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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에 해당되는 글 53건

  1. 2010.07.25 전두환, 졸개들 끌고 윤필용 빈소 방문
  2. 2009.11.23 '이후락, CIA 스파이로 박정희 감시했다' - 펌
  3. 2009.11.19 이후락 장남 부부, 법인 다수 설립 부동산 매매
  4. 2009.11.16 이후락 장남 부부도 부동산 다수 매입 -재산환수직후 매입 급증
  5. 2009.11.15 이후락 외동딸 부부, 맨해튼-엣지워터-플러싱도 매입
  6. 2009.11.12 이후락 외동딸 부부, 86년 2건 매입, 2건 매도
  7. 2009.11.11 이후락 외동딸 부부 : 사위 정화섭, 장남 이동진과 백60만달러 부동산 매입 (3)
  8. 2009.11.08 이후락 외동딸 부부 - 1980년에만 부동산 4건 매입
  9. 2009.11.05 이후락 외동딸 부부, 75년 첫 구입 - 부정축재 환수당한 80년부터 급증
  10. 2009.11.04 김형욱 외동딸, '큰 오빠 정한도 유언장 존재사실 알았다' 법정 진술 (2)
  11. 2009.11.04 김형욱 며느리, '유언장 존재 사실 몰랐다' 법정 진술
  12. 2009.11.03 '김형욱에게 돈 빌려준 사람 다 나오시오' 채권자신고 광고
  13. 2009.11.01 이후락 사위명의 부동산관련서류 버겐카운티만 백3건
  14. 2009.11.01 이후락 장남 이동진-서옥로 부부도 1980년 하와이 콘도 매입
  15. 2009.10.31 이후락 사망- 직계가족 미국부동산 '상상초월' 최소 3천만달러 상회 (12)
  16. 2009.09.20 김형욱 전 중정부장 여기 잠들다 - 실종 30년만에 뉴저지서 발견 (28)
  17. 2009.09.13 박정희·정일권·김종필 등 대부분 실명 거론… 기록적 가치 뛰어나-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김보애 [펌] (1)
  18. 2009.09.13 이후락이 냉면 그릇 뒤집어엎다 -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내 운명의 별 김진규' [펌]
  19. 2009.09.13 이후락 비자금 내막 - 비자금 조성 방법 (3)
  20. 2009.09.13 강남 5000억원대[5천억원대] 땅 주인은 누구? 이후락 비자금 ?
  21. 2009.09.07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10
  22. 2009.09.07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9
  23. 2009.09.07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8
  24. 2009.09.07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7 (2)
  25. 2009.09.07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6
  26. 2009.09.05 日서 김대중 납치 영화 'KT'케이티 추모상영
  27. 2009.09.05 김대중 납치사건과 자위대 그리고 영화 'KT' (1)
  28. 2009.09.05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5
  29. 2009.09.05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4
  30. 2009.09.05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 3
핫이슈 언론보도2010.07.2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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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주역들이 윤필용(83)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빈소에 줄줄이 조문했다. 윤 전 사령관은 ‘1970년대 초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원본출처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26/2010072600547.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2

전두환 전 대통령은 25일 오후 4시 30여명의 일행과 함께 윤 전 장관의 빈소가 있는 삼성서울병원에 도착했다. 전 전 대통령(육사11기)은 육사 3기 선배인 고인(육사 8기)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은 고인의 후원을 받아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며 권부의 핵심에 다가갔다.

전 전 대통령은 접객실에서 25분간 머물며 담소를 나눴다. 전 전 대통령은 오랜만에 만난 다른 추모객에게 “이름이 뭐지? 세월이 너무 흘러서 모르겠네”라며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빈소를 떠나며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넸다.

5공화국 핵심 인사들인 장세동·이상연 전 안기부장, 최세창·이기백·이종구 전 국방장관, 이상희 전 내무장관, 염보현 전 서울시장 등도 전 전 대통령을 수행해 빈소에 들렀다.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와 박준병 전 민정당 사무총장 등 다른 5공 핵심 인사들은 이미 오전에 다녀갔다.

최근 건강이 악화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제외한 신군부 핵심인사 대부분이 들른 셈이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조화를 보내왔다.

이밖에도 민주당 정세균 대표, 김태영 국방장관,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 한나라당 원희룡 사무총장, 구자열 LS전선 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보내온 조화 80여 개가 빈소에서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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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이 아직 살아 있었나?”

10월31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를 떠난 뒤 그는 30년 가까이 거의 뉴스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칩거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아직 신군부의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던 1984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의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여류 수필가를 만나러 갔다 그곳에 들른 이후락 씨와 합석하게 되었던 일이 있다. 여류 수필가는 그에게 술을 따르며 평양 방문 때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갖고 갔던 일을 찬탄하면서 “대체 그 독약을 어디에 숨기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후락 씨는 자신의 어금니 가운데 의치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청산가리를 숨겼다고 했다.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다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내가 그날 들은 이야기는 분명 의치 속에 숨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저 양반이 김종필 씨나 누구처럼 보직의 하나로 그냥 정보부장을 했던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09년 11월1일, 미국 에 실린 그의 사망 기사를 보니 이름 앞에 ‘전 남한 스파이 총책(Former South Korean spy chief)’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물론 그 표현은 ‘중앙정보부장’을 풀어 쓴 것이겠지만, 나는 이 미국 신문이 이후락 씨의 실체를 제대로 꿰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이후락 씨는 원래부터 첩보원과 무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공식 기록을 보면 이후락 씨는 1924년생이다. 그리고 만 21세 되던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미 군정이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문을 열었던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에게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반년 정도 이수하게 해서 한국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던 일종의 세탁용 단기코스 같은 것이었다. 1기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전원이 해방 전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장교들로 적어도 23∼24세가 넘은 나이들이었다.

