됩니다
지적도상으로는 알파인 블록 22 랏 25입니다
대지가 2에이커, 약 2천4백여평인 이 주택의 가격은 3년전인 2006년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가
고시한 공시가격만 3백78만천9백달러 입니다
공시가격이 시세에 한참 못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현시세가 최소 6백만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부동산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이후락 사위 알파인 주택
또 이들부부는 MMGK LLC 라는 법인을 설립해 지난 2007년 4월 13일
뉴저지주 에지워터의 땅을 구입합니다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MMGK LLC의 주소는 바로 이들부부의 알파인 집 주소입니다
이땅의 매입가격은 무려 6백90만달러 였으며 양도세만 8만9백여달러에 달했습니다
이후락 사위 엣지워러 2007
그이전인 1987년 이들 부부는 MONDA ASSOCIATES 라는 법인을 설립해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을 매입합니다
이 빌딩의주소는 172 MADISON AVE, NEW YORK, NY 으로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입 1987
이 빌딩을 팔때 위임장서류를 통해 MONDA ASSOCIATE의 주인이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 정화섭-정명신[이명신] 임이 드러났으며, 매도서류에도 정화섭이라는 이름과 서명이 있으며
2002년 4월 2일 매도시 가격은 8백97만5천달러 였습니다
이 빌딩은 2007년 다시 다른 주인에게 팔리는데 그때 가격이
천5백90만달러였으므로 현시가가 천 7백만달러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씨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자에 재직할때 사위인 정화섭을 1972년12월
국제문제 담당 국장으로 임명했다 박정희의 질책을 받고 물러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정유회사인 G사가 1969년 8월 21일 스위스 유니언은행 서정귀씨[이후락 사돈] 명의로
2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송금하자 유니언은행은 이돈의 입금사실이 기재된 구좌명세서를
1969년 9월 2일 이후락의 사위인 정화섭에게 발송함으로써
이후락씨 사위인 정씨가 이후락씨의 부정축재 자금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30년전인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덮기 위해 부정축재자 조사에 나서
1980년 6월 19일 권력형 부정축재자 10명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부정축재액은 김종필이 2백16억원, 이후락은 백94억원, 이세호 백 11억원등이었습니다
이후락과 관련해 1977년 로스앤젤레스에 빌딩을 매입했다는 소문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이부분은 고위관리를 헐뜯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대충 이러한 부분과 함께 부정축재 내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LA의 빌딩 매입소문을 듣고 확인을 진행중이지만
아직은 사위나 며느리 이름의 빌딩 매입 계약서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3505 ACROVISTA B DONG SEOCHO DONG SEOCHO-GU SEOUL CIT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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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YOO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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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노태우씨의 아들과 박정희 전대통령의 손녀부부등이 이 콘도를 매입했고 S그룹에서 분리된 모그룹 패밀리 2명이 2채를 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등 정재계 인사들이 일부 입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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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6 으로 잘 알려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한지 30년이 됐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을 전후한 국무부와 CIA 전문. 즉 국무부의 비밀훈령, 주한 미대사관의 보고, CIA 본부와 한국지부간의 문서등을 한번 정리하고 분석해 보려 했지만 시간관계상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돼 극히 짧은 기간 10월 19일경부터 11월2일 정도까지의 전문들만 올려봅니다
글라이스틴대사가 11월 2일께 국무부로 보고한 '미국이 저지하지 않으면 한국은 군사정권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라는 전문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또 박정희 사망, 박정희 암살등으로 사건을 표현했지만 '제거' 즉 'REMOVAL OF PRESIDENT PARK'라는 표현도 사용한 대목에서 박정희 전대통령 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과도정부를 책임질 대통령대행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정일권 전총리도 물망에 오른다는 내용도 있네요
1026 전부터, 특히 약 1주일전부터 주한 미대사관 특히 글라이스틴대사의 행보가 빨라지며 박준규 공화당 당의장, 태완선 유정회회장, 이철승, 고흥문, 김영삼등을 빈번히 만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약간 '고집불통'으로 본 듯한 내용도 있고 한 야당정치인은 한국을 움직이는 4대 파워로
학생, 국민, 정치인 그리고 미국을 꼽았군요
전문을 원본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에서 올렸습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1026을 거쳐 1212 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역사의 분수령, 승자의 기록을 전할 사람들은 아직 많이 생존해 있지만
패자의 진실을 남길 사람들은 이미 너무도 많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1212 당일밤 전두환등 신군부가 최규하 전대통령을 압박해 정승화 총장 연행에 재가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재가 현장에 배석했던 사람은 전두환쪽을 제외하고는
최광수 당시 비서실장이 유일합니다
사실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한 궁정동 안가도 최광수 비서실장의 처가쪽 집이었으나 어쩔수 없이 중앙정보부에
매도한 집입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의 용기있는 증언을 기대해 봅니다
