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고위공직자 관련서류'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11.01.02 이후락 해외도피 전말: 실각당일 여권만들고 미대사관에 비자신청 - 미 국무부 비밀전문[4]
  2. 2010.07.06 이만섭, 목숨걸고 이후락-김형욱 찍어내다 : 회고록 원문 직접 보기
  3. 2009.12.16 곽영욱 횡령자금 하와이까지 흘러들었다 - 횡령입증되면 환수가능할듯 (1)
  4. 2009.11.27 친일인사 1005명 전체명단 - 언론사 사주,대학총장등 포함 (1)
  5. 2009.11.23 '이후락, CIA 스파이로 박정희 감시했다' - 펌
  6. 2009.11.19 이후락 장남 부부, 법인 다수 설립 부동산 매매
  7. 2009.11.16 이후락 장남 부부도 부동산 다수 매입 -재산환수직후 매입 급증
  8. 2009.11.15 이후락 외동딸 부부, 맨해튼-엣지워터-플러싱도 매입
  9. 2009.11.12 이후락 외동딸 부부, 86년 2건 매입, 2건 매도
  10. 2009.11.11 이후락 외동딸 부부 : 사위 정화섭, 장남 이동진과 백60만달러 부동산 매입 (3)
  11. 2009.11.11 김창준 전 의원, '한보철강 로비' 의회조사보고서 원문 [한보 로비전모 포함]
  12. 2009.11.08 이후락 외동딸 부부 - 1981년 2건 148만달러 매입
  13. 2009.11.08 이후락 외동딸 부부 - 1980년에만 부동산 4건 매입
  14. 2009.11.05 이후락 외동딸 부부, 75년 첫 구입 - 부정축재 환수당한 80년부터 급증
  15. 2009.11.03 이후락 사망 - 장남부부도 미국 부동산 다수
  16. 2009.11.01 이후락 사위명의 부동산관련서류 버겐카운티만 백3건
  17. 2009.11.01 이후락 장남 이동진-서옥로 부부도 1980년 하와이 콘도 매입
  18. 2009.10.31 이후락 사망- 직계가족 미국부동산 '상상초월' 최소 3천만달러 상회 (12)
  19. 2009.10.02 월요일 오전 고위공직자 인척관련 자료를 공개하겠습니다 (1)
  20. 2009.09.27 이정일 전 국회의원도 1989년 뉴저지 주택 매입-매도
  21. 2009.09.26 김병국 해명서 '미국시민권 1987년 포기 - 미국 부동산 매매는 인정' 모 일간지 기자가 보내주셨습니다
  22. 2009.09.24 '김병국 사망땐 김상기씨부부가 주인' - 신탁증서 발견 (2)
  23. 2009.09.21 이후락 자녀 축재 문명자회고록
  24. 2009.09.21 이후락 금고지기 실종
  25. 2009.09.15 친일파도 빠질수 없다, 친일파도 미국 부동산 쇼핑 가세 (22)
  26. 2009.09.15 靑 "김병국 전 수석, 20년 전 미국시민권 포기" (33)
  27. 2009.09.13 MB, 미국인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켰나? [김병국수석 미국국적 의혹] (81)
  28. 2009.09.13 이후락 비자금 내막 - 비자금 조성 방법 (3)
  29. 2009.09.12 고위공직자 병역확인 바로 여기 http://www.mma.go.kr/kor/s_news/release/release03/index.html
  30. 2009.09.12 장차관 - 국회의원 병역 면제 수두룩 [펌]
Loading

이후락 실각당일 미국비자신청 안치용

이후락 미국비자신청 긴급보고전문 [1973 SEOUL 8086]

북, 73년 파리등서 JP에 두차례 비밀접촉시도 - 미국무부 비밀전문[3] http://andocu.tistory.com/3345

'DJ납치가담 유영복은 이후락 조카사위' - 미국무부 비밀전문[2] http://andocu.tistory.com/3343

박정희는 김종필을 불신했다?-73년 신장치료차 일본행요청 불허 : 미국무부 비밀전문[1] http://andocu.tistory.com/3341

김성환장관, '북 붕괴하면 임시자치정부 허용' 시사 :위키리크스 한국전문 http://andocu.tistory.com/3351

현정은, '북보다 남이 더 큰 장애'불평-김정일은 중국 불신:위키리크스한국전문 http://andocu.tistory.com/3359


================================================================================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면서 일단 해외로 출국한뒤 미국비자를 신청했다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각당일
여권을 만든뒤 같은 날 주한미국대사관에 미국비자를 신청했고 미대사관은 즉각 비자를 발급해주려 했던 사실이 미 국무부
비밀전문에서 드러났습니다 
 
73년 3월 윤필용사건[표면적으로는 4월말 알려짐]으로 타격을 입은데 이어 73년 8월김대중납치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정타를 입은 이후락은 73년 12월 3일 마침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락은 권부핵심에서 밀려났다가도 몇개월뒤 다시 복귀하는등 오뚝이로 불릴 만큼 관운이 강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으며 미국무부 비밀전문에서도 드러나듯 북한도 한때 이후락을 독자적 세력을 가진 2인자로 평가했었습니다 

윤필용사건, 김대중납치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음에도 가시방석같은 중정부장의 자리를 이어가던 이후락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박정희 내각의 대대적인 개각과 함께 중정부장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생사의 갈림길에 섰음을 직감하고 살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1973년 12월 3일 개각당일 개각명단[1973 SEOUL 8080]등을 미국무부에 보고한뒤 또 다른 별도의 전문을 통해 '전직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여행' 이란 제목으로 이후락의 비자문제를 국부부에 극비리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후락의 36계 줄행랑은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았습니다

1973 SEOUL 8086 CONFIDENTIAL 전문에 따르면 이후락은 개각당일인 12월 3일 이후락 자신과 부인인 정윤희의 여권을 만든 것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이후락 부부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제출한 여권은 12월 3일 발급된 4년만기의 일반여권이었습니다

이후락은 여권을 발급받자마자 12월 3일 당일 주한미국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했으며 미국여행 목적은 '회의' MEETING 이라고 기재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후락의 미국비자신청사실을 증대사안으로 판단, IMMEDIATELY, 즉 긴급이라고 명시해 보고했습니다 

특히 주한미국대사관은 전문 두번째 항에서 국무부가 반대하지 않는한 한국시간으로 12월 4일[비자신청 이튿날] 오전중에 
비자를 발급할 계획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또 이후락은 일본쪽에도 SOS를 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비밀전문 세번째 항에서 일본대사관에서 전화연락이 와 '그들이 [비자]신청을 받았으며 일본 본부에서 지침이 있을때까지
연기하고 있다' 고 통보했음이 확인됐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해외도피는 미국과 일본등에도 중대사안이 아닐 수 없었으며
특히 미국과 일본이 이후락의 해외도피와 관련,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긴밀히 협조한 것은 놀라운 일로 생각됩니다 

이 긴급전문대로라면 이후락은 자신이 살 길은 미국으로 도망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난 날
곧바로 미국대사관에 찾아가 SOS, 살려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이 전문 두번재 항목에서 언급한대로 비자신청 다음날인 12월 4일 오전중 미국대사관이 이후락 부부에게 미국비자를
발급해 줬다면 이후락은 그날로 미국으로 줄행랑을 쳤고 이미 미국으로 도망간 김형욱과 함께 2명의 전직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에서 박정희 정권과 한국에 대해 쌍나팔을 불어댓을지도 모릅니다 

이후락 김형욱이 사이가 나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김형욱의 맏며느리에게서 직접 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과 이후락의 외동딸 이명희가 이때 이미 미국에 유학하고 있었으며 두사람이 '정한아' '명희야' 하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주한미국대사관의 긴급 비밀전문에 대해 미국무부 본부는 뭐라고 답했을까요
어마어마한 거물이 이 전문에 대해 직접 답신을 하며 지침을 내리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전문의 지침이 향후 이후락의 실제 36계 줄행랑 행보와도 일치해 사실상 이후락이 이 전문대로 움직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마어마한 거물의 답신, '후락이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전문은 내일 알아보겠습니다 

이후락실각등 19731203 개각내용보고 [1973 SEOUL 8080]

이후락 실각관련 비밀전문 안치용



    

Loading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지난 1989년 펴낸 책 '증언대 청와대 담판과 나의 직언'의 일부입니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1969년 이른바 공화당 영빈관 의원총회에서 목숨을 걸고 이후락-김형욱 
사퇴를 주장했었습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군사정권아래에서 대통령의 수족을 끊어라는 요구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입밖에도
낼 수 없는 발언 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책중 영빈관 의원총회부분 10여페이지를 책 그대로 올립니다 
 

Loading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5만달러를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검은 돈이 미국 하와이까지 흘러든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조현상 효성 전무가 구입한 또 다른 하와이 콘도인
THE KAHALA BEACH 를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매입자금이 대한통운 횡령자금의 일부인 것으로 확인되면
가압류등의 절차를 거쳐 환수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부인 김봉선씨와 함께
지난 2006년 11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 4999 KAHALA AVE
THE KAHALA BEACH 342 호를 34만달러에 매입했습니다

계약서는 같은해 11월 3일 호놀룰루 카운티 등기소에 접수됐으며
매매가격의 0.1%인 340달러를 양도세로 납부했습니다

2006-201500 KWAK YOUNG W
곽영욱이 회사자금 횡령으로 대한통운 회사와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쳤으므로 회사나 주주들이 나선다면
이 콘도를 압류하고 매각을 통해 적은 돈이나마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 콘도의 가격이 부지반환시점과 맞물려 계속 하락하고 있어
얼마나 환수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이에 앞서 조현상 효성 전무도 지난해 매입한 워터마크 콘도외에
지난 2002년 42만달러를 주고 이 콘도 327호를 매입했었습니다

이 콘도는 땅문제때문에 계약서가 리스형태로 작성되지만 매매였습니다
")//]]>
사연은 이랬습니다
일본인 투자가가 1966년 이 콘도를 지었으나 땅 주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모 사학재단이 땅 주인이었고 부지이용기간이 2027년 7월까지로
현재로서는 2027년 즉 지금부터 18년 뒤에는 콘도를 비워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콘도가 시중가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가격에 매매되는 것입니다

하와이 언론에서는 이 콘도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 매력인 반면
위험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부동산업체에서도 하와이 주민보다는 본토에서 오는 매입자가 많으며
투자용보다는 별장용도로 매입하므로 본토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Loading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현황 -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담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발간

  
 □ 개   요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 위원장 성대경)는 2005년 5월 31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에 따라 구성되어 4년 6개월의 활동을 종료하면서 4부, 25권, 총 2만 1천여 쪽에 달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 특별법은 광복 직후 반민특위 활동이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이 묻히고 민족의 정통성이 확립되지 못한 현실을 배경으로 민족정통성을 확립하고 사회정의의 구현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반민규명위는 출범 이래 특별법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번에 발간된 보고서는 <2006년 조사보고서>에 공개된 106명과 <2007년도 조사보고서>에 공개된 195명을 포함하여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내용을 담았다. 1부에는 반민규명위의 사업 및 일반 활동, 그리고 위원회에서 수집한 자료목록을 부록으로 실었다. 2부에는 조사후보대상자 설정기준과 조사대상자 선정심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내용, 그리고 이의신청에 대한 심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3부에는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범주에 대한 기초조사와 연구를, 4부에는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를 담았다.


