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택시를 탔다.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번지’ 이재오 특임장관 자택의 주소를 택시 운전사에게 얘기해 내비게이션으로 위치를 찾았다. 광화문에서 30여분이 걸렸다. 5층 정도의 빌라가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가에서 23평짜리 단층 주택을 찾는 데는 꽤나 애를 먹었다. 택시로 골목을 헤집고 다닌 끝에 구석진 곳의 대문에서 ‘이재오’라고 적힌 문패를 찾아냈다.
원본출처 주간조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8/2010090801400.html
초인종을 누르자 60대 초반의 여성이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문을 여는 장치가 고장이 났어요. 수리를 해야 하는데 못했거든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재오 특임장관의 부인 추영례(61)씨였다. 추씨는 푸근하고 친근한 인상이었고, 약간 작은 키였다. 기자는 이날 추씨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집안에 들어서자 좁은 거실에 3인용 소파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유난히 커 보였다. 상상할 수 있었던 ‘정권 실세의 집’과는 딴판이었다. 추씨는 저축한 돈 850만원에 대출금 2000만원을 보태 24년 전인 1986년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한다.
부산 출신인 추씨는 “1940년대 일본에 노역 나갔다가 만난 양가 부친의 소개로 이 장관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 장관을 처음 만난 2년 뒤인 1971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시집을 왔고 민주화운동, 투옥, 선거 등 순탄치 않은 이 장관의 지난 40년을 뒷바라지했다. “결혼 전에 이재오 의원은 대학원(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니면서 하숙을 하고 있었어요. 시어머니는 결혼을 빨리 해야 정착을 한다면서 혼사를 서둘렀고 남편도 결혼하자고 열심히 저를 꼬셨죠. 그런데 결혼은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죠. 신혼여행지에서 남편이 연행돼 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결코 범상치 않은 얘기를 ‘다 지난 일’이라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하는 추씨는 남편을 ‘이재오 의원’이라고 불렀다. 신혼여행지에서 남편이 정보과 형사에게 연행되면서 시작된 남편의 옥바라지는 자녀 셋을 낳고도 몇 년 동안 더 이어졌다.
은평구서 40년… ‘은평의 대표 아줌마’
은평 지역에선 추씨도 이 장관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결혼 후 줄곧 은평구에 거주해온 그는 지역 내에서 봉사활동가로 상당히 이름이 났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은평의 대표 아줌마’로 알려져 있다. 1990년에는 은평 지역의 문화와 맥을 잇자는 취지에서 ‘은맥여성문화센터’를 세워 20년째 운영하고 있다. 은맥여성문화센터는 영어회화, 댄스스포츠 등의 강좌를 개설해 지역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탄생의 최대 공신인 이 장관은 ‘2인자’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지난 18대 총선에서 낙선하며 정치 인생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17대 대선에 출마했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전 대표에게 일격을 당한 것이다. 추씨에게도 당시 남편의 낙선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재오 의원이 대선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역할을 했잖아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18대 총선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봤어요. 그런데 지역을 비워둔 시간이 너무 컸었나 봐요. 낙선을 하고 나서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2008년 4월부터 약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장관은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집권여당의 권력 투쟁이 불거질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 논란의 중심 인물로 구설에 시달렸다. 특히 친이계와 친박계의 충돌 양상이 조명을 받을 때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로 묘사되며 대통령 측근으로서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미국으로 떠나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그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15대 국회에 처음 입성한 이후 큰 굴곡을 경험하지 않았던 이 장관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외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난 7·28 재보궐 선거에서 중앙당의 ‘지원 사격’도 마다한 채 홀로 선거를 치러 낙승했다.
낙선 후 미국행 독려한 ‘정치적 동지’
이런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역시 부인 추씨다. 추씨는 국회의원에 낙선한 남편의 미국행(行)을 독려했고 재보궐 선거 전략도 함께 고민하는 ‘정치적 동지’였다.
“남편은 늘 당당한 사람이에요.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 특별한 배경도 없이 정치인의 길을 스스로 잘 개척해 왔죠. 그럼에도 매스컴에서 대통령의 측근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한 사람으로 비쳐지는 걸 본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늘 당당한 남편의 모습이 오만하고 한편으론 건방진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죠. 그때도 지금처럼 고개를 숙였다면 아마 선거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아요.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했던 거죠.”