그런데 이후락 씨는 21세의 나이에 일정 코스를 거치고 임관까지 되어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미스터리다. 그래서 군사영어학교 1기로 뒤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김정렬 씨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가 미군과 거래하려면 첫째는 영어를 구사해야 했을 것이고, 둘째는 미군과 거래할 만한 무슨 내용을 갖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울산공립농업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가 갑자기 영어를 구사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1980년대 초 한국의 군사관계 기사를 많이 쓰던 한 일본인 기자가 내게 이후락 씨가 일본에서 ‘나카노(中野)학교’를 다녔다는 설을 들려준 일이 있다. 진짜 나카노학교 출신들은 자신이 그곳 출신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니 이 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이후락 씨의 미스터리에 대한 의문점이 대번에 풀린다. 나카노학교란 일본 육군성이 1938년 문을 연 첩보원 양성학교로 외국어는 첩보원이 활동할 지역에 따라 영어·러시아어·중국어 중 하나를 집중 공부했는데, 72시간 잠을 안 재우는 논스톱 방식의 강훈련으로 반 년 정도면 회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5년제 농업학교 출신의 이후락 씨가 해방되던 해부터 영어를 구사했던 배경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1970년 2월20일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나카노학교에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나카노학교는 일본 육사나 예비사관학교가 중심이고 그 밖에 교도(敎導)학교 등 일본 육군이 관리하던 각종학교 재학생들 가운데 머리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기자든 정치인이든 미국대사든 이구동성으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영민한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8년 동안 나카노학교의 졸업생은 모두 2131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락 씨의 경우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있던 육군항공정비학교에 진학했던 기록이 있다. 그곳에 다니다 학교장의 추천을 얻어 나카노학교에 선발된 것 아닌가 추측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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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연락책

해방되기 전 나카노학교 출신들이 해방 후 조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군사령부에 투입된 것은 마루사키 요시오(丸岐義男) 소좌를 우두머리로 한 육군 소위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총독부 경찰의 경부나 경부보 또는 순사부장 등으로 위장해 지금의 중부경찰서인 본정서(本町署)와 일본 군속이 많이 살던 용산의 용산서(龍山署)에 집중배치됐다.

이후락 씨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2월 초 이들 나카노 출신 일본군 첩보장교들이 모두 귀국길에 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이후락 씨는 미 군정청이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진주미군의 G-2나 방첩대(CIC) 등의 정보기관은 방공망 구축과 조선 통치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총독부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대 등과 밀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락 씨의 학력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그를 반겼다.

군사영어학교 입학 5개월 만인 1946년 3월23일 그는 22세의 나이에 대위로 임관된다. 당시 미군이 그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준 것은 김정렬 씨의 증언처럼 그가 대위라고 우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정보 일을 맡기기 위해 그런 계급장을 달아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김정렬 씨가 언급한 ‘미군 측과의 거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군이 그를 밀어주는 대신 그는 미군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의 보직은 때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정보계통에 머무른다. 임관 2년 만인 1948년 육본 정보국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1949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 1950년에는 육군참모총장 정보보좌관, 1951년 육본 정보부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그는 계속 정보계통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취득한 정보를 처음에는 미 제24군단 G-2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CIA에 제공했다. 그 후 주미한국대사관 무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는데, 이때 미국 CIA의 정식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귀국 후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CIA 연락책이 되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배경이 CIA였기 때문에 그는 4·19혁명이 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좌천되지 않았다. 4·19혁명 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그는 장면 총리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국무총리 안보비서관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있다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추천되었는데, 이 일에 대해 당시 장면 총리의 비서였던 선우종원(鮮于宗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고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에서 그를 민 것 같다.”

그 무렵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락 씨는 부패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의 옆방에 수감되었던 훗날의 국회의장 박준규 씨는 이런 말을 했다.“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

처신이 약삭빨라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CIA의 중재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미국 CIA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고…”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CIA는 그 적격자로 이후락 씨를 지목했다. 이에 당시 군사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씨가 그를 출옥시켜 <대한공론사> 사장 자리에 앉혔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힌다. CIA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의장의 입장에서는 CIA의 백업을 받는 이후락 씨를 이용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락 공보실장은 이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점차 박정희 의장의 신임을 얻는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글 강준식 작가 [arumdhaun@hanmail.net]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11/23/3547519.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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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장남 이동진 - 옥로 부부는 여러 법인을 설립, 자신들의 부동산을 법인으로 이전하는등
활발한 부동산 거래를 합니다

이후락 장남부부는 1981년 1월 7일 각각 16만5천달러에 매입했던 알파인 나대지 2필지를
1983년 5월 3일 22만달러에, 또 1983년 5월 18일 21만달러에 각각 매도합니다

또 자신들이 크레스킬에 매입해 뒀던 부지 2필지도 매도합니다
이 크레스킬 땅은 이 부부가 언제 매입했는지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 땅을 매도할때 이들 부부가 주인인 것이 드러납니다

크레스킬 부지 2필지는 1985년 3월 8일 각각 15만달러에 매도됩니다
이중 한 필지는 우리도 잘 아는 공직자 겸 정치인에게 팔렸습니다

이들 부부는 뉴저지 포트리 블록 4101 랏 35 부동산도 소유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GLEN INVESTMENT COMPANY INC라는 법인이 이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이 회사는 이동진씨 소유였습니다

1988년 12월 16일 GLEN은 회사 소유주 이동진에게 1달러라는 가격으로 넘겼습니다
그러나 최초 GLEN 이 얼마에 이 부동산을 사들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198812.jpg -
이 부동산은 이동진 사망 직전인 2004년 4월 24일  다시 '310 MAIN ST LLC' 라는 법인에
1달러에 매도됩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198812.jpg -
이당시 이동진은 한국에서 요양중이었으며 사망에 임박해 부인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주는등
재산을 정리한뒤 2004년 5월 8일 사망했습니다

장남 사망 1년 6개월뒤인 2005년 12월 19일 부인 옥로는 테너플라이 자신의 집을
LEE MARTIAL TRUST 라는 법인에 1달러에 매도하며 이 매도서류에 장남의 사망일자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집은 2006년 6월 30일 백5만9천달러에 팔립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200404 집 이마샬트러스트.jpg -
그뒤 이옥로는 2007년 3월 2일 뉴저지 테터플라이 주택을 2백15만달러에 사들입니다

아직 법인소유의 부동산들은 조사해 보지 않아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습니다  [첨부파일 참조]

이후락 장남 부부 200703 새집 매입.jpg -
이외에도 장남은 그 자신의 독특한 취미[?]를 즐기기 위해 큰 돈을 탕진했다[?]
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이며 여러 증언들이 많으나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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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자녀는 4남 1녀 입니다