 ○ 성대경 위원장은 위원회 활동을 종료하면서, “우리 민족은 격동의 20세기를 겪고, 희망찬 21세기로 나아가고 있는데, 지금 필요한 것은 지난 100년간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며, “위원회가 이룩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성과가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제국주의 침략의 잔재를 청산하고 식민지배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반민규명위의 조사·심의 과정

○ 반민규명위의 조사는 객관성, 공정성, 실증성의 원칙 아래 시기별, 분야별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반민규명위는 국회가 선출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포함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11인의 위원(위원장 포함)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의사결정은 재적위원 과반수를 의결정족수로 하여 엄격한 의결절차를 두었다. 또 각 계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자문위원회를 두었다.


○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조사와 심의는 무엇보다 당대 1차 자료와 엄격한 법적용을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조사는 기초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 전문가 자문회의 등을 개최하여 학계의 연구성과를 수렴하고자 하였으며, 미개척 분야에 대하여는 연구 용역을 발주하여 그 성과를 적극 반영하여 이루어졌다. 또 조사대상자의 선정과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대해 이해관계인의 자료열람 청구, 이의신청 및 의견진술의 기회를 제공하여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 반민규명위의 조사 결과 

   ○ 반민규명위의 조사는 대상시기를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와 친일반민족행위 유형의 특징을 감안하여 이를 크게 3시기(러일전쟁 개전~1919년 3·1운동까지를 1기, 1919년 3·1운동~1937년 중일전쟁 개전까지를 2기, 1937년 중일전쟁~1945년 8월 15일까지를 3기)로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조사하였다.


  ○ 반민규명위의 조사는 이러한 시기별 조사와 함께, 일제강점기를 정치, 통치기구, 경제ㆍ사회, 문화, 해외 등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조사·심의하였다. 각 부문의 세부 분야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기준과 결과를 보면,


   • 정치부문에서,

    - 귀족의 경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행위로 고영희 등 139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중추원에 참여한 경우, 부의장, 고문, 참의 등을 지낸 행위로 강경희 등 333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통치기구 부문에서,

  -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료의 경우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거나, 식민 통치 협력행위로 훈포상을 받은 행위 등으로 강필성 등 225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판·검사의 경우, 항일운동 재판에 참여하는 등 무고한 우리 민족구성원을 탄압한 행위 등으로 강동진 등 32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경찰의 경우, 항일운동세력을 탄압하거나 우리 민족구성원을 탄압하는 행위 등으로 강인수 등 109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군인의 경우, 일제 군대의 소위 이상의 군인으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으로 강재호 등 40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경제·사회 부문에서,

 - 정치사회 단체의 경우, 일진회의 이용구 등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합병을 지지하거나 의병 및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혹은 내선융화, 내선일체 등을 지지한 행위 등으로 51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경제 분야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의 간부 혹은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한 행위 등으로 김사연 등 32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교육, 언론, 종교 분야에서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매일신보 등에 다수의 글을 게재하거나, 강연 등을 통해 징병, 학병제를 지지하고, 일제의 외곽기구인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적극 협력한 행위 등으로, 교육분야에서 고황경 등 22명, 언론 분야에서 김동진 등 33명, 기독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 종교 분야서 갈홍기, 강대련, 김완진, 김병제 등 48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문화부문에서,

  -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매일신보 등에 다수의 글을 게재하거나, 강연, 작품 활동 등을 통해 징병, 학병제를 지지하고, 일제의 외곽기구인 국민총력연맹 간부로서 적극 협력한 행위 등으로, 문학, 연극·영화, 음악, 미술 등 문예부문에서 김기진, 김관수, 계정식, 김기창 등 64명(이 가운데 1명은 효력정지 상태임)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학술분야에서 다수의 글을 신문 등에 게재하거나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활동하는 등의 행위로 김두정 등 20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다.


   • 해외부문에서,

    - 중국 지역에서 활동한 경찰로서 항일운동세력을 탄압하거나 우리 민족구성원을 탄압하는 행위 등으로 김재필 등 10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만주국의 고위 관료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거나, 식민 통치 협력행위로 훈포상을 받은 행위 등으로 김사용 등 12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중국 지역에서 친일단체를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혹은 내선융화, 내선일체 등을 지지한 행위로 51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으며,

    - 일본지역에서 중의원 의원이나 친일단체, 언론기관 등을 만들어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 등으로 권혁주 등 9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반민규명위는 21개의 세부 분야에 대한 조사 결과 1,052명의 조사대상자를 선정하여 엄격하고 공정한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였다. 다만, 1명은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 사건의 판결선고시까지 효력정지를 서울행정법원이 결정함에 따라 보고서에는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내용을 수록하였다.


  □ 조사의 의의

   ○ 식민지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식민지배의 잔재와 협력세력에 대한 청산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광복 직후의 반민특위 활동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상태로부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반민규명위는 이러한 특별법의 취지와 절차에 따라 공정한 조사를 수행하여 친일반민족행위의 역사적 실체를 밝혀내었고, 모두 16권에 이르는 방대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을 간행하였다. 


   ○ 어둡고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반추하여 친일반민족행위를 규명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이러한 작업을 시도한 것은 개인을 법적으로 처벌하려는 것은 아니며, 대상자를 전인격적으로 판단하여 친일파로 규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반민규명위의 조사 목적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며 민족정통성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공동체 윤리를 확립하는 데 있다.

 


 □ 조사의 한계와 과제

   ○ 반민규명위의 조사 결과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한계도 없지 않다. 철저한 증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됨으로써 광복 후 반민특위에서 조사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의 정황이 드러난 사례에도, 1차 자료로 검증하기 어려워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 반민규명위의 4년 6개월에 걸친 조사가 40년간 행해졌던 친일반민족행위의 자료를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하고, 친일반민족행위 기초 범주에 대한 연구를 동시에 수행하기엔 시간적으로도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반민규명위의 조사 성과는 앞으로 역사의 교훈자료로 활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며,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도 사료관을 건립하는 등 지속적인 자료 수집과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이번에 발간된 보고서는 대통령, 국회, 유관기관,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일부)에 배포되었다. 아울러 전체 25권을 모두 담은 CD는 대학도서관, 전국의 고등학교, 관련 학회 및 학자, 언론기관 등에 배포될 예정이다.

Loading

“그 양반이 아직 살아 있었나?”

10월31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를 떠난 뒤 그는 30년 가까이 거의 뉴스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칩거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아직 신군부의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던 1984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의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여류 수필가를 만나러 갔다 그곳에 들른 이후락 씨와 합석하게 되었던 일이 있다. 여류 수필가는 그에게 술을 따르며 평양 방문 때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갖고 갔던 일을 찬탄하면서 “대체 그 독약을 어디에 숨기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후락 씨는 자신의 어금니 가운데 의치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청산가리를 숨겼다고 했다.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다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내가 그날 들은 이야기는 분명 의치 속에 숨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저 양반이 김종필 씨나 누구처럼 보직의 하나로 그냥 정보부장을 했던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09년 11월1일, 미국 에 실린 그의 사망 기사를 보니 이름 앞에 ‘전 남한 스파이 총책(Former South Korean spy chief)’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물론 그 표현은 ‘중앙정보부장’을 풀어 쓴 것이겠지만, 나는 이 미국 신문이 이후락 씨의 실체를 제대로 꿰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이후락 씨는 원래부터 첩보원과 무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공식 기록을 보면 이후락 씨는 1924년생이다. 그리고 만 21세 되던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미 군정이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문을 열었던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에게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반년 정도 이수하게 해서 한국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던 일종의 세탁용 단기코스 같은 것이었다. 1기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전원이 해방 전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장교들로 적어도 23∼24세가 넘은 나이들이었다.

그런데 이후락 씨는 21세의 나이에 일정 코스를 거치고 임관까지 되어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미스터리다. 그래서 군사영어학교 1기로 뒤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김정렬 씨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가 미군과 거래하려면 첫째는 영어를 구사해야 했을 것이고, 둘째는 미군과 거래할 만한 무슨 내용을 갖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울산공립농업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가 갑자기 영어를 구사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1980년대 초 한국의 군사관계 기사를 많이 쓰던 한 일본인 기자가 내게 이후락 씨가 일본에서 ‘나카노(中野)학교’를 다녔다는 설을 들려준 일이 있다. 진짜 나카노학교 출신들은 자신이 그곳 출신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니 이 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이후락 씨의 미스터리에 대한 의문점이 대번에 풀린다. 나카노학교란 일본 육군성이 1938년 문을 연 첩보원 양성학교로 외국어는 첩보원이 활동할 지역에 따라 영어·러시아어·중국어 중 하나를 집중 공부했는데, 72시간 잠을 안 재우는 논스톱 방식의 강훈련으로 반 년 정도면 회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5년제 농업학교 출신의 이후락 씨가 해방되던 해부터 영어를 구사했던 배경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1970년 2월20일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나카노학교에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나카노학교는 일본 육사나 예비사관학교가 중심이고 그 밖에 교도(敎導)학교 등 일본 육군이 관리하던 각종학교 재학생들 가운데 머리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기자든 정치인이든 미국대사든 이구동성으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영민한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8년 동안 나카노학교의 졸업생은 모두 2131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락 씨의 경우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있던 육군항공정비학교에 진학했던 기록이 있다. 그곳에 다니다 학교장의 추천을 얻어 나카노학교에 선발된 것 아닌가 추측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관련사진

photo

>>CIA 연락책

해방되기 전 나카노학교 출신들이 해방 후 조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군사령부에 투입된 것은 마루사키 요시오(丸岐義男) 소좌를 우두머리로 한 육군 소위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총독부 경찰의 경부나 경부보 또는 순사부장 등으로 위장해 지금의 중부경찰서인 본정서(本町署)와 일본 군속이 많이 살던 용산의 용산서(龍山署)에 집중배치됐다.

이후락 씨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2월 초 이들 나카노 출신 일본군 첩보장교들이 모두 귀국길에 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이후락 씨는 미 군정청이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진주미군의 G-2나 방첩대(CIC) 등의 정보기관은 방공망 구축과 조선 통치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총독부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대 등과 밀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락 씨의 학력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그를 반겼다.

