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열 달밖에 안 된 딸과 남편을 두고 독일로 갔습니다. 3년 뒤 돌아와 보니 우유가 없어 쌀뜨물을 먹은 딸이 얼마나 작던지."
파독 간호사 출신 황보수자(71)씨는 24세이던 1966년 독일로 건너가 3년을 일하고 귀국했다. "남편은 성실했지만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내가 나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원본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09/2013010900095.html?news_Head1
간호사가 되기 전 황보씨는 서강대 물리학과에 진학해 1년을 수학한 신(新)여성이었다. 2학년이 되던 해 당시 약 6000원 하던 1학기 수업료 중 2000원을 내지 못해 학업을 중단했다. 대학 다니는 오빠 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황보씨의 막내 오빠는 우리나라 상업용 위성 1호인 무궁화위성을 쏘아 올리며 '미스터 무궁화 위성'으로 불리는 황보한(75) 박사다.
황보씨는 독일 베스트팔렌주 보훔시에 있는 주립 소아과병원에 같이 온 한국인 간호사 5명과 함께 배치됐다. 가난 때문에 택한 독일행이었고 생이별이었지만 황보씨는 "선진국인 독일을 경험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내 힘으로 돌파하겠다는 다짐으로 떠났다"고 했다. 동생 같던 파독 간호사들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간호사니 우리가 잘하자"며 서로를 북돋았다.
황보씨는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먹이고 아기들을 목욕시켰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봤고 간호사들은 자매처럼 서로를 챙겼다.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은 상냥하고 성실하고 친절하다"는 독일인들의 평가가 자연스레 뒤따랐다. 황보씨도 '프로인틀리히(친절한) 수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일인들은 한국 이름인 '수자'를 발음하기 쉬운 '수잔'으로 바꿔 불렀다.
- 황보수자씨가 47년 전 파독 간호사로 근무했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독일 베스트팔렌주 보훔시 주립 소아과병원에 근무한 지 1년이 된 1967년 어린이 병동에서 입원 중인 독일 어린이를 돌보는 모습. 사진 오른쪽이 황보씨다. /이태경 기자·황보수자 교수 제공
독일에서 3년을 마치고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곧바로 동대문에 있던 이대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직장을 구한 남편과 함께 슬하의 세 자녀를 길러냈다.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39세 나이로 서강대에 과거 내지 못한 학비 2000원을 내고 재입학했다. 학교 측은 17년 전 못 낸 학비만 내고 재입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이후 서울대·연세대에서 간호학 공부를 계속했고 인제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황보씨는 "파독 간호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고생'이란 단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했다. "내 젊은 영혼엔 '놀라운 행운'이었습니다. 덕분에 가족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날 위해 갔지만 국가에도 좋은 일이 됐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