장남은 지난 2004년 사망한 이동진으로 서정귀의 딸 서옥로와 결혼, 1남2녀를 두었습니다
차남은 동훈으로 한화 김승연회장의 누나 영혜와 결혼, 4남을 두었습니다
3남 동익은 1남2녀, 4남 동욱은 SK쪽의 예원과 결혼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외동딸은 명신으로 정화섭과 결혼,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후락 장남 동진 부부의 부동산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동진 - 옥로 부부는 1975년 7월 15일
뉴저지 테너플라이의 7 GLENWOOD COURT의 부동산을
9만5천달러에 구입했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507.jpg -
이후락 부장의 큰 며느리인 옥로씨는 1979년 3월 30일
옥로 단독으로 테너플라이 블록 226 랏21의 부동산을
32만달러에 매입했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903.jpg -
이동진 - 옥로 부부는 1980년 12월 12일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해변의 '이라카이 아파트먼트'의 1625호를
17만5천달러에 사들였습니다

이들 부부에 앞서 1980년 8월 외동딸 부부가 같은 콘도를 매입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와이 콘도를 구입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1981년 1월 7일 뉴저지주 알파인의 나대지 2필지를 구입합니다

1필지는 알파인 블록 39 랏 12J로 16만5천달러에 매입했으며
나머지 1필지는 알파인 블록 39 랏 12I 로 역시 16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장남 부부 197903.jpg -
이후락 장남 부부 198101 2.jpg -
이동진은 또 사위인 정화섭과 공동명의로
1981년 4월 15일 뉴저지주 포트리 부동산을 75만달러에 매입합니다

이들 두사람은 또 1981년 6월 15일 뉴저지주 잉글우드 클립 부동산을
백60만달러에 공동매입합니다

이후락이 부정축재자로 재산을 환수당한 시점이 1980년 6월 중순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후락이 재산을 환수당한 그 직후부터
장남부부와 외동딸부부의 부동산 구입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부분이 이후락과 신군부사이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지 않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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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맨 처음 글에서 말한대로
1987년에 아주 굵직한 거래를 합니다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7년 6월 10일
재미동포들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인 퀸즈 플러싱
메인스트릿 59-10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2백20만달러였습니다 [계약서는 이미 공개]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또 약 2달뒤인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172  MADISON AVENUE 빌딩을 사들입니다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였습니다 [계약서는 이미 공개]

이들은 또 1988년 12월 9일 뉴저지주 포트리
메인스트릿 95번지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계약서상에서는 1달러로 돼 있지만
실제 매입액이 30만달러임을 세금등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계약서 동그라미 부분]



외동딸 부부는 또 2007년 4월 13일에는
허드슨강 너머로 맨해튼이 바라다보이는
뉴저지 엣지워터의 한 건물을 6백90만달러에 매입합니다

물론 이들은 1992년 6월 30일 포트리 부동산을 2백66만5천달러에
1994년 5월5일 크레스킬 집을 62만5천달러에
2001년 3월 30일 포트리 부동산을 백만달러에 매도하는등
약 4백20만달러정도의 부동산은 매각했습니다

외동딸 부부는 뉴욕등 동부지역에서만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 아니라
LA에서도 일부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소문이 있고
특히 모 한국계 은행의 설립에 깊숙히 간여했다고 합니다

외동딸 부부의 뉴저지 알파인 저택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부동산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집안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많았으며
그중 하나는 최근 여러가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모화백의 그림중 한점 이었다고 합니다

LA등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내일부터는 숱한 소문을 뿌렸던 이후락의 장남 부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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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외동딸 부부는 장남 내외와
얽히고 설키며 부동산을 매매합니다

외동딸부부는 지난 1980년 12월 15일 18만달러에 매입한
크레스킬 부동산을 1983년 1월 1일 장남 내외에게 28만달러에 매도합니다 

외동딸부부와 장남부부는 부동산을 공동 매입하기도 했지만
이 부동산은 외동딸부부가 장남부부에게 10만달러의 이문을 붙여
매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뒤 1986년에 접어들어 다시 큰 규모의 거래가 시작됩니다

외동딸 부부는 1986년 1월 28일 뉴저지 최고 부촌인 알파인의 블록 22 롯 25,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주소는 40 TAMARACK ROAD 알파인으로 
그야말로 그림같은 웅장한 집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38번지까지는 주소가 있었지만 40번지와 그 뒤 집한채는 
주소를 명시하지 않아 집을 찾을 수 없었고
우편물은 사서함을 통해서 받습니다

이 부동산 매입가격은 60만5천달러 였으며
현재 공시지가만 3백80만 달러에 달합니다



외동딸 부부는 또 같은해 7월 14일
뉴저지 포트리 1636 PALISADES AVE일대[1635 PARK AVE로도 불림]
부동산을 2백55만5천달러에 매입합니다

이 부동산은 뉴저지 포트리에서 잘 알려진 콘도인
아트리움 콘도 바로옆에 있습니다


따라서 2개 부동산 매입에 투입된 돈은 3백15만5천달러였습니다
그러나 1986년12월 19일 포트리소재 부동산 1건을 2백25만달러에 매도함에 따라
1986년 실제 부동산 매입액은 62만5천달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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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정명신 부부는 1981년 1월과 4월 백48만달러를 들여
두건의 부동산을 매입했었습니다

그뒤 약 2개월뒤인 1981년 6월 15일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은
GAINES CAPITAL CORPORATION 과 함께 뉴저지 잉글우드 클리프의 부동산을
사들입니다

장남과 함께 부동산을 사들인 GAINES 라는 회사는 바로 이후락 사위
정화섭의 회사였습니다

이후락 장남과 이후락 사위가 공동출자해 부동산을 사들인 셈입니다

부동산 매입가격은 백60만달러,
부동산 주소는 뉴저지 잉글우드클리프 블록 411 랏 19였습니다

백60만달러는 지금도 적지 않은 돈이지만
28년전 백60만달러는 그야말로 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

결국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부분적으로 장남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1981년에만 3백8만달러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입니다

이후락 정화섭 이동진 1981년 백60만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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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이명신부부는 1975년과 1977년 집을 구입한뒤
부정축재자 발표직후인 1980년 7월부터 부동산 매입을 본격화합니다