군사영어학교 입학 5개월 만인 1946년 3월23일 그는 22세의 나이에 대위로 임관된다. 당시 미군이 그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준 것은 김정렬 씨의 증언처럼 그가 대위라고 우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정보 일을 맡기기 위해 그런 계급장을 달아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김정렬 씨가 언급한 ‘미군 측과의 거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군이 그를 밀어주는 대신 그는 미군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의 보직은 때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정보계통에 머무른다. 임관 2년 만인 1948년 육본 정보국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1949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 1950년에는 육군참모총장 정보보좌관, 1951년 육본 정보부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그는 계속 정보계통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취득한 정보를 처음에는 미 제24군단 G-2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CIA에 제공했다. 그 후 주미한국대사관 무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는데, 이때 미국 CIA의 정식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귀국 후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CIA 연락책이 되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배경이 CIA였기 때문에 그는 4·19혁명이 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좌천되지 않았다. 4·19혁명 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그는 장면 총리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국무총리 안보비서관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있다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추천되었는데, 이 일에 대해 당시 장면 총리의 비서였던 선우종원(鮮于宗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고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에서 그를 민 것 같다.”

그 무렵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락 씨는 부패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의 옆방에 수감되었던 훗날의 국회의장 박준규 씨는 이런 말을 했다.“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

처신이 약삭빨라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CIA의 중재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미국 CIA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고…”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CIA는 그 적격자로 이후락 씨를 지목했다. 이에 당시 군사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씨가 그를 출옥시켜 <대한공론사> 사장 자리에 앉혔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힌다. CIA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의장의 입장에서는 CIA의 백업을 받는 이후락 씨를 이용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락 공보실장은 이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점차 박정희 의장의 신임을 얻는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글 강준식 작가 [arumdhaun@hanmail.net]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11/23/3547519.html?cloc=nnc

Loading

이후락 장남 이동진 - 옥로 부부는 여러 법인을 설립, 자신들의 부동산을 법인으로 이전하는등
활발한 부동산 거래를 합니다

이후락 장남부부는 1981년 1월 7일 각각 16만5천달러에 매입했던 알파인 나대지 2필지를
1983년 5월 3일 22만달러에, 또 1983년 5월 18일 21만달러에 각각 매도합니다

또 자신들이 크레스킬에 매입해 뒀던 부지 2필지도 매도합니다
이 크레스킬 땅은 이 부부가 언제 매입했는지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 땅을 매도할때 이들 부부가 주인인 것이 드러납니다

크레스킬 부지 2필지는 1985년 3월 8일 각각 15만달러에 매도됩니다
이중 한 필지는 우리도 잘 아는 공직자 겸 정치인에게 팔렸습니다

이들 부부는 뉴저지 포트리 블록 4101 랏 35 부동산도 소유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GLEN INVESTMENT COMPANY INC라는 법인이 이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이 회사는 이동진씨 소유였습니다

1988년 12월 16일 GLEN은 회사 소유주 이동진에게 1달러라는 가격으로 넘겼습니다
그러나 최초 GLEN 이 얼마에 이 부동산을 사들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198812.jpg -
이 부동산은 이동진 사망 직전인 2004년 4월 24일  다시 '310 MAIN ST LLC' 라는 법인에
1달러에 매도됩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198812.jpg -
이당시 이동진은 한국에서 요양중이었으며 사망에 임박해 부인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주는등
재산을 정리한뒤 2004년 5월 8일 사망했습니다

장남 사망 1년 6개월뒤인 2005년 12월 19일 부인 옥로는 테너플라이 자신의 집을
LEE MARTIAL TRUST 라는 법인에 1달러에 매도하며 이 매도서류에 장남의 사망일자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집은 2006년 6월 30일 백5만9천달러에 팔립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200404 집 이마샬트러스트.jpg -
그뒤 이옥로는 2007년 3월 2일 뉴저지 테터플라이 주택을 2백15만달러에 사들입니다

아직 법인소유의 부동산들은 조사해 보지 않아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습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200703 새집 매입.jpg -
이외에도 장남은 그 자신의 독특한 취미[?]를 즐기기 위해 큰 돈을 탕진했다[?]
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이며 여러 증언들이 많으나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Loading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자녀는 4남 1녀 입니다

장남은 지난 2004년 사망한 이동진으로 서정귀의 딸 서옥로와 결혼, 1남2녀를 두었습니다
차남은 동훈으로 한화 김승연회장의 누나 영혜와 결혼, 4남을 두었습니다
3남 동익은 1남2녀, 4남 동욱은 SK쪽의 예원과 결혼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외동딸은 명신으로 정화섭과 결혼,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후락 장남 동진 부부의 부동산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동진 - 옥로 부부는 1975년 7월 15일
뉴저지 테너플라이의 7 GLENWOOD COURT의 부동산을
9만5천달러에 구입했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507.jpg -
이후락 부장의 큰 며느리인 옥로씨는 1979년 3월 30일
옥로 단독으로 테너플라이 블록 226 랏21의 부동산을
32만달러에 매입했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903.jpg -
이동진 - 옥로 부부는 1980년 12월 12일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해변의 '이라카이 아파트먼트'의 1625호를
17만5천달러에 사들였습니다

이들 부부에 앞서 1980년 8월 외동딸 부부가 같은 콘도를 매입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와이 콘도를 구입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1981년 1월 7일 뉴저지주 알파인의 나대지 2필지를 구입합니다

1필지는 알파인 블록 39 랏 12J로 16만5천달러에 매입했으며
나머지 1필지는 알파인 블록 39 랏 12I 로 역시 16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903.jpg -
이후락 장남 부부 198101 2.jpg -
이동진은 또 사위인 정화섭과 공동명의로
1981년 4월 15일 뉴저지주 포트리 부동산을 75만달러에 매입합니다

이들 두사람은 또 1981년 6월 15일 뉴저지주 잉글우드 클립 부동산을
백60만달러에 공동매입합니다

이후락이 부정축재자로 재산을 환수당한 시점이 1980년 6월 중순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후락이 재산을 환수당한 그 직후부터
장남부부와 외동딸부부의 부동산 구입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부분이 이후락과 신군부사이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지 않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Loading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맨 처음 글에서 말한대로
1987년에 아주 굵직한 거래를 합니다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7년 6월 10일
재미동포들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인 퀸즈 플러싱
메인스트릿 59-10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2백20만달러였습니다 [계약서는 이미 공개]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또 약 2달뒤인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172  MADISON AVENUE 빌딩을 사들입니다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였습니다 [계약서는 이미 공개]

이들은 또 1988년 12월 9일 뉴저지주 포트리
메인스트릿 95번지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계약서상에서는 1달러로 돼 있지만
실제 매입액이 30만달러임을 세금등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계약서 동그라미 부분]



외동딸 부부는 또 2007년 4월 13일에는
허드슨강 너머로 맨해튼이 바라다보이는
뉴저지 엣지워터의 한 건물을 6백90만달러에 매입합니다

물론 이들은 1992년 6월 30일 포트리 부동산을 2백66만5천달러에
1994년 5월5일 크레스킬 집을 62만5천달러에
2001년 3월 30일 포트리 부동산을 백만달러에 매도하는등
약 4백20만달러정도의 부동산은 매각했습니다

외동딸 부부는 뉴욕등 동부지역에서만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 아니라
LA에서도 일부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소문이 있고
특히 모 한국계 은행의 설립에 깊숙히 간여했다고 합니다

외동딸 부부의 뉴저지 알파인 저택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부동산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집안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많았으며
그중 하나는 최근 여러가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모화백의 그림중 한점 이었다고 합니다

LA등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내일부터는 숱한 소문을 뿌렸던 이후락의 장남 부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Loading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외동딸 부부는 장남 내외와
얽히고 설키며 부동산을 매매합니다

외동딸부부는 지난 1980년 12월 15일 18만달러에 매입한
크레스킬 부동산을 1983년 1월 1일 장남 내외에게 28만달러에 매도합니다 

외동딸부부와 장남부부는 부동산을 공동 매입하기도 했지만
이 부동산은 외동딸부부가 장남부부에게 10만달러의 이문을 붙여
매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뒤 1986년에 접어들어 다시 큰 규모의 거래가 시작됩니다

외동딸 부부는 1986년 1월 28일 뉴저지 최고 부촌인 알파인의 블록 22 롯 25,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주소는 40 TAMARACK ROAD 알파인으로 
그야말로 그림같은 웅장한 집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38번지까지는 주소가 있었지만 40번지와 그 뒤 집한채는 
주소를 명시하지 않아 집을 찾을 수 없었고
우편물은 사서함을 통해서 받습니다

이 부동산 매입가격은 60만5천달러 였으며
현재 공시지가만 3백80만 달러에 달합니다



외동딸 부부는 또 같은해 7월 14일
뉴저지 포트리 1636 PALISADES AVE일대[1635 PARK AVE로도 불림]
부동산을 2백55만5천달러에 매입합니다

이 부동산은 뉴저지 포트리에서 잘 알려진 콘도인
아트리움 콘도 바로옆에 있습니다


따라서 2개 부동산 매입에 투입된 돈은 3백15만5천달러였습니다
그러나 1986년12월 19일 포트리소재 부동산 1건을 2백25만달러에 매도함에 따라
1986년 실제 부동산 매입액은 62만5천달러였습니다

Loading

이후락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정명신 부부는 1981년 1월과 4월 백48만달러를 들여
두건의 부동산을 매입했었습니다

그뒤 약 2개월뒤인 1981년 6월 15일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은
GAINES CAPITAL CORPORATION 과 함께 뉴저지 잉글우드 클리프의 부동산을
사들입니다

장남과 함께 부동산을 사들인 GAINES 라는 회사는 바로 이후락 사위
정화섭의 회사였습니다

이후락 장남과 이후락 사위가 공동출자해 부동산을 사들인 셈입니다

부동산 매입가격은 백60만달러,
부동산 주소는 뉴저지 잉글우드클리프 블록 411 랏 19였습니다

백60만달러는 지금도 적지 않은 돈이지만
28년전 백60만달러는 그야말로 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

결국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부분적으로 장남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1981년에만 3백8만달러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입니다

이후락 정화섭 이동진 1981년 백60만불 -
Loading

김창준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기념비적 인물입니다

김 전의원은 1939년에 출생해 1961년 미국에 유학온뒤 지방자치단체장등을 거쳐 마침내 1992년
캘리포니아주 41선거구를 대표하는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뒤 연거푸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됐지만 정치자금 모금의 합법성, 한보철강으로 부터의 로비,
대만인으로부터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등이 문제가 되면서 하차하고 맙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6년간 연방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임기말에는 정치자금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하원 윤리위원회등의 강도높은 조사가 진행됐고
그가 하원을 떠난 다음해인 1998년 10월 8일 하원은 김창준 조사 보고서를 발행합니다