이 장관은 2008년 5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워싱턴DC에 있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에 적을 뒀다. 낙선의 아픔과 그 뒤 해외에 머문 1년간의 생활은 그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장관의 변신은 7·28 재보궐 선거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지난 18대 총선 당시 ‘실세 이재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선거 운동 콘셉트도 과거 ‘경상도 사나이’의 터프한 자신감보다 스스로 몸을 낮추고 발로 뛰는 전략을 구사했다.
추씨는 “남편이 미국이라는 곳에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보고 다른 세계도 경험하고 나서 다시 지역구에 돌아오니까, 이곳이 너무나 소중하단 걸 느낀 것 같아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거죠. 이런 모습이 끝까지 지켜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합니다”라고 했다. 이 장관은 요즘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자주 언론에 등장한다. 재보궐 선거를 치르면서 몸에 익힌 ‘낮은 자세’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나름의 의지다.
이 장관의 선거 전략을 ‘남성적’ 카리스마에서 부드러운 ‘여성적’ 섬세함으로 바꾼 배경에는 부인의 조언이 큰 몫을 했다. “이번 선거에서 정말 남편이 제 얘기를 많이 수용해줘서 고마웠어요. 이 양반은 경상도 사람이라 손을 들고 ‘어이 잘 있었나’ 하는 게 인사인 줄 알아요. 물론 친근감을 표현한다고 하는 거죠. 그러나 지역에선 그걸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를 해줬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고개를 숙이고 존경하는 자세로 주민을 대하라고 했어요.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 곁에 가면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뒤 인사를 하라고도 했고요. 그럴 때면 그이가 ‘아, 예 사모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면서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생활비 문제로 처음 부부싸움
추씨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바느질 솜씨가 남다르다고 자랑했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시집온 뒤 10여년간 남편 옥바라지를 하면서 생계는 모두 그의 몫이었다. 당시 가사일을 도와주고 생활비까지 대주시던 친정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불가피하게 선택한 직업이 바로 동네 의상실이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는데 제가 할 줄 아는 일이 없었어요. 엄마에게 의존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해서 돈을 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때죠.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닥치니까 뭐든 하게 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는 치매가 와서 상황이 더 어려웠죠. 우선 동네 한복 의상실에서 일을 배우기로 했어요. 나중에는 자신감이 생겨서 ‘고전 의상실’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조그맣게 가게를 냈어요. 그때 제가 만든 ‘깨끼옷’은 정말 인기가 좋았어요.”
‘고전 의상실’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이 장관의 가족은 늘 감시를 받았고 사람들은 접근을 꺼려했다. 추씨는 그래서 주문을 받은 옷을 직접 손님들에게 배달까지 해야 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도 당시 한 말에 9800원 하던 쌀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라면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데, 세 명의 아이들과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연탄이 없어서 이웃집에서 내놓은 타다 만 연탄을 가져다 때던 때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참 행복한 겁니다.”
추씨는 이 장관이 출소할 때까지 5년간 의상실을 운영해 1000만원 정도를 모았고 여기에 400만원 정도의 대출을 받아 처음으로 구산동에 집을 장만했다. 추씨는 지금도 만원짜리 지폐 한 장만 손에 쥐어도 돈의 귀중함이 되새겨진다고 했다. 추씨의 손재주를 닮아서일까. 장녀 이고은(38)씨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둘째딸 이은별(37)씨는 여성지 ‘우먼센스’에서 생활파트를 담당하던 기자 출신이다. 둘째 사위는 삼성전자에 근무하고 있다. 외아들 민호(27)씨는 현재 대학생이다.
추씨는 지독하게 고생했을 때도 남편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 국가를 위해 누군가는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원수 같다는 생각을 그때는 왜 안했는지 모르겠어요. 신혼 때는 그이가 감옥을 들락날락할 때니까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안쓰럽고 애틋했어요. 철이 없었을 나이여서 그런지도 모르죠. 남편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아마 조금 더 나이를 먹고 결혼했다면 이해타산도 따지고 했을 겁니다.”
이 장관은 1970년대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며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했다. 1차 투옥(1973~1974년)을 시작으로 2차(1977~ 1978년), 3차(1979년), 4차(1979~1983년)까지 숱한 옥살이를 했다. 출소했을 때는 교편도 잡고 학원에서 강의도 했지만 빠듯한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에 뛰어들어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장관은 금배지를 단 후에도 부인에게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참다 못한 추씨도 1996년경 남편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저희 부부는 정말 싸울 시간조차 없었어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한번 크게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어요. 전세비가 얼마인지도 몰랐고 남편은 제게 급여명세서 한번 보여준 적이 없어요. 의정생활을 하는데 다른 수입이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너무 속이 상하는 거예요. 그 뒤로는 생활비를 하라면서 100만~200만원 정도를 줬어요. 그 돈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자녀 셋을 키웠는데, 아껴쓰니까 되더라고요.”