신군부가 부정축재자를 발표한 것은 1980년 6월 17일,
이때 이후락은 울산의 학교등 모두 194억원을 환수당합니다

그러나 외동딸 부부의 미국 부동산 매입은 공교롭게도
부정축재자 발표로 재산을 환수당한 바로 그 다음달부터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7월 7일
뉴저지주 포트리의 221 메인스트릿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22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1 -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8월 25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이라카이 아파트먼트 빌딩 1426호를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34만2천달러였으며 8만여달러를 먼저 지급하고
향후 3년에 걸쳐 매년 8만여달러를 납입합니다 [하와이 부동산 계약서는 이미 공개함]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1980년 12월 15일
뉴저지 크레스킬 블록 210 랏 25와 랏 26등
나대지 2필지를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18만달러였습니다
훗날 이 나대지 2필지는 이후락 장남 이동진을 거쳐
우리가 잘아는 정치인에게 매도됩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2 -
이후락 사위 정화섭은 1980년 12월 22일
이후락 장남 이동진과 공동명의로
뉴저지주 포트리 블락 4805 랏 3의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매입단가는 11만5천달러였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1980년대 2 -
이처럼 이후락 외동딸 부부는 부정축재자로 재산이 환수당한 다음달부터 시작해
1980년에만 4건의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이 4건의 매입금액은 하와이 부동산의 전체금액을 합산한다면
87만달러에 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981년에 접어들면 그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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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직계가족의 미국 부동산 내역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부동산 관련 서류 일부를 복사해 왔습니다
서류가 워낙 많아 정리에 시간이 걸리므로 일단 시기를 나눠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970년대입니다

이후락 전 부장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정명신이
미국에 첫 부동산을 구입한 것으 197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부부는 1975년 11월 3일 8만3천달러를 주고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22 LESLIE PLACE 주택을 매입합니다



이들 부부는 이 주택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77년 7월 26일 9만5천달러에 매도합니다

이들 부부는 테너플라이 주택 매도에 앞서
1977년 2월 1일 뉴저저주 크레스킬 주택을 매입합니다

매입가격은 15만3천달러로 1년 3개월전 테너플라이 주택매입때보다
약 2배정도 많은 금액이며
주소는 32 EISENHWER DRIVE, CRESSKILL, NJ 입니다



이들 부부는 뉴저지주 알파인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이 집에 거주합니다

과연 1970년대 중후반 8만여달러, 15만여달러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을까
1970년대가 미국이민자들에게 허용된 외환반출한도가 70달러에 시작해
백달러로 늘었다가 2백달러까지 가능했다고 하니 매우 큰 돈임에 틀림없습니다

1970년대 부동산 거래는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경우
2건 매입, 1건 매도 였습니다

매우 특이한 것은 이들 외동딸 부부의 부동산 거래가 1980년 초부터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매입건수는 물론이고 한건당 금액도 크게 늘어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시해사건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때인 1980년 5월 16일 김종필 이후락등을 연행합니다 

약 한달간의 조사뒤 1980년 6월 중순 이후락이 1백94억원정도의 
부정축재를 했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이후부터 이후락 직계가족, 외동딸 부부와 장남 부부의
미국내 부동산 매입이 크게 늘어납니다 

신군부는 분명히 탈탈 털어 조사해 백94억원 전액을 국고로 환수했는데
이후락 직계가족들이 그 이후부터 미국내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정말 미스테리한 일입니다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예치된 돈일수도 있고
혹시 신군부가 이후락의 부정축재액을 축소해 백94억원만 발표하고
군부등에 이후락씨등의 영향력을 의식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
일부는 그대로 돌려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습니다 

만약 부정축재액중 백94억원만 환수하고 일부는 다시 돌려주었다면
또 다른 일부를 신군부가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부분을 밝혀내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이며
부정축재 조사를 담당한 전두환등이 입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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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의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고 김형욱의 큰 며느리가 2003년 7월 3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하자 외동딸등 가족들도 2003년 9월 진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쟁점은 '장남 정한이 죽기 전까지 유언장 존재사실을 몰라서 상속을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송이 진행되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며느리의 주장에 맞서
외동딸 신해는 2003년 9월 12일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주된 내용은 '큰 오빠가 유언장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재산분배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피고인 어머니 김영순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딸 진술 -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9년 아버지 김형욱이 실종된 당시 나는 19살의 틴에이저로서 큰 충격을 받았다
-오빠들과 엄마등 우리가족은 매우 친밀했지만 실종사건이 더욱 우리를 결속시켰다
-실종당시인 1979년 큰 오빠는 미혼이었고 1980년 결혼했다
-당시 우리가족변호사인 알란 싱거변호사가 끊임없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싱거 변호사가 큰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했다
-아버지 김형욱도 1975년 유언장 작성뒤 내용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뒤 저녁식사자리에서도 
  유언장내용을 언급했다, 당시 나는 14살 이었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유언장내용은 아버지의 재산 50%는 어머니가, 나머지 50%는 우리 3남매가 가진다는 것이었다
-실종뒤 싱거변호사등으로 부터 유언장 복사본을 받았다
-실종뒤 사망판결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재판부가 전가족이 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해
  오빠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법원에 갔다
-한국내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받기위한 소송을 통해 큰 오빠의 부인은 2003년 4월 26만1천여달러를 받았다
-내 일생동안 단 한번도 큰 오빠가 재산분배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내일은 차남 김정우의 법정 진술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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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81년 5월 12일부터 유언장 집행자가 돼
김형욱 재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21년이 지난 2002년 9월 장남 김정한이 죽게 되자
큰 며느리등 장남 가족과 김영순 사이에 재산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형욱의 큰 며느리는 남편이 생전에 유언장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며
이는 시어머니 김영순씨가 유언장 집행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고 2003년부터 뉴저지 버겐카운티 지방법원에서
원고 며느리 피고 김영순씨의 법정공방이 시작됩니다

2003년 7월 3일 원고인 큰 며느리는 재판부에 자신의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김형욱 재산분쟁 며느리 진술 5매 -
이 진술서에서 큰 며느리는
- 시어머니 김영순이 유언장 집행자로서 유언장에 기록된 상속인에게 유언장 내용을 설명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 시어머니 김영순은 직장을 다닌 적이 없고 소득소스가 전혀 없다
- 김형욱은 한국의 중정부장으로서 197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1978년 6월 30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김형욱이 7만5천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적발됐다고 보도했다
- 이 기사는 김형욱이 시티뱅크 뉴욕에 2천만달러, 해외은행에 6백만달러등을 예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형욱 본인은 3백50만달러만 인정했지만
- 시어머니 김영순은 1983년부터 알파인 저택 신축을 시작했고 가치는 1천만달러에 이른다
- 시어머니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받았다
- 한예로 뉴저지 테너플라이 P모 은행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방문해 세이프티박스에 10만달러를 넣어두었으나
  그뒤 남편이 확인했을때는 5만달러밖에 없었다
- 스위스 은행에 막대한 자금이 예치돼 있다
- 알파인저택은 김형욱 재산으로 건축된 것이다
- 남편과 김정우 김신해등 3자녀가 동일하게 김형욱 재산에 대해 16.65%를 가질 권리가 있다
는 등의 진술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형욱의 2남 김정우와 외동딸 김신해는 2003년 9월 12일 며느리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는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게 됩니다