'IN THE MATTER OF REPRESENTIVE JAY KIM' 이라는 이 보고서의 문서번호는 105-797
즉 연방하원 105 회기에 발간된 797번째 책자를 의미합니다

이 보고서는 무려 8백61페이지에 이르며 첨부된 증거서류만 172개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창준 하원의원이 자신이 설립한 회사로 부터 8만여달러를 불법 기부받고
니코 엔터프라이즈에서 만3천여달러, 또 국적이 대만이어서 정치 헌금이 불가능한 대만인으로 부터
자금을 수수했으며 한보철강으로 부터 3만달러, 그리고 골프채, 여행경비등을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또 1994년 한국에서 '나는 보수다' 라는 책을 출판한뒤 그 수익금의 일부를 국세청 보고에서 누락시켰고
1997년 한국에서 정치자금 5만1천달러를 모금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한보철강등과 관련해서는 FBI가 한보철강 미국지사장 김모씨를 조사한 보고서도 첨부돼 있으며
이들의 은행기록, 예금잔고, 송금증명서, 크레딧카드 사용내역등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한보의 로비 전모가 자세히 드러난 것입니다

또 한때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회고록 포기협상을 벌였던
유영수씨도 등장합니다

유씨는 뉴욕 뉴저지지역을 중심으로 미국 공화당 관련모임의 대표등으로 나섰기에
공화당 출신인 김창준 전의원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연방의회가 김창준 전의원에게 '가혹하다' 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쳤고 다른 의원들에게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과연 이렇게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인은 모름지기 몸가짐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생생한 보고서를 원문으로 게재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한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CRPT-105hrpt797 김창준-한보 의회조사보고서 -
Loading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부동산 4건을 매입한데 이어
1981년에는 2건의 부동산을 사들입니다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1년 1월 20일
뉴저지 포트리 블록 1803 로트 22-26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73만달러로 1980년 건당 20만달러대에서
크게 높아집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4 -

이후락 사위 정화섭은 이후락 장남 이동진과 함께
1981년 4월 15일 뉴저지 포트리 브록 4805 로트 4를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75만달러로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5 -

결국 1981년 백48만달러의 부동산을 사들인 것입니다

Loading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이명신부부는 1975년과 1977년 집을 구입한뒤
부정축재자 발표직후인 1980년 7월부터 부동산 매입을 본격화합니다

신군부가 부정축재자를 발표한 것은 1980년 6월 17일,
이때 이후락은 울산의 학교등 모두 194억원을 환수당합니다

그러나 외동딸 부부의 미국 부동산 매입은 공교롭게도
부정축재자 발표로 재산을 환수당한 바로 그 다음달부터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7월 7일
뉴저지주 포트리의 221 메인스트릿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22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1 -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8월 25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이라카이 아파트먼트 빌딩 1426호를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34만2천달러였으며 8만여달러를 먼저 지급하고
향후 3년에 걸쳐 매년 8만여달러를 납입합니다 [하와이 부동산 계약서는 이미 공개함]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12월 15일
뉴저지 크레스킬 블록 210 랏 25와 랏 26등
나대지 2필지를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18만달러였습니다
훗날 이 나대지 2필지는 이후락 장남 이동진을 거쳐
우리가 잘아는 정치인에게 매도됩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2 -
이후락 사위 정화섭은 1980년 12월 22일
이후락 장남 이동진과 공동명의로
뉴저지주 포트리 블락 4805 랏 3의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11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2 -
이처럼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부정축재자로 재산이 환수당한 다음달부터 시작해
1980년에만 4건의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이 4건의 매입금액은 하와이 부동산의 전체금액을 합산한다면
87만달러에 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981년에 접어들면 그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Loading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직계가족의 미국 부동산 내역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부동산 관련 서류 일부를 복사해 왔습니다
서류가 워낙 많아 정리에 시간이 걸리므로 일단 시기를 나눠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970년대입니다

이후락 전 부장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정명신이
미국에 첫 부동산을 구입한 것으 197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부부는 1975년 11월 3일 8만3천달러를 주고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22 LESLIE PLACE 주택을 매입합니다



이들 부부는 이 주택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77년 7월 26일 9만5천달러에 매도합니다

이들 부부는 테너플라이 주택 매도에 앞서
1977년 2월 1일 뉴저저주 크레스킬 주택을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15만3천달러로 1년 3개월전 테너플라이 주택매입때보다
약 2배정도 많은 금액이며
주소는 32 EISENHWER DRIVE, CRESSKILL, NJ 입니다



이들 부부는 뉴저지주 알파인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이 집에 거주합니다

과연 1970년대 중후반 8만여달러, 15만여달러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을까
1970년대가 미국이민자들에게 허용된 외환반출한도가 70달러에 시작해
백달러로 늘었다가 2백달러까지 가능했다고 하니 매우 큰 돈임에 틀림없습니다

1970년대 부동산 거래는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경우
2건 매입, 1건 매도 였습니다

매우 특이한 것은 이들 외동딸 부부의 부동산 거래가 1980년 초부터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매입건수는 물론이고 한건당 금액도 크게 늘어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시해사건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때인 1980년 5월 16일 김종필 이후락등을 연행합니다 

약 한달간의 조사뒤 1980년 6월 중순 이후락이 1백94억원정도의 
부정축재를 했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이후부터 이후락 직계가족, 외동딸 부부와 장남 부부의
미국내 부동산 매입이 크게 늘어납니다 

신군부는 분명히 탈탈 털어 조사해 백94억원 전액을 국고로 환수했는데
이후락 직계가족들이 그 이후부터 미국내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정말 미스테리한 일입니다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예치된 돈일수도 있고
혹시 신군부가 이후락의 부정축재액을 축소해 백94억원만 발표하고
군부등에 이후락씨등의 영향력을 의식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
일부는 그대로 돌려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습니다 

만약 부정축재액중 백94억원만 환수하고 일부는 다시 돌려주었다면
또 다른 일부를 신군부가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부분을 밝혀내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이며
부정축재 조사를 담당한 전두환등이 입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Loading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외동딸 부부뿐 아니라 장남 이동진-서옥로 부부도
미국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동딸 부부가 장남 부부보다는 부동산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후락 전 부장의 장남 이동진씨는 몇년전 작고했으며 
동진씨 작고뒤 서정귀 호남정유 회장의 딸인 옥로씨는 뉴저지에 새 집을 구입했습니다

이옥로씨는 2007년 3월 2일 뉴저지 테너플라이에 2백15만달러의 집을 매입했습니다
이 매입계약서는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 디드 제9271권 제47페이지에 첨부돼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외동딸 부부와 같은 시기인 1975년 첫 집을 구입했으며
1980년에는 외동딸 부부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이라카이 아파트를 매입했었습니다

지난 9월 29일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에서
이동진 이옥로씨의 부동산 거래서류를 조회했으나
역시 그양이 만만치 않아 현재는 목록만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조만간 관계서류를 확보해 공개하겠습니다

이동진-옥로 리스트 -
Loading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 명신씨 부부가 미국에서 많은 부동산 거래를 했습니다

지난 9월 29일[2009년 9월 29일]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검색컴퓨터로 CHUNG WHA SUP , 즉 사위 명의의 부동산관련 서류를 조회했었습니다

이 버겐카운티 단 한지역에서만 관련 서류 백3건이 검색됐습니다
물론 부동산 매매계약서뿐 아니라 등기소에 제출된 매매관련 다른 부속서류를 포함한 것입니다만
DEED [매매계약서;매입-매도 포함]만 40여건이었습니다

이후락 사위 버겐카운티 부동산관련 서류 목록
이후락 사위 버겐카운티 MMGK 부동산관련 서류 목록

버겐카운티등기소는 내부 검색컴퓨터로 서류를 확인한뒤
직접 문서고에서 해당 서류를 찾아 복사등을 해야 합니다

백3건이라면 한서류가 2장으로만 돼 있어도 2백페이지요
3장으로 돼 있다면 3백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당시 백3건이 검색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리스트만 출력시키고 서류확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추후에 2-3일 날을 잡아 서류를 복사해 보고자 마음먹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차차 공개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후락 자녀들이 재벌 일가와 결혼, 재벌의 돈으로 미국의 부동산을 사는데
왜 왈가왈부하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프레이저 청문회등에서 이미 나왔듯이 스위스 비밀계좌와
일정부분 관련이 있고 '부정축재자'로 발표된 이후락의 돈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이 짙기 때문입니다

아래 동광출판사가 출판한 '정풍 6권 -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한부분을 스캔해서 올립니다 [동광출판사의 양해를 바랍니다 ]

김종필 이후락 떡고물 8P
Loading
이후락 장남은 이동진으로 서정귀의 딸 서옥로[미국부동산 서류에는 '이옥로'로 표기됨]와 혼인합니다

이동진은 몇년전 작고했습니다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옥로 부부도 하와이에 콘도를 매입합니다

이들 부부가 매입한 콘도는 이후락의 외동딸과 사위인 정화섭-명신 부부가 매입한 콘도와 동일한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해변에 인접한  ILAKAI APARTMENT 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1980년 12월 12일 이 콘도의 1625호를 매입합니다
세금을 백75달러 납부한 것으로 미뤄 매입가는 17만5천달러입니다

이동진 이옥로 하와이 매입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이들 부부의 주소는
7 GLENWOOD COURT, TENAFLY, NJ 07670 입니다
이 집에 대해서는 추후 알아보겠습니다

결국 정화섭-명신 부부가 1980년 8월 25일 이 콘도 1426호를
이동진-옥로 부부가 4개월뒤인 1980년 12월 12일 1625호를 구입함으로써
와이키키해변에서 가장 유명한 콘도였던 이라카이 아파트에 
이후락 직계가족이 1980년 두채의 콘도를 매입한 것입니다 
 
다른 고관대작들도 이 콘도를 매입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만
워낙 오래전이고 현재 소유주가 많이 바뀌어서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Loading

7.4 남북 공동성명의 주역,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등으로 잘 알려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조금전 한국시간 2009년 10월 31일 오전 숨졌다고 합니다

이후락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지작업을 위해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을때 '청산가리를 품고 갔다'고 증언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여러차례 공직을 이용한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락의 별세로 '85년 영욕의 세월'등 그의 공과가 자세하게 알려지고 있으므로
저는 그의 직계가족들의 미국 부동산 내역에 대해 알리고자 합니다