30년전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망명이전부터 미국에 주택을 구입한 것은 물론 대형쇼핑센터를 매입하는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6년여를 중정부장에 재직하다 1969년 10월 해임된뒤 국회의원등을 지내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1973년 3월 유정회 명단에서도 제외되자 박정희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판단해 1973년 4월 15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73년 1월 5일 시무식의 어수선한 틈을 타 일본인명의의 위조여권으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김형욱은 수차례의 간청끝에 간신히 해외여행 승낙을 받아 4월 15일 대만으로 출국, 중간에 미국행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경유지인 일본공항에서 중앙정보부요원들과 예상치 못한 조우를 하는등 우여곡절끝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7년 10월 발간한 김형욱 실종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김형욱의 미국 망명 결심시점을 1973년 3월, 빠르게 잡더라도 1972년 10월 유신선포에 따른 국회해산 이후로 미뤄 짐작하고 있습니다
1973년 3월 김종필이 총리로 기용되면서 행동에 제약을 받자 탈출을 구상하게 되고 이때부터 사채를 회수하고 외화를 환전하고 외화밀반출을 했다는 것이 1973년 3월설이요, 1972년 10월 17일 해외국정감사도중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자 그때부터 영어회화공부에 매달렸다는 것이 1972년 10월 결심설입니다
1971년 1월 4일 김영순명의 뉴저지 테너플라이 주택 매입
16만5천달러짜리 주택 – 당시 1인당 이민자 외화허용환도가 백달러
그러나 김형욱 일가가 부동산등을 구입하며 미국정부에 제출한 계약서등을 중심으로 행적을 추적한 결과 최소한 1971년이전부터 치밀한 미국 망명을 추진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계약서 사진 참조]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확인한 결과 김형욱은 자신의 부인 신영순[미국 서류에서는 신영순과 김영순 표기가 혼재]의 명의로 1971년 이미 호화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신영순 명의로 주택을 구입한 것은 1971년 1월 4일이며 주택소재지는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트라팔가로드 60번지, 대지가 1.3에이커로 1,591평 규모에 건평이 81평, 매입가는 16만5천달러였습니다.
당시 미국에 이민가는 사람에게 반출이 허용된 이민정착금이 1인당 1백달러였으니 16만5천달러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큰 돈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부동산업에 종사한 한 재미동포는 ‘1971년보다 10년지난 1980년대초까지도 한인이민자들이 구입한 집들이 3-4만달러였다며 1971년 16만5천달러라면 호화주택’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지역은 뉴욕에 주재하는 한국외교관이나 지상사 주재원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공교롭게도 지난 2007년 3월 한국정부가 3백만달러를 주고 구입, 현재 모 공사가 살고 있는 집도 바로 김형욱이 1971년 구입한 주택과 이웃해 있습니다 [한국정부 2007년 3월 3백만달러 주택구입 계약서등은 이미 이 블로그에 공개돼 있습니다]
내일은 김형욱이 망명이전에 설립한 법인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글 싣는 순서는 - 김형욱 부인명의 법인 설립 - 법인명의로 망명 1년6개월전 대형쇼핑센터 매입
- 김형욱 79년 8월 파리방문직후 현 알파인 주택부지 매입 - 김형욱 실종 50일뒤 김형욱부인 나대지 7필지 구입 등의 순입니다
지난 30년전 1979년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미국 뉴저지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지난 5월 초순 그의 묘를 발견했습니다
516 혁명이후 박정희 정권의 지킴이 역할을 하다 중정부장자리에서 밀려나자 미국으로 망명, 미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권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렸던 김형욱.
박정권과 첨예한 갈등을 빚다 지난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30년만에 결국 공동묘지의 한켠에 누워 있는 그를 찾았습니다
이 공동묘지는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등 그의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뉴저지 알파인집에서 약 2.5마일 거리에 있었습니다
묘비에는 KIM 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IN LOVING MEMORY' 란 단어아래 왼쪽에는 김형욱을 의미하는 'HYUNG W' 오른쪽에는 그의 부인 신영순을 의미하는 'YOUNG S SHIN'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김형욱의 이름아래 그의 생일인 음력 1925년 1월 16일을 의미하는 '음 JAN 25 1925' 란 글이 눈에 띄고 아래에는 그의 실종일로 기억되는 1979년 10월 7일 'OCT 7 1979'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인 신영순은 아직 생존해 있어 출생일자만 적혀 있었습니다
한때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대한민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며 그후로도 오랬동안 '기구한 실종'으로 인구에 회자됐던 김형욱, 그의 묘비에는 'IN LOVING MEMORY' 라는 짧은 3단어가 전부였습니다
김형욱의 옆에는 그의 큰 아들 정한이 함께 묻혔습니다 10대 초반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갔다 발목지뢰를 밟아 발목을 다쳤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던 김정한은 그의 아버지 김형욱 실종이후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다 2002년 9월 세상을 등졌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를 찾아서 물어봤었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는 가족등 이해관계인이 아닌 이상 아무 것도 답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과연 이 무덤속에 김형욱 시신의 일부라도 묻혀 있는지, 아니면 가족들이 그의 추모를 위해서 가묘를 만들었는지는 가족만이 알고 있습니다
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역임했던 방준모 전 실장에게 전화했었습니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방전실장은 너무 놀라 말문을 잊지 못하면서 '그곳이 어디냐, 잘잘못을 떠나서 동기생으로, 또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로서 그의 무덤앞에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리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너무나 많습니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간헐적으로 미국정부 여러문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미국망명을 준비했는지등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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