2남과 외동딸의 진술도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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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80년 5월 12일 유언장 집행인으로 지정된뒤
상속절차에 돌입합니다

이에 따라 1981년 5월 28일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지역신문 'THE VALLEY STAR'에
김형욱 채권자 신고를 접수하는 광고를 게재합니다

'PUBLIC NOTICE' 란 제목의 이광고는 1981년 5월 12일 뉴저지 버겐카운티 유산법원 판사의
명령에 따라 김형욱 또는 형욱 김에게 받을 돈이 있는 사람은 뉴저지 알파인에 사는
김영순또는 유족의 변호사에게 청구하시오' 라고 돼 있습니다

이 광고의 FEE는 6.16 달러였으며
해당신문사의 광고게재사실확인서도 첨부, 법원에 제출하게 됩니다



김형욱 김영순 상속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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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의 외동딸 부부인 정화섭 - 명신씨 부부가 미국에서 많은 부동산 거래를 했습니다

지난 9월 29일[2009년 9월 29일]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검색컴퓨터로 CHUNG WHA SUP , 즉 사위 명의의 부동산관련 서류를 조회했었습니다

이 버겐카운티 단 한지역에서만 관련 서류 백3건이 검색됐습니다
물론 부동산 매매계약서뿐 아니라 등기소에 제출된 매매관련 다른 부속서류를 포함한 것입니다만
DEED [매매계약서;매입-매도 포함]만 40여건이었습니다

이후락 사위 버겐카운티 부동산관련 서류 목록
이후락 사위 버겐카운티 MMGK 부동산관련 서류 목록

버겐카운티등기소는 내부 검색컴퓨터로 서류를 확인한뒤
직접 문서고에서 해당 서류를 찾아 복사등을 해야 합니다

백3건이라면 한서류가 2장으로만 돼 있어도 2백페이지요
3장으로 돼 있다면 3백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당시 백3건이 검색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리스트만 출력시키고 서류확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추후에 2-3일 날을 잡아 서류를 복사해 보고자 마음먹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차차 공개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후락 자녀들이 재벌 일가와 결혼, 재벌의 돈으로 미국의 부동산을 사는데
왜 왈가왈부하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프레이저 청문회등에서 이미 나왔듯이 스위스 비밀계좌와
일정부분 관련이 있고 '부정축재자'로 발표된 이후락의 돈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이 짙기 때문입니다

아래 동광출판사가 출판한 '정풍 6권 -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한부분을 스캔해서 올립니다 [동광출판사의 양해를 바랍니다 ]

김종필 이후락 떡고물 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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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장남은 이동진으로 서정귀의 딸 서옥로[미국부동산 서류에는 '이옥로'로 표기됨]와 혼인합니다

이동진은 몇년전 작고했습니다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옥로 부부도 하와이에 콘도를 매입합니다

이들 부부가 매입한 콘도는 이후락의 외동딸과 사위인 정화섭-명신 부부가 매입한 콘도와 동일한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해변에 인접한  ILAKAI APARTMENT 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1980년 12월 12일 이 콘도의 1625호를 매입합니다
세금을 백75달러 납부한 것으로 미뤄 매입가는 17만5천달러입니다

이동진 이옥로 하와이 매입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이들 부부의 주소는
7 GLENWOOD COURT, TENAFLY, NJ 07670 입니다
이 집에 대해서는 추후 알아보겠습니다

결국 정화섭-명신 부부가 1980년 8월 25일 이 콘도 1426호를
이동진-옥로 부부가 4개월뒤인 1980년 12월 12일 1625호를 구입함으로써
와이키키해변에서 가장 유명한 콘도였던 이라카이 아파트에 
이후락 직계가족이 1980년 두채의 콘도를 매입한 것입니다 
 
다른 고관대작들도 이 콘도를 매입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만
워낙 오래전이고 현재 소유주가 많이 바뀌어서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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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 공동성명의 주역,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등으로 잘 알려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조금전 한국시간 2009년 10월 31일 오전 숨졌다고 합니다

이후락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지작업을 위해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을때 '청산가리를 품고 갔다'고 증언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여러차례 공직을 이용한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락의 별세로 '85년 영욕의 세월'등 그의 공과가 자세하게 알려지고 있으므로
저는 그의 직계가족들의 미국 부동산 내역에 대해 알리고자 합니다

이후락의 별세에 대해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겠지만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등을 지낸 간과할 수 없는 공인이며,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므로
엄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부동산 내역을 공개합니다

한국인의 미국 부동산 소유를 추적해 보면 미국 부동산 소유가
한국의 권력부침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형욱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뒤 김형욱이 실각한뒤에는
그 뒤를 잇는 이후락이 나타나고 그 뒤에는 10 26의 주역들이 나타나는 형상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이후락으로 그의 직계가족,
즉 자녀들의 미국부동산 매입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김형욱과 한국의 재벌일가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 알파인에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의 대형빌딩, 퀸즈의 빌딩, 최근에는 뉴저지주 엣지워터의 대지와 주택을 구입하는등
부동산 규모는 최소한 3천만달러에서 5천만달러에 달합니다

이후락의 가족중 외동딸과 사위, 그리고 이미 작고한 큰 아들과 생존한 며느리가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차근 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포털사이트등에서 살펴보면 이후락은 아들만 3명을 둔 것으로 나타나지만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이 외동딸 명신이 정화섭씨와 결혼했고 이들 부부는 적어도 1975년부터 미국에 체류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부부가 가장 먼저 소유한 부동산은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주택입니다

주소지는 22 LESLIE PLACE, TENAFLY, NJ로 1975년 11월 3일
8만3천달러 에 이 주택을 구입합니다

이후락사위 테너플라이 1975
이후락씨 딸 부부는 또 1980년 8월 25일 하와이 호눌룰루의 와이키키 해변에서
가장 인접한 ILAKAI APARTMENT [이라카이 아파트]를 매입합니다