이후락의 별세에 대해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겠지만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등을 지낸 간과할 수 없는 공인이며,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므로
엄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부동산 내역을 공개합니다

한국인의 미국 부동산 소유를 추적해 보면 미국 부동산 소유가
한국의 권력부침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형욱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뒤 김형욱이 실각한뒤에는
그 뒤를 잇는 이후락이 나타나고 그 뒤에는 10 26의 주역들이 나타나는 형상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이후락으로 그의 직계가족,
즉 자녀들의 미국부동산 매입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김형욱과 한국의 재벌일가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 알파인에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의 대형빌딩, 퀸즈의 빌딩, 최근에는 뉴저지주 엣지워터의 대지와 주택을 구입하는등
부동산 규모는 최소한 3천만달러에서 5천만달러에 달합니다

이후락의 가족중 외동딸과 사위, 그리고 이미 작고한 큰 아들과 생존한 며느리가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차근 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포털사이트등에서 살펴보면 이후락은 아들만 3명을 둔 것으로 나타나지만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이 외동딸 명신이 정화섭씨와 결혼했고 이들 부부는 적어도 1975년부터 미국에 체류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부부가 가장 먼저 소유한 부동산은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주택입니다

주소지는 22 LESLIE PLACE, TENAFLY, NJ로 1975년 11월 3일
8만3천달러 에 이 주택을 구입합니다

이후락사위 테너플라이 1975
이후락씨 딸 부부는 또 1980년 8월 25일 하와이 호눌룰루의 와이키키 해변에서
가장 인접한 ILAKAI APARTMENT [이라카이 아파트]를 매입합니다

와이키키 서쪽 해변앞 콘도는 약 10채 정도로 그중에서 해변과 가장 가깝고
가장 먼저 세워진 콘도가 바로 이 이라카이 아파트이며
이중 가장 최근에 세워진 것이 노재헌, 조현상,한병기등이 구입한 THE WATERMARK 콘도입니다

이들 부부가 구입한 콘도는 이라카이 아파트 1426호였으며 매입가격은
1980년 당시로는 큰 돈인 34만2천달러 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9만9천여달러를 다운페이먼트로 선지불한뒤 남지 24만2천여달러를
3년에 걸쳐 지불했습니다

한진 일가등과 함께 이후락씨 직계가족이 사실상 하와이 투자의 원조인 셈입니다

이들 부부의 당시 주소는 32 EISENHWER DRIVE CRESSKILL NJ 였으며
이 주택은 이들부부의 소유였습니다
이 집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하와이 15 003 1174541
현재 이들 외동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뉴저지 알파인에 있습니다

이 주택의 주소는 PO BOX 295, TAMARACK ROAD, ALPINE, NJ 로
알파인 다른 주택들처럼 번지 없이 사서함 번호로 표시됩니다
지적도상으로는 알파인 블록 22 랏 25입니다

대지가 2에이커, 약 2천4백여평인 이 주택의 가격은 3년전인 2006년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가
고시한 공시가격만 3백78만천9백달러 입니다

공시가격이 시세에 한참 못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현시세가 최소 6백만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부동산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이후락 사위 알파인 주택
또 이들부부는 MMGK LLC 라는 법인을 설립해 지난 2007년 4월 13일
뉴저지주 에지워터의 땅을 구입합니다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MMGK LLC의 주소는 바로 이들부부의 알파인 집 주소입니다

이땅의 매입가격은 무려 6백90만달러 였으며 양도세만 8만9백여달러에 달했습니다

이후락 사위 엣지워러 2007
그이전인 1987년 이들 부부는 MONDA ASSOCIATES 라는 법인을 설립해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을 매입합니다

이 빌딩의주소는 172 MADISON AVE, NEW YORK, NY 으로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입 1987
이 빌딩을 팔때 위임장서류를 통해 MONDA ASSOCIATE의 주인이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 정화섭-정명신[이명신] 임이 드러났으며, 매도서류에도 정화섭이라는 이름과 서명이 있으며
2002년 4월 2일 매도시 가격은 8백97만5천달러 였습니다

이 빌딩은 2007년 다시 다른 주인에게 팔리는데 그때 가격이
천5백90만달러였으므로 현시가가 천 7백만달러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도 2002
이들 부부는 또 이 빌딩 매입직전에 뉴욕 퀸즈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빌딩을 매입합니다

빌딩 매입일자는 1987년 6월 10일이며
빌딩주소는 59-10 MAIN STREET,
매입시 법인이름은 M.G.&K ASSOCIATES 였습니다

매입가격은 2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입 1987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도 1994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도시 위임장 1994

이후락씨 외동딸 부부는 이외에도 수십차례의 거래를 통해 주택과 빌딩을 사고 팔았습니다
이후락씨 외동딸 부부의 일부 부동산이 이정도입니다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큰 아들과 작은 아들도 미국에 부동산이 있으며
아들의 부인이 몇달전 한국에서 상장 기업체를 인수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계약서 스캔등이 끝나는 대로 그 내역을 차근차근 밝히겠습니다

=====================================================================================================

동광출판사가 출판한 정풍 6권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이란 책에 따르면

"이후락씨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자에 재직할때 사위인 정화섭을 1972년12월
국제문제 담당 국장으로 임명했다 박정희의 질책을 받고 물러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정유회사인 G사가 1969년 8월 21일 스위스 유니언은행 서정귀씨[이후락 사돈] 명의로
2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송금하자 유니언은행은 이돈의 입금사실이 기재된 구좌명세서를
 1969년 9월 2일 이후락의 사위인 정화섭에게 발송함으로써 
이후락씨 사위인 정씨가 이후락씨의 부정축재 자금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30년전인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덮기 위해 부정축재자 조사에 나서
1980년 6월 19일 권력형 부정축재자 10명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부정축재액은 김종필이 2백16억원, 이후락은 백94억원, 이세호 백 11억원등이었습니다
이후락과 관련해 1977년 로스앤젤레스에 빌딩을 매입했다는 소문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이부분은 고위관리를 헐뜯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대충 이러한 부분과 함께 부정축재 내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LA의 빌딩 매입소문을 듣고 확인을 진행중이지만
아직은 사위나 며느리 이름의 빌딩 매입 계약서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


 

Loading

10월 5일 월요일 오전 고위공직자 인척관련 자료를 공개하겠습니다
안치용 백
Loading

이정일 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도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에 주택을 구입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3얼 4일 작고한 이정일 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은 지난 2004년 5월부터 2006년 8월까지
제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한때 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인물검색 참조]

이 전의원이 뉴저지주에 주택을 구입한 것은 지난 1989년 12월 1일
주택소재지는 뉴저지 테너플라이이며 주소는 26 PETER LYNAS CT 입니다 

구입당시 계약서상 매입자는 LEE YOUNG HEE 였으며
이 전의원의 부인인 정영희씨가 미국식으로 남편성을 따라 이영희로 표기돼 있었습니다

매입가격은 1989년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94만 달러였습니다
1989년 당시 뉴저지주 버겐카운티가 조사한 이주택의 공시주택가격은 17만6천3백달러였습니다 
공시주택가격과 실거래가가 약5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1989년 거래된 주택 5채를 임의추출, 공시주택가격과 실거래가를 비교한 결과
5채 모두 실거래가가 공시주택가격의 2배를 초과하지 않았습니다
[이 매입계약서는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 매입서류 책 7338권 611페이지에 편철돼 있습니다]

이 전의원의 부인은 이 주택을 구입한뒤 같은 날 바로 주택의 지분 50%를
남편인 이전의원에게 0달러에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 등기를 마쳤습니다
이 계약서에 나타난 소유주는 JUNG IL, LEE & YOUNG H 였습니다 
[이 매매계약서는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 매입서류 책 7338권 615 페이지에 편철돼 있습니다]
 
두 매매계약서 모두 1989년 12월 1일 작성됐으며 12월 15일자로 등기소에 등기됐습니다

이 전의원 부부는 1989년 당시의 2개 계약서에서 한국주소를 전혀 적지 않고
뉴저지주 클리프사이드팍크 소재 200 WINSTON DRIVE, UNIT 109로 기재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의원 부부는 10년뒤 이 주택을 매각하게 됩니다
매각일자는 1999년 9월 21일이며 매각대금은 78만5천달러로 10년전 매입때보다
오히려 16만달러정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당시 뉴저지 버겐카운티가 조사한 이주택의 공시주택가격은 80만8천8백달러였습니다
매도계약서에 매도자는 이정일 정영희 부부였으며 매입자는 외국인이었습니다

1989년 주택 매입때 한국주소를 전혀 적지 않았던 이 전의원 부부는 매도계약서에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29-8번지라는 서울주소를 기재함으로써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이 매도계약서는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등기소 매입서류 책 8209권 858페이지에 편철돼 있습니다]

이정일 매도 -
서울주소에 대해 등기부등본 조회결과 이 전의원의 생일과 사망일자등이 정확히 일치했으며
이전의원 사망으로 상속이 되면서 부인의 이름등도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논현동 주택은 이 전의원이 지난 1986년 2둴 3일부터 소유한 주택이었습니다
2009년 7월말 현재는 부인과
nonhyon29-8 - 3자녀에게 상속됐습니다

중앙일보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해외주택구입한도는 지난 2000년말까지
해외2년이상 체류자에 한해 10만달러짜리 주택까지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94만달러짜리 주택구입은 이 한도규정을 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는 없으며 예외를 둘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공개합니다
*******************************************************************************************

Loading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지난 9월 15일 국적의혹설이 제기되자
모 법무법인을 통해 '김병국 전 수석의 국적문제등에 대한 알림' 이라는 문서를
언론사에 배포했다고 합니다

모 일간지 기자께서 이 배포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주셔서 공개합니다

3개항으로 돼 있는 이 문서에서 김병국 전수석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측은
첫째항에는 김전수석을 대리해서 아래 내용을 알린다고 하고
둘째항에는 국적문제, 세째항에는 미국 부동산매입 문제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김병국 해명서 법무법인 -
둘째항 국적문제에 대한 해명에서 소년시절에 미국으로 떠나 한때 미국시민권을 보유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87년 귀국이후 시민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병역의무도 완수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단일국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째항 미국 부동산 매입문제에 대해서는 해외의 부동산 매매사실과 관련해서는 이를 인정하며
다만 관련세금을 모두 납부하는등 적법하게 처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부속서류로 참여연대등이 김전수석의 국내 부동산 취득등에 대해 검찰에 고발했던 건과 관련,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발행한 사건처분결과증명서도 함께 배포했다고 합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2008년 9울 10일자로 김병국 김병표 2인에게 제기됐던
1. 부동산등기 특별조치법위반
2. 조세범 처벌법 위반 등
2가지 사항을 각하 처리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이외에 미국 쇠고기 추가협상과 관련, '쇠고기 협상 5단계 전략으로 합의 이끌어냈다'는
언론매체 기사 여러건이 첨부돼 있었습니다