“장점은 성실함… 정치인으로는 만점”
추씨는 남편의 장점으로 성실함을 꼽았다. 이 장관은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대문으로 나가 신문을 가져와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선거가 있으면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7·28 재보궐 선거 당시 네 시간을 자면 이기고 다섯 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4당5락’을 부인에게 강요하기도 했단다. 이 장관은 부인이 끓여주는 된장찌개와 고등어 튀김을 즐겨 먹는다. 아침을 먹고 이 장관이 출근을 위해 지하철로 발길을 옮기는 시간은 새벽 6시가 조금 지나서다. “남편은 아내인 제가 봐도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에요. 운도 많이 따라주는 것 같아요. 피곤하면 조금 쉴 법도 한데 매일 똑같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요. 자기 일에는 철저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좀 무뚝뚝한 아버지죠.”
추씨는 2007년 대선 당시 매일 남편과 함께 들이닥친 정치권 인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느라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 이 기간 동안 100명 정도가 자택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남편으로서 이 장관에게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고 했다. “남편으로서 점수를 주자면 한 70점 정도.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평가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90점 이상을 주고 싶어요.” 딸들이 출가하고 나서 아들 민호씨에게 내주기로 했던 사랑방은 2년 전에 “나도 이제 내 방 좀 한번 가져보자”며 욕심을 낸 이 장관의 차지가 됐다.
이 장관은 지난 재보궐 선거에서 낙선할 경우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귀향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도록 기도를 한 적은 있지만 남편의 당선을 간절하게 기도한 건 이번 재보궐선거가 처음이에요. 어느날 남편이 시골 형수님께 전화를 해서 ‘방을 좀 치워 놓으시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떨어지면 낙향을 하겠다는 거예요. 은평구는 제 삶의 애환이 담긴 터전이에요. 전 솔직히 국회의원 마누라라고 폼 한번 잡아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40년간 정열을 쏟아온 우리 동네에서 떠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남편은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요. 정말 시골로 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특임장관 되는 것 반대했다”
추씨는 요즘 남편에게 ‘한 템포 늦은’ 정치를 자주 언급한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들보다 한발 늦게 가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조언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여러모로 배경이 없이 출발했기 때문에 앞만 보고 왔어요. 하지만 이젠 그러지 말고 주변을 보고 늦더라도 함께 같이 가는 사람으로 비쳐지길 바랍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본인도 많은 걸 배웠을 거예요. 욕심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움직이면 좋겠어요.”
이 장관이 박근혜 전 대표와 대립하는 걸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재오 의원은 집에 오면 박근혜 전 대표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우리 애들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 은근히 손해를 봐요. 모범이 돼야 한다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박 전 대표는 오죽했겠어요. 지난번에 선거 과정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으신 적이 있잖아요. 그때도 남편이 박 대표를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지난번에는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도 찾아갔었어요. 제 남편은 누구와 적이 될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닌데….”
그는 이번에 남편이 장관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역구 관리 소홀 문제였다. 그래서 당선 이후에는 무엇보다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추씨의 생각이었다. 이 장관도 처음에는 장관직을 고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추씨는 지난 8월 8일 지역구 소재 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예배를 보다가 기자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순간에야 ‘장관에 내정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고 한다.
이 장관은 4선 국회의원이다. 정치적인 중량감이 더 커지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정치권에선 이 장관을 두고 차기 대권주자 가능성을 언급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추씨는 이런 분석을 경계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주변에서 남편이 실세다 어쩌다 하면서 총선에선 당연히 당선되고 이후 큰 정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많이 했죠. 근데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가요. 내가 뭔가 하려고 한다고 해서 다 되지 않아요. 남편도 그런 건 염두에 두지 않고 있어요. 이제는 묵묵히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래서 특임장관도 생각하지 않았던 건데, 결과는 조금 달랐죠.”
추씨는 구산동 자택에서 종로에 나올 때면 종종 청와대 앞길을 거쳐간다고 했다. 과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요즘은 저곳에서 남편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그는 “두 분이 저 공간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추씨는 남편이 15대 국회에 처음 등원할 때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태워다 준 일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