와이키키 서쪽 해변앞 콘도는 약 10채 정도로 그중에서 해변과 가장 가깝고
가장 먼저 세워진 콘도가 바로 이 이라카이 아파트이며
이중 가장 최근에 세워진 것이 노재헌, 조현상,한병기등이 구입한 THE WATERMARK 콘도입니다

이들 부부가 구입한 콘도는 이라카이 아파트 1426호였으며 매입가격은
1980년 당시로는 큰 돈인 34만2천달러 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9만9천여달러를 다운페이먼트로 선지불한뒤 남지 24만2천여달러를
3년에 걸쳐 지불했습니다

한진 일가등과 함께 이후락씨 직계가족이 사실상 하와이 투자의 원조인 셈입니다

이들 부부의 당시 주소는 32 EISENHWER DRIVE CRESSKILL NJ 였으며
이 주택은 이들부부의 소유였습니다
이 집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후락 사위 정화섭 하와이 15 003 1174541
현재 이들 외동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뉴저지 알파인에 있습니다

이 주택의 주소는 PO BOX 295, TAMARACK ROAD, ALPINE, NJ 로
알파인 다른 주택들처럼 번지 없이 사서함 번호로 표시됩니다
지적도상으로는 알파인 블록 22 랏 25입니다

대지가 2에이커, 약 2천4백여평인 이 주택의 가격은 3년전인 2006년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가
고시한 공시가격만 3백78만천9백달러 입니다

공시가격이 시세에 한참 못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현시세가 최소 6백만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부동산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이후락 사위 알파인 주택
또 이들부부는 MMGK LLC 라는 법인을 설립해 지난 2007년 4월 13일
뉴저지주 에지워터의 땅을 구입합니다
매입계약서에 기재된 MMGK LLC의 주소는 바로 이들부부의 알파인 집 주소입니다

이땅의 매입가격은 무려 6백90만달러 였으며 양도세만 8만9백여달러에 달했습니다

이후락 사위 엣지워러 2007
그이전인 1987년 이들 부부는 MONDA ASSOCIATES 라는 법인을 설립해
1987년 8월 24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을 매입합니다

이 빌딩의주소는 172 MADISON AVE, NEW YORK, NY 으로
매입가격은 무려 7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입 1987
이 빌딩을 팔때 위임장서류를 통해 MONDA ASSOCIATE의 주인이
이후락의 외동딸 부부 정화섭-정명신[이명신] 임이 드러났으며, 매도서류에도 정화섭이라는 이름과 서명이 있으며
2002년 4월 2일 매도시 가격은 8백97만5천달러 였습니다

이 빌딩은 2007년 다시 다른 주인에게 팔리는데 그때 가격이
천5백90만달러였으므로 현시가가 천 7백만달러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사위 메디슨 건물 매도 2002
이들 부부는 또 이 빌딩 매입직전에 뉴욕 퀸즈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빌딩을 매입합니다

빌딩 매입일자는 1987년 6월 10일이며
빌딩주소는 59-10 MAIN STREET,
매입시 법인이름은 M.G.&K ASSOCIATES 였습니다

매입가격은 2백20만달러 였습니다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입 1987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도 1994
이후락사위 플러싱빌딩 매도시 위임장 1994

이후락씨 외동딸 부부는 이외에도 수십차례의 거래를 통해 주택과 빌딩을 사고 팔았습니다
이후락씨 외동딸 부부의 일부 부동산이 이정도입니다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큰 아들과 작은 아들도 미국에 부동산이 있으며
아들의 부인이 몇달전 한국에서 상장 기업체를 인수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계약서 스캔등이 끝나는 대로 그 내역을 차근차근 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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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출판사가 출판한 정풍 6권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이란 책에 따르면

"이후락씨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자에 재직할때 사위인 정화섭을 1972년12월
국제문제 담당 국장으로 임명했다 박정희의 질책을 받고 물러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정유회사인 G사가 1969년 8월 21일 스위스 유니언은행 서정귀씨[이후락 사돈] 명의로
2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송금하자 유니언은행은 이돈의 입금사실이 기재된 구좌명세서를
 1969년 9월 2일 이후락의 사위인 정화섭에게 발송함으로써 
이후락씨 사위인 정씨가 이후락씨의 부정축재 자금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30년전인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덮기 위해 부정축재자 조사에 나서
1980년 6월 19일 권력형 부정축재자 10명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부정축재액은 김종필이 2백16억원, 이후락은 백94억원, 이세호 백 11억원등이었습니다
이후락과 관련해 1977년 로스앤젤레스에 빌딩을 매입했다는 소문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이부분은 고위관리를 헐뜯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대충 이러한 부분과 함께 부정축재 내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LA의 빌딩 매입소문을 듣고 확인을 진행중이지만
아직은 사위나 며느리 이름의 빌딩 매입 계약서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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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 [대통령 후보] - [미의회가 밝힌 박정희정권 스위스계좌 2]걸프사,박정희방미자금 20만달러 스위스비밀계좌에 입금-UBS계좌번호는 626,965.60D: 스위스UBS입금전표,걸프사진술서등 첨부

2012/10/03 - [대통령 후보] - [미의회가 밝힌 박정희정권 스위스계좌 1]'박정희자금 이후락이 스위스계좌에 예치- 김성곤이 육영수에게 돈 상납' : 이게 프레이저보고서 원문

지난 30년전 1979년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미국 뉴저지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지난 5월 초순 그의 묘를 발견했습니다

516 혁명이후 박정희 정권의 지킴이 역할을 하다 중정부장자리에서 밀려나자 미국으로 망명,
미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권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렸던 김형욱.