모 일간지 기자께서 이메일로 알려주셔서 네티즌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Loading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지난 80년대 미국 보스턴에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만일 자신이 숨질 경우 자신의 부친이자 인촌 김성수의 아들인 김상기씨에게 소유권을 승계토록 하는 신탁증서가 작성됐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미들섹스카운티 등기소에 보관돼 있는 1984 119일 문서 ‘DECLATION OF TRUST, - 1105 MASSACHUSETTS AVE APT, 3D TRUST’ 에 따르면 [이하 ‘3D 신탁 선언서라 하겠습니다]  이 콘도의 소유주는 3D 신탁으로, 3D 신탁의 수혜자는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신탁재산의 관리자로는 김 전수석의 동생인 김병표씨를 선임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이문서의 조항 2에는 김병국이 사망할 경우 (배우자등이 아닌) 김상기-김종숙[김전수석 부모,한국등기부확인결과 모친 본래 성은 ’] 이 동일 지분을 가진 수혜자가 된다고 명시, 인촌의 아들 김상기씨가 이 부동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105 3d trust -

 

3D 신탁선언서는 신탁재산관리인인 김병표씨가 작성, 등기한 공증문서로 전문과 10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전문에는 나 김병표가 이 3D trust의 신탁재산관리자로 토지, 건물, 모기지등 모든 것을 관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항1 [ARTICLE 1] 에는 트러스트의 정식명칭이 기재돼 있습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조항 2트러스트의 원금과 수익등은 김병국이 수혜자다, 김병국은 개인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명시한뒤 만약 수혜자[김병국을 가리킴]가 사망하면 김상기와 김종숙이 동일 지분을 가진 수혜자가 되며 개인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또 조항 8에서 신탁재산관리자가 사망, 사임, 수임능력을 상실할 경우 000변호사가 관리인자격을 승계하게 된다고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조항 2 즉 김병국 사망시 김상기 김종숙이 수혜자가 된다는 조항은 변경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조항 10에서도 신탁선언서를 신탁재산관리자가 합리적 판단하에 수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경우에도 김병국 사망시 김상기 김종숙이 수혜자가 된다는 상기 2번 조항은 바꿀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1105 8b trust -
1105 10 e trust -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김병국 전수석등이 보스턴에서 구입한 5채의 부동산중 1105 매사추세츠 애비뉴 콘도 3채의 부동산에서 동일한 신탁재산 선언서가 발견됐으며 이로 미뤄 5채 모두 이 같은 신탁재산 관련 문서가 작성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따라 결국 인촌 김성수의 아들인 김상기씨가 이 부동산 매입에 적극 개입된 것이 드러난 셈입니다

 

작은 미소님이 이메일을 통해 신탁재산으로 관리된 것이라며 신탁재산 선언서등을 찾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충고함에 따라 신탁재산 선언서를 찾게 됐습니다

신탁재산에 대한 작은 미소님의 상세한 설명, 충고와 조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Loading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 본격화됐다. 그것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었다.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딸·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사위등은 LA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 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그의 사위는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브루버드에 당시 돈으로 3,000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이것을 한국교포들에게 세를 놓았다.

  당시 교포들 사이에 “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하는 소문이 나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해외 재산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그는 빌딩을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70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락은 그 해 12월 정보 무경험자인 사위를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아들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Loading

이후락03-단독보도 이후락 금고지기 은행지점장 출신 S씨 실종미스터리

2008.07.23 16:13 | 정보&관심 | 진의꿈

http://kr.blog.yahoo.com/yyba21/1359068 주소복사

단독보도 이후락 금고지기 은행지점장 출신 S씨 실종 미스터리

‘돈세탁 의혹’ 누가 거짓 사망신고 했나?

▣ 글 윤지환 기자 jjh@ilyoseoul.co.kr

2008-07-01 10:46:38

지난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막대한 비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일요서울은 지난 호<7월 3일자 739호>를 통해 전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지점장이었던 S씨가 이 전 부장 비자금 조성 의혹의 핵심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후 일요서울은 S씨의 행방을 추적했다. S씨가 이 비자금 의혹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확인결과 S씨는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증명서를 살펴보면 S씨는 1997년 10월 16일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렇게 되면 직계 가족 등을 통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잃지 않은 이 전 부장이 과거에 비자금을 얼마나 어떻게 빼돌렸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진다.

그러나 S씨의 부인인 O씨는 남편이 아직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 그 내막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O씨가 상당한 근거를 통해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 부장의 막대한 비자금을 둘러싸고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검은 커넥션. 그 실체를 가리고 있는 흑막을 들춰보았다.

S씨는 60년대 후반 전 상업은행 울산지점장을 거친 뒤 70년대 초 같은 은행 종로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S씨의 부인인 O씨는 “남편은 전북이 고향이다. 그 지역에서 은행에 입사했다”며 “당시엔 일반적으로 은행지점장은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울산으로 발령이 나서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인 O씨도 모른채 누군가에 의해 접수된 S씨 사망신고서 사본(왼쪽). 지인 결혼식장에 나타나 방명록에 이름과 부조금을 적었다. (오른쪽)


S씨 막대한 재산 빼돌려

S씨가 본격적으로 수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울산지점장이 되고 나서 부터다. 알 수 없는 어음을 수도 없이 발행하고 부동산을 사들이는데 열을 올렸다. 생활도 방탕해졌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나중에는 거의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O씨는 전했다.

O씨는 “그렇다고 집에 돈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니었다”며 “나는 약국을 운영하며 혼자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일수놀이와 부동산 투자를 통해 재산을 조금 모았는데 남편은 이것 중 일부를 빼앗아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S씨가 울산지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주로 이 전 부장의 재산증식과 비자금 조성 업무를 도맡아 한 것 같다고 O씨는 말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O씨는 이 전 부장의 전 운전기사로 실질적 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박모씨와 S씨와의 미스터리한 커넥션을 들었다.

O씨는 “남편은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의 호사스런 생활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주변인들로부터 남편의 재산이 서울 부동산 투자에 쓰였다는 소릴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박씨가 소유한 강남의 빌딩들 중 일부는 남편으로부터 매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O씨는 이 과정에서 남편이 O씨의 재산까지 몰래 팔아치웠다고 분개했다.

 

O씨는 “남편이 자신의 재산만 팔아치웠다면 지금 와서 내가 문제 삼을 게 없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애써 모은 재산까지 다른 사람에게 불법적으로 팔아넘겼다”며 “강남의 OO빌딩과 △△빌딩이 서 있는 땅 등은 분명한 내 재산이다. 내가 약국을 운영하며 재테크를 위해 사 놓은 땅을 남편이 나 몰래 팔아치웠다. 내 인감도장도 없고 내가 쓴 계약서도 한 장 없다”말했다.

O씨는 “나는 이 사실을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됐다”며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내 땅을 사들인 사람이 누구인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계약서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다녔다”고 그 동안의 조사내용을 설명했다.

O씨는 이렇게 조사하는 동안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됐다. S씨가 특정인 한 명에게만 부동산을 팔았으며 그 매입자는 다름 아닌 박씨였던 것이다.

박씨는 70년 초반과 중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강남땅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는 이 전 부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권세를 떨치고 있었고 S씨가 서울 종로지점장으로 근무할 때다.

O씨는 “박씨와 전화연결이 된 적 있어 내 땅을 어떻게 소유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씨는 S씨로부터 정당하게 매입한 땅이라고 주장했다”며 “이에 내가 ‘어떻게 내 땅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냐. 그렇다면 그 계약서를 보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사본을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연락이 완전 두절됐다”고 말했다.

O씨에 따르면 이 전 부장의 집을 방문한 직후 박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홀연히 사라진 S씨 어디로?

S씨는 언제부턴가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O씨는 몇 번이고 서류상으로 부부관계를 정리하려 했으나 주변 친지들의 만류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만 S씨에 대한 소문은 계속 듣고 있었다. 1977년 은행에서 퇴직한 S씨는 상당한 호사를 누렸다고 O씨는 말했다.

수 년 전 O씨는 남편에 대한 소식 하나를 접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식은 남편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장례식은 없었다. O씨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땐 이미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묘소가 만들어진 후였다.

O씨는 남편이 묻혔다는 묘소를 찾아가 보았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묘소가 있다는 선산에 찾아 갔지만 어떤 묘소가 남편의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는 이들과 사망신고 증명인들의 말이 달라 어떤 게 진짜 남편의 묘소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자녀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들도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자녀들은 아예 아버지의 죽음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이에 남편의 시신을 매장했다는 이들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었다. O씨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 사망증명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증명서엔 S씨가 전북 정읍 ○○면에 위치한 집에서 1997년 10월 16일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이상한 것은 사망신고 날짜다. 이 해에 사망한 S씨에 대한 사망신고는 2002년 4월에서야 이뤄져있었다. 신고인은 둘째딸인 A씨로 돼 있었다.

S씨와 O씨 사이엔 아들 2명과 딸 3명이 있다. 이들 중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자녀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게 O씨의 주장이다. 그만큼 아버지에 대해 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O씨는 사망신고 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O씨는 “사망신고가 이뤄진 날짜도 실제 사망일과 차이가 많이 나고 A는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며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몰랐다”고 말했다.

O씨는 둘째 아들이 써준 이에 대한 확인서까지 갖고 있었다. 확인서엔 A씨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려준 적 없어 직계 가족으로서 시신확인절차도 시행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O씨는 “나는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도 있다”며 “남편은 재산문제와 관련해 박씨와 이후락씨 그리고 권력층 인사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내 생각엔 어떤 목적을 위해 허위로 사망신고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망 신고는 분명 거짓말


그는 한 장의 복사본 종이를 내밀었다. 그것은 97년 사망한 것으로 돼 있는 S씨가 98년 11월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장에 나타났다는 증거, 즉 방명록이었다. 그 방명록엔 S씨의 이름과 부조금액수가 적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망신고를 한 A씨에게 확인해 보았다.

A씨는 어머니 O씨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A씨는 친자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 험한 말을 쏟아내며 “그 여자는 돈에 미친 사람이다. 오직 돈 밖에 모른다”며 “아버지도 그 여자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여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고 암에 걸리게 해 죽게 만들었다”고 격분한 음성을 토했다.

아버지 S씨의 사망신고에 대해 A씨는 “아버지를 돌봐주던 친척이 사망사실을 알려왔고 그래서 신고했다”며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O씨는 “나는 평생 자식들을 홀로 키우며 버둥거리며 살아왔다. 남편의 도움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내가 남편을 찾아 나선 이유는 사실상 남남임에도 남편임을 내세워 내 재산을 편취한 남편으로부터 내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어떻게 내 땅이 권력층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진실을 가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O씨에 따르면 최근 S씨는 중국에서 목격됐다. 중국에서 S씨를 만난 O씨의 지인은 S씨가 건강하게 중국에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S씨가 팔아치운 O씨의 땅은 종로와 강남 등 노른자위의 땅이다.

그 위에 세워진 빌딩의 시가를 감안하면 그 가격이 수천억 원이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Loading
오늘은 친일파 후손의 미국 부동산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대표적인 친일파로 거론되는 인물중 한명이 바로 민영휘입니다
민영휘는 2차대전당시 일제에 비행기 1대를 헌납한 공로등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로 부터 작위를 받아 귀족생활을 했으며
해방뒤에는 재빠르게 변신해 민족지도자 김규식선생에게 자신의 집인 삼청장을 헌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민영휘는 적자인 형식, 양자인 대식, 천식, 규식등 네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중 네째 아들인 규식은 병순, 병서, 병유등 1남 2녀를 두었고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병서는 일본에 귀화했습니다

이중 병유는 등기부등본등에 의하면 5남매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민병유는 민영휘의 손자인데요 이 민병유가 연세대 교수인 자신의 딸과 함께 뉴욕에서 2채의 콘도를
매입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친일파가 멀리 해외에 까지 부동산을 사들였던 것입니다

민병유는 자신의 딸인 선주씨와 함께 50대 50의 공동지분으로 지난 1989년 3월 17일 미국 뉴욕 맨해튼
200 EAST 61 ST 의 사보이콘도 20A 호를 매입합니다 [아래 계약서 참조]


1415-1989 민병유 매입 계약서 -

사보이콘도는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매입했던 콘도이기도 합니다
김 전수석의 사보이 콘도는 20D 로 바로 같은 층 이웃이었던 셈입니다

매입단가는 44만6천여달러, 당시 38만달러정도의 은행융자를 얻어 실제 투자금은 6만 6천여달러정도였습니다
이과정에서 이들은 서로 위임장을 작성하기도 했으며 이 위임장에 민병유의 주소가 '서울 삼청동 145-20'으로 기록됐고


1415 1989 민병유 사보이콘도 위임장 -

등기부 등본 조회결과 이 주소지는 바로 삼청장이었습니다 [아래 등기부등본 참조]


1415-1092 MINNKYUSIK SAMCHUNG 145-20 -

이들 부녀는 이 콘도를 10년남짓 소유하다 1999년 6월 25일 매도하게 됩니다
매도금액은 74만달러로 두배에 조금 못미치는 약 30만달러정도의 시세차익을 거둘수 있었습니다 [아래 계약서 참조]


1415 1999 민병유 매도 계약서 -

중앙일보가 최근 보도한 해외부동산 취득규정에 의하면 이때는 미국에 2년이상 체류할때
10만달러이하의 주택 1채를 구입할 수 있고 국내로 돌아올때는 팔도록 돼 있었습니다 

실제 투자액수가 6만6천달러정도 였으나 10만달러 이하규정에는 부합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콘도 1채 매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콘도를 구입한 1989년 3울 17일에서 약 보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4월 3일
또 한채의 뉴욕 맨해튼 콘도를 구입합니다

이번에는 민병유의 딸인 민선주씨가 단독소유주가 됩니다 [아래 계약서 참조]


1483 1989 민선주 매입계약서 -

구입한 콘도의 주소는 524 EAST 72 ST 의 24F 호 였습니다
매입가격은 24만5천달러였고 이중 약 18만달러를 은행융자로 충당, 실제 투자액은 6만5천달러정도 였습니다

민선주씨는 이 콘도를 약 6년뒤인 1995년 7월 25일 26만달러에 매도하게 됩니다 [아래 계약서 참조]


1483 1995 민선주 매도 계약서 -

그러니까 1989년 두채의 콘도를 한꺼번에 사들인 것입니다
개별콘도에 대한 실질적 투자금액은 한채당 6만여달러 정도로 정부의 10만달러규정을 넘지 않았지만
두채를 합한 금액은 13만여달러였으며 더구나 미국에 2년이상 체류하더라도 한사람이 한채이상 살 수 없던 규정을
어긴 셈입니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빗나갔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친일파 민영휘가 일제때 축적했던 재산의 일부가
미국땅에 까지 번져 나온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들 일가중 일부가 캘리포니아쪽에 더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민영휘 일가는 자손들 사이에 재산을 둘러싼 소송을 벌이기도 했고
또 민영휘가 친일행적이 드러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 재산조사위원회가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기도 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 조사보고서 제2권에서 민영휘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를 통해
친일행적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습니다 [아래 참조] 


민영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 -

이들 민영휘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고에 환수되자 소송을 제기하는등 재산찾기에 나섰지만
결국은 패소하고 맙니다 [아래 참조]


20081014보도자료_민영휘민상호_후손_패소_위헌심판제청기각_[1] -

한때 이화장, 경교장등과 함께 해방후 3대 정치공간으로 불렸던 민규식 소유의 삼청장도
민규식 사망뒤 민규식의 자녀들인 병순 병서 병유등 3자녀에게 돌아갔다 병유가 2001년 6월 26일
사망함으로써 민선주등에게 대습상속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삼청장도 결국 국고에 환수됐고 올해초 공매를 통해 삼청장의 소유권은 모 유명인사에게
넘어갔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인물이 바로 민규식의 손자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겠습니다

 

* 참고자료 다운로드를 원하실때는 참고자료 화면창 아래 파일명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



Loading

靑 "김병국 수석, 20 미국시민권 포기"

[ 2009-09-15 오후 9:16:08 ]

[CBS정치부 정보보고]

재미 블로거 안치용 씨의 "MB, 미국인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켰나?" 블로그 글 관련 청와대 해명


재미 블로거 안치용 씨의 "MB, 미국인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켰나?" 블로그 글은 사실과 다릅니다.

김병국 전 수석은 1987년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88년 입대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2008년 당시는 미국시민권을 버린지 이미 21년이 넘은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사람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했다는 안 씨의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

2009. 9. 15
청와대 홍보수석실

 

Loading

민족지도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손자인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병국씨는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이명박 정부의 초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선임됐었습니다

앞서 '부동산 신동'으로 알려진 김병국 전 수석이 유학시절 동생과 함께 미국 보스턴에 5채,
뉴욕에 4채등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모두 9채의 부동산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차례로 밝혔었습니다

저는 김전수석의 부동산매입매도 사실을 전하면서 지난주부터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이제 그 자료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지난 1985년 2월 26일 AFFIDAVIT 이라는 문서를  통해
미국정부에 '나는 외국인이 아니다' 라고 진술했습니다

이 문서는 매사추세츠주 미들섹스카운티 클럭오피스 [등기소]에 보관돼 있으며 김병국 전 수석이 제출한 문서입니다

변호사의 공증까지 받은 한 페이지의 이 문서의 제목은 '김병국의 진술서'입니다

1. 나는 1105 매사추세츠주 애비뉴 10E의 주인입니다
2. 나는 외국인이 아닙니다
3. 나의 소셜시큐리티 넘버는 000-00-0000 입니다
4. 나 김병국은 1985년 2월 26일 이 사실을 엄숙히 밝힙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문서에는 문서번호가 뚜렷이 나와있고 접수일시도 표시돼 있습니다
변호사는 자신의 앞에서 증언했다며 서명을 했습니다

김 전수석은 둘째 문장에서 'I AM NOT A FOREIGN PERSON' 나는 외국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KIMBYUNGKOOK AFFIDAVIT SSN DELETE -

변호사의 공증을 받아 미국 정부에 제출한 문서에서 '나는 외국인이 아니다' 이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국정부에 나는 외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미국시민이라는 말로 해석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수석, 그것도 외교와 안보를 다루는 외교안보수석에
미국사람을 임명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해 초여름 대한민국의 그 뜨거운 아스팔트위를 누볐던 수많은 촛불들, 그 촛불시위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였습니다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이명박대통령의 명을 받아
미국으로 가서 쇠고기 수입문제를 최종 조율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사람에게 한국과 미국의 첨예한 이익이 대립된 문제를
한국입장에서 조율하고 해결하도록 했다는 말이 됩니다

미국국적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한장의 문서는 그가 미국국적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국적자가 맡을 수 있는 공직인지, 수임이 불가능한 공직인지 알지 못하니다

과연 미국국적자가 대한민국의 외교와 안보를 책임지고 대통령을 보필하는 자리에 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국민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국민의 한사람인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참고자료 다운로드를 원하실때는 참고자료 화면창 아래 파일명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

Loading

일본 커넥션-박정희 정권과 친한파

 

 

  4 · 19 혁명의 희망을 쿠데타로 무산시킨 박정희.

그의 20년 장기집권 뒤에도 역시 일본 커넥션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 도입 사건이다.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에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핫이슈로 다루어졌다. 의혹은 일본에 4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2배나 높게 받은데서 비롯됐다. 4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 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에 250만 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 더 이상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는 당시 아사히 신문 사회부 기자 오치아이 씨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일본에 정치가와 관료, 기업에 유착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왔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그 돈에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 커미션이란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리베이트 입니다. 저는 취재를 더 진행해서 상사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체이스 맨하탄과 외환은행에 구좌명을 알아보니 이름이 알파벳으로 S.K.KIM 이었습니다. 즉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이 단계에서 일본은 그야말로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130만 달러는 실은 일본 정치가에게 간 것이 아니냐고 모두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에 정치인은 전직 수상은 2명이며 그 중 한명으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한국 그 철도공사 입찰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시 전 수상에게 부탁해서 직접 담판 했습니다. 김형욱 부장이 자신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를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커넥션의 상대역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일본이 대소련 전쟁기지로 건설한 만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41년 부터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역임,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는 성전을 수행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면서도 그는 냉전 돌입에 따른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전략에 고심한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기본적으로 스케일이 큰 정치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느 아시아 전체를 놓고 정치를 폈습니다."

 

함께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반면 기시는 무죄로 풀려난다. 냉전체제로 돌입하면서 미국의 대일정책이 변화된 때문이었다.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기시는 자민당을 창당,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를 이끌어 나간다. 기시 전 수상이 한일관계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5 · 16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실세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국의 건설자 기시 전 수상과 같은 만주 인맥이었다. 61년 11월 이케다 수상과 회담 후 박정희는 도쿄 시내의 한 요정에서

 

『20세기의 리더들』-기시 노부스케 저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당시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시 전 수상에게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지사들의 의지와 같다. 앞으로 새한국 건설을 위해 좋은 의견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기시 전 수상은 박정희의 후원가가 된다. 기시 전 수상이 관여해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것으로 의심받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본 쌀 도입이다. 일본 쌀은 69년부터 3차례에 걸쳐 103만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의회에서 문제가 됐다.