박정권과 첨예한 갈등을 빚다 지난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30년만에 
결국 공동묘지의 한켠에 누워 있는 그를 찾았습니다 

이 공동묘지는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등 그의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뉴저지  알파인집에서 
약 2.5마일 거리에 있었습니다 


묘비에는 KIM 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IN LOVING MEMORY' 란 단어아래 
왼쪽에는 김형욱을 의미하는 'HYUNG W' 오른쪽에는 그의 부인 신영순을 의미하는 'YOUNG S SHIN'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김형욱의 이름아래 그의 생일인 음력 1925년 1월 16일을 의미하는 '음 JAN 25 1925' 란 글이 눈에 띄고 
아래에는 그의 실종일로 기억되는 1979년 10월 7일 'OCT 7 1979'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인 신영순은 아직 생존해 있어 출생일자만 적혀 있었습니다

한때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대한민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며 그후로도 오랬동안 '기구한 실종'으로
인구에 회자됐던 김형욱, 그의 묘비에는 'IN LOVING MEMORY'  라는 짧은 3단어가 전부였습니다 


김형욱의 옆에는 그의 큰 아들 정한이 함께 묻혔습니다 
10대 초반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갔다 발목지뢰를 밟아 발목을 다쳤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던
김정한은 그의 아버지 김형욱 실종이후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다 2002년 9월 세상을 등졌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를 찾아서 물어봤었습니다 
묘지 관리사무소는 가족등 이해관계인이 아닌 이상 아무 것도 답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과연 이 무덤속에 김형욱 시신의 일부라도 묻혀 있는지, 아니면 가족들이 그의 추모를 위해서 
가묘를 만들었는지는 가족만이 알고 있습니다 


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역임했던 방준모 전 실장에게 전화했었습니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방전실장은 너무 놀라 말문을 잊지 못하면서 '그곳이 어디냐, 잘잘못을 떠나서 동기생으로,
또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로서 그의 무덤앞에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리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너무나 많습니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간헐적으로 미국정부 여러문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미국망명을 준비했는지등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안치용 백






 
핫이슈 언론보도2009.09.1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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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김진규 부인 김보애씨의 '내 운명의 별…' 大賞 뽑혀
박정희·정일권·김종필 등 대부분 실명 거론… 기록적 가치 뛰어나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땐 말이 스타지 생활은 정말 비참했어요. 적선동 골목에 있던 작은 한옥집의 쪽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지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림을 차렸는데 금 한 돈이 3000원 하던 시절에 월급으로 1만원을 받아오더군요."
1960~70년대 '국민배우'였던 고(故) 김진규(1923~1998)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영화배우 출신 부인 김보애(金寶愛·72)씨가 남편과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내 운명의 별 김진규'가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의 대상(고료 5000만원)으로 뽑혔다.

김진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 등의 작품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은막의 스타다. 김보애씨는 이 작품에서 열아홉의 나이로 당대의 명배우 김진규와 결혼한 뒤 가정폭력, 여자문제 등을 겪으며 이혼하게 되는 과정, 당시 영화계의 뒷이야기, 말년에 혈액암으로 투병하던 김진규와의 재결합 등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심사위원회(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외 6인)는 "명예욕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논픽션적 정직성과 한국 영화계의 풍경을 보여주는 다큐적 가치를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영화‘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작)에서 화가 아저씨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영화배우 김진규씨(사진 왼쪽). 김보애씨가 영화‘고려장’(1963년 작)에서 남편 김진규씨와 호흡을 맞춰 연기하고있다(사진 오른쪽).
김보애씨는 남편과 의사부인, 여교수, 일본어 가이드 등과의 외도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당시 최고배우로서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종필 공화당 당의장 등 당대 최고 실력자들과의 교분도 기록했다. 또 자신이 요정을 운영하면서 지켜보았던 각계 명사들의 은밀한 모습도 가감 없이 적었다. 거의 대부분 실명(實名)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한 시기의 이면사(裏面史)로서 기록가치를 갖는다.

김보애씨는 "김진규와 헤어진 후 두 번 더 결혼했다 실패했는데 배우로 활동했던 딸(김진아·47)은 가족사와 엄마의 치부가 드러나는 게 싫다며 글 쓰는 걸 반대했지요. 하지만 이 나이에 뭐 거리낄 게 있으랴 싶었어요. 분에 넘치는 대상을 받았으니 자식들에게 면목이 서게 돼 정말 기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의 부문별 우수상(고료 1000만원)은 ◇자서전 부문=김광수(68)씨의 '한국 남성패션 50년 소사' ◇체험수기 부문=김효선(47)씨의 '서연아, 울지마, 사랑해!' ◇역사다큐 부문=박충훈(65)씨의 '태극기'의 3편이 선정됐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은 지난 8월 말 마감 결과 수준 높은 200여편의 작품이 지원했다. 지난해에는 당선작 1편만 선정했지만 올해부터는 대상과 부문별 우수상 3~5편을 시상한다.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은 21세기북스(대표 김영곤)가 후원한다.
핫이슈 언론보도2009.09.1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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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남편 아닌 예술가 김진규의 고뇌 담고 싶었죠"

'내 운명의 별 김진규'로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받은 김보애씨
당시 배우 참고증언 듣고 영화 관련 기록까지 확인
"연기 열정 놀라웠던 배우 김진규 예술관 세웠으면…"

"나 자신이 김진규를 14년 세월을 부대끼며 살았던 남편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됐습니다.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로서의 김진규, 밤새 대본을 외우고 손수 화장을 하며 하루에도 몇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했던 그의 고뇌를 담고 싶었습니다."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의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보애(72)씨는 고희의 나이가 무색하게 청바지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김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른 훌륭한 작품이 많았을 텐데 정말 내 글이 대상으로 뽑힌 게 맞냐"면서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김보애씨는 김진규가 전 부인이자 '한국의 그레타 가르보'로 불린 당대의 여배우 이민자와 이혼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던 시기에 그를 만나 열아홉에 결혼한다. 두 사람은 아이 넷을 낳았으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결국 이혼했다. "남편은 술만 먹으면 손찌검을 했어요. 여자 관계도 복잡했었고." 이후 김씨는 음식점을 경영하며 4남매를 키우고, 김진규는 영화제작자와 감독으로 활동하다 혈액암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김보애씨는“나이 먹으며 눈물이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이번 논픽션을 쓰면 서 밤마다 무던히도 울었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김씨는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배우로서 김진규의 열정은 정말 놀라웠다"고 누차 강조했다. 《벙어리 삼룡》을 찍을 땐 집에 와서도 벙어리 흉내를 냈고, 산에서 구르는 신을 찍으며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 고생했다. 이번 논픽션을 쓰기 위해 만난 고(故) 유현목 감독(지난 6월 작고)은 "누가 뭐래도 배우는 김진규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남현 박암 장동휘 이민자 박노식 도금봉 최무룡 같은 당대의 배우들과 신상옥 편거영 임원식 등 유명 영화감독들이 수시로 언급되는 김씨의 글은 자연스레 한국 현대영화계의 풍경을 보여준다. 주연급 배우들이 싸구려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촬영 현장에서 감독에게 두들겨 맞으며, 제작자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 당시 '스타'들의 열악한 현실도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김씨는 참고증언을 위해 원로 여배우 최은희 윤인자 등을 만났고 영화 개봉 연도나 주연배우, 시대상황 등 사실 관계를 정확히 하기 위해 관련자의 도움을 받았다.