일본 참의원 자료실. 이곳에는 73년 쌀을 둘러싼 일본 국회에서의 논란이 모두 속기록으로 보관돼 있다. 논란의 핵심은 박 정권에 대한 특혜시비였다. 당시 도입 조건은 30년 안에 현물로 상환한다는 거저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박 정권은 그것을 국내가격으로 시중에 판매했고 27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카리 아키라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그 쌀이 일본의 원조미라는 형식으로 한국국민에게 전해졌다면은 뭐 아무 문제가 없죠. 하지만 여수하고 인천, 그리고 포항의 항구에 내려진 일본 쌀들은 그 시점부터 일본의 원조미가 아니라 한국의 보유미로 둔갑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만약 돈이 되면은 당시에 정치 상황 헌법을 개정해서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할 정치자금이 되는 것입니다."

 

103만톤의 쌀은 일본 돈으로 1300억엔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량관리법은 쌀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법률적 근거 없이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수상으로 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 전 수상의 친동생이었다. 기시 전 수상은 일본 국회의 반대를 무마하고 국내법상의 문제를 법 개정으로 해결하면서 박 정권에게 쌀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70년, 기시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등 수교 훈장을 받는다. 그가 이렇게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기시 전 수상은 미국과 같은 노선을 펴서 아시아를 지킨다라는 형태로 일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사고 속에는 언제나 한반도가 들어있었죠. 따라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해 한국을 전위국가로 지원한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속에서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기시 전 수상. 그에게 남한은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는 방파제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극우단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노다 아키히로 당시 공동통신 서울특파원-"반공(反共)에 대해서 우익, 특히 일본 애국당을 비롯한 극우의 단체가 친한파였습니다. 심한 표현으로는 반공을 위해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집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죠. 그렇다면 도대체 친한파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이 희생양이 되어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않겠습니까."

 

80년 당시 일본이 북한 남침설을 제공해 신군부의 집권을 도왔다는 주장 역시 당시 일본이 가졌던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선원 박사 연세대 국제학 연구소-"1980년 4월 24일 미국이 이란에 인질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이후 약 3~4일 동안, 즉 1950년대 이후 서태평양에서 최초로 3~4일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있지않고 중동으로 향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홋카이도에 가까운 북방 4개섬에 소련에 무장력이 급속하게 증진하고 있는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일본으로선 상당히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정치적 안정을 바랬을 것이고 그 정치적 안정을 유도해 내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남침 가능성을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전두환 그룹이 조기에 상황을 정리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해서 이런 의도적인 정보공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본의 안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그가 한국에 올림픽을 양보한 것 역시 한국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카시마 노부요시 오끼나와 유구대학 교수-"올림픽을 한국에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세지마는 한국을 일본이 병합했을 때 발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셔야 됩니다. 즉 이것은 한국이 힘을 갖게되면 일본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일본을 위해서 한국이 그만큼 부담을 나누려면 올림픽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재오 국회의원-"일본에 정치인들은요 딱 밖에 나오면요 여야가 없습니다. 오직 일본국에 자국의 이해입니다. 그거는 일종의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에 근거 있다고도 봐야죠. 과거에 우리가 이런 나라였는데 대동아 공영권에 중심이었는데"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에 일본의 친한파가 적극 나섰던 것도 자국에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차관 제공 20억 달러

대한무역흑자 86억 달러

 

20억 달러의 자본을 빌려준 결과로 12년 동안 86억 달러의 대한무역흑자를 거두어 갔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일본이 경제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그걸 위해서는 한국이나 대만같은 이런 후방기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런 전략을 배경으로 해서 그 당시 한국으로 봐서는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가 들어서고 난 후에 경제를 재건해가지고 혁명을, 그 당시 5 · 16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할려고 하는, 또 그 당시 워낙 가난했으니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는데 일본 돈이 필요로 했던 것이죠.

또 일본은 그 당시가 되면은 이제 말하자면 이제 해외시장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단계. 그러고 그 경제원조는 바로 일본의 이제 수출시장을 넓힐려고 하는 바로 그런 일본 시장의 일본 자본주의의 대팽창의, 전후 새로운 팽창의 일환으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수출 촉진을 위해 박 정권이 70년대 중반에 추진한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상징적인 의미를 던지고 있다.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사실 세지마 류조에게서 아이디어를 받은 것이었다.

 

김도형 연구위원 산업연구원-"종합상사의 경우에는 수출만에 기능을 우리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종합상사가 제대로 건전한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수입에 기능, 또 삼국간 거래에 기능을 무시한 채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그런 하나의 계기도 됐지 않은 점에서 제대로 그 당시 전문가가 있었더라면은 제대로 평가해서 제도를 도입했으면 좋았다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원으로 우리가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지속된 대일경제의존은 현재에 이르러 심각한 경제종속을 낳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가마우지 아시죠. 가마우지는 오리과에 속하는 겁니다만은 목이 길고 가늘고 그렇죠. 거기에 이렇게 쇠줄을 묶어놓으면요 물속에 가마우지가 다른 고기를 먹을려고 들어가면은 고 순간에 쇠줄을 잡아 당기면요 고기를 문 채로 못 넘기고 물고 오죠. 그럼 뺏아서, 입에서 뺏아가지고 집어 넣으면 고기가 잡히는 거죠. 가마우지 낚시법인데 한국이 부품, 소재, 기계 일본서 가져와 가지고 한국에 저임금 노동하고 결합해서 그걸 미국에다 수출해가지고 돈 번 것을 다시 그 돈을 일본 다 갖다주죠. 일본서 또 부품, 소재 가져와가지고 또 만들어가지고 또 미국에 수출해서 그 돈 또 일본 다 갖다주죠. 우리가 지난 65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35년간 한국이 가마우지 노릇을 했는데"

 

물론 쿠데타 정권과 일본의 관계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든지 대일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일외교는 '검은 유착' 또는 '커넥션' 이라는 말로 일본인들 사이에 불리고 있다는 점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김중배 상임대표 언론개혁 시민연대-"이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 그러고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일본)한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대일무역적자라는 것은 거의 우리가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숙제로 지금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대단히 멸시하게 하는 이런 요인이 내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러고 우리 사회적인 여러가지 상황들 이런 것이 그리고 또 당당한, 아니 당당히 못한 지도자들에 대응"

 

강창일 교수 배재대학교 세계지역학부-"결과적으론 겉으로는 반일감정을 선동하면서 속으로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리도 국민을 위한 실리가 아니라 자기 그 정치집단 어느 세력에 경제적 실리 혹은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런 것들이 곧 한국인에 일본인식, 제대로 된 일본인식 같은 걸 큰 장애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죠."

 

쿠데타 정권에 일본 커넥션에 관여했던, 혹은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취재를 거부했다. 따라서 대부분에 사실들은 일본 쪽에 증언에 의해 밝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권에 지지와 국가에 안전을 일본에 의존했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우리는 왜 아직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

2000년 8월 6일 자 방송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본 커넥션-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편에서 발췌

----------------------------------------------------------

 

우리는 미국 문서를 분석하는 가운데 한일협정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 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미 중앙정보국

 

1966년 CIA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당시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에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액수는 1백만-2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6개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1백만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히고 있다.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으며,

 

 

당시 박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도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 또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권을 갖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5,000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 돈을 줬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런 사실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CIA 보고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 있다. well founded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신뢰도에 대해 미국인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Rob 교수/한국외국어대 영어교육과-well founded 의 의미는 근거가 있고 신용할만하며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 문장에 통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6,600만 달러라는 숫자, 6개 회사가 총 6,600만 달러를, 각각 1백만불부터 2천만불씩 지불했다는 것" 거기에는 특정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CIA 문건과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또 다른 미 국무성 문서를 입수했다.

 

국무성 전문

1964년 5월 20일

발신 : 서울

비밀

 

1964년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이다.

 

그는(박정희) 김종필을 당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왜 미리 그를 제외시키지 않았냐고 물었다.

 

문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버거 미 대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첫째는 오노(자민당 부총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오노는 김종필이 제거된다면 일본과의 협정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후 둘에 대화과정에서 박정희는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오노가 김종필이 제외되면 한일협정 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 제외시키지 못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

2004년 8월 15일 자 방송 KBS 일요스페셜-'[최초공개!] 베일 속의 한일협정, 문서 한일 양국은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 편에서 발췌

 

안티 박정희 카페매니저 상생러브 (http://cafe.naver.com/anti516park.cafe)

Loading

고위공직자 병역확인 바로 여기 http://www.mma.go.kr/kor/s_news/release/release03/index.html
Loading

정운찬 총리 후보자의 병역 면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중 상당수도 군대를 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세계일보가 12일 보도했다. 대부분 질병 등 적법한 사유로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입영을 고의로 기피하다가 정 후보자의 경우처럼 ‘고령’으로 면제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 신문이 병무청 홈페이지의 ‘공직자 병역사항 공개’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정부에선 정 후보자와 국정원장 등 장·차관급 인사 117명(여성 7명 제외·신임 장관 후보자 포함) 중 11.9%인 14명이, 국회의원 247명(여성의원 40명 제외) 중엔 5명당 1명 꼴인 45명(18.2%)이 군대를 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만의 환경,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장기 대기’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이 장관은 질병과 생계곤란을 이유로 두 차례 입영 기일을 연기한 끝에 보충역으로 분류돼 소집 면제됐다. 정 장관은 첫 신검에서 갑종을 받았지만 이후 재검을 받아 2을종으로, 또 입영 후 1을종을 받아 귀가한 뒤 보충역 판정을 받아 면제됐다.

성대경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은 한 차례 입영했다가 질병으로 귀가한 뒤 다시 징집되지 않아 ‘고령’으로 면제를 받았다. 정광수 산림청장과 정진철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은 질병으로, 윤여표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은 ‘생계곤란’을 사유로 면제받았다.

국회의원 중에선 45명이 군대를 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면제 사유로는 질병이 25명으로 가장 많았다. 민주화운동 등으로 인한 수형도 10명이나 됐다. 특히 정 후보자와 마찬가지로 ‘고령’을 이유로 면제된 의원은 4명으로, 이 중 3명이 고의로 병역을 회피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징병검사를 기피하거나 입영 기피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번 끝에 고령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민주당 김충조, 강봉균 의원 역시 입영통지서를 받고도 입영하지 않다가 고령으로 면제됐다.

병무청 관계자는 “일부 공직자 병역사항에 나타난 ‘입영 기피’는 말 그대로 고의로 병역을 회피하려 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체중미달(한나라당 윤영) 등으로 면제 판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