작품의 후반부엔 김씨가 음식점 '세보'를 경영하며 만난 인물들과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비서실장이 던진 냉면 그릇을 맞고 면발을 뒤집어쓴 일,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보안사 준위가 던진 유리잔에 이마가 찢겨 4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던 일도 나온다.

또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써서 도피중이던 시인 김지하가 얼근하게 취해 찾아온 일화도 들어있다. "어느날 밤 늦게 찾아온 그가 '누님, 우리 오늘 밤에는 굿판이나 한번 벌입시다'더니 촛불을 켜고 막걸리를 사방에 뿌리며 이렇게 외쳐대는게 아니겠어요. '에이! 세보에 드나드는 온갖 잡놈들! 그 중에서도 잡아서 주리를 틀 오적놈들! 어서 그놈들을 잡아가시고 이 나라의 민주 귀신 좀 내려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동생, 그렇게 되면 장사는 어떻게 하라고. 오적 중에서도 괜찮은 놈들도 있어'하며 말렸죠. 그랬더니 김지하씨는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나쁜 오적은 다 잡아가지고 괜찮은 오적 놈들은 살려주시게! 훠이'하더라구요."

김보애씨는 "'김진규 예술관'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1000만 관객이 드는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배우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게 무척 아쉽거든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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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커넥션-박정희 정권과 친한파

 

 

  4 · 19 혁명의 희망을 쿠데타로 무산시킨 박정희.

그의 20년 장기집권 뒤에도 역시 일본 커넥션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 도입 사건이다.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에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핫이슈로 다루어졌다. 의혹은 일본에 4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2배나 높게 받은데서 비롯됐다. 4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 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에 250만 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 더 이상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는 당시 아사히 신문 사회부 기자 오치아이 씨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일본에 정치가와 관료, 기업에 유착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왔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그 돈에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 커미션이란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리베이트 입니다. 저는 취재를 더 진행해서 상사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체이스 맨하탄과 외환은행에 구좌명을 알아보니 이름이 알파벳으로 S.K.KIM 이었습니다. 즉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이 단계에서 일본은 그야말로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130만 달러는 실은 일본 정치가에게 간 것이 아니냐고 모두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에 정치인은 전직 수상은 2명이며 그 중 한명으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한국 그 철도공사 입찰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시 전 수상에게 부탁해서 직접 담판 했습니다. 김형욱 부장이 자신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를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커넥션의 상대역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일본이 대소련 전쟁기지로 건설한 만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41년 부터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역임,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는 성전을 수행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면서도 그는 냉전 돌입에 따른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전략에 고심한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기본적으로 스케일이 큰 정치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느 아시아 전체를 놓고 정치를 폈습니다."

 

함께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반면 기시는 무죄로 풀려난다. 냉전체제로 돌입하면서 미국의 대일정책이 변화된 때문이었다.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기시는 자민당을 창당,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를 이끌어 나간다. 기시 전 수상이 한일관계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5 · 16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실세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국의 건설자 기시 전 수상과 같은 만주 인맥이었다. 61년 11월 이케다 수상과 회담 후 박정희는 도쿄 시내의 한 요정에서

 

『20세기의 리더들』-기시 노부스케 저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당시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시 전 수상에게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지사들의 의지와 같다. 앞으로 새한국 건설을 위해 좋은 의견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기시 전 수상은 박정희의 후원가가 된다. 기시 전 수상이 관여해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것으로 의심받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본 쌀 도입이다. 일본 쌀은 69년부터 3차례에 걸쳐 103만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의회에서 문제가 됐다.

일본 참의원 자료실. 이곳에는 73년 쌀을 둘러싼 일본 국회에서의 논란이 모두 속기록으로 보관돼 있다. 논란의 핵심은 박 정권에 대한 특혜시비였다. 당시 도입 조건은 30년 안에 현물로 상환한다는 거저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박 정권은 그것을 국내가격으로 시중에 판매했고 27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카리 아키라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그 쌀이 일본의 원조미라는 형식으로 한국국민에게 전해졌다면은 뭐 아무 문제가 없죠. 하지만 여수하고 인천, 그리고 포항의 항구에 내려진 일본 쌀들은 그 시점부터 일본의 원조미가 아니라 한국의 보유미로 둔갑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만약 돈이 되면은 당시에 정치 상황 헌법을 개정해서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할 정치자금이 되는 것입니다."

 

103만톤의 쌀은 일본 돈으로 1300억엔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량관리법은 쌀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법률적 근거 없이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수상으로 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 전 수상의 친동생이었다. 기시 전 수상은 일본 국회의 반대를 무마하고 국내법상의 문제를 법 개정으로 해결하면서 박 정권에게 쌀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70년, 기시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등 수교 훈장을 받는다. 그가 이렇게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기시 전 수상은 미국과 같은 노선을 펴서 아시아를 지킨다라는 형태로 일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사고 속에는 언제나 한반도가 들어있었죠. 따라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해 한국을 전위국가로 지원한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속에서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기시 전 수상. 그에게 남한은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는 방파제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극우단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노다 아키히로 당시 공동통신 서울특파원-"반공(反共)에 대해서 우익, 특히 일본 애국당을 비롯한 극우의 단체가 친한파였습니다. 심한 표현으로는 반공을 위해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집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죠. 그렇다면 도대체 친한파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이 희생양이 되어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않겠습니까."

 

80년 당시 일본이 북한 남침설을 제공해 신군부의 집권을 도왔다는 주장 역시 당시 일본이 가졌던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선원 박사 연세대 국제학 연구소-"1980년 4월 24일 미국이 이란에 인질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이후 약 3~4일 동안, 즉 1950년대 이후 서태평양에서 최초로 3~4일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있지않고 중동으로 향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홋카이도에 가까운 북방 4개섬에 소련에 무장력이 급속하게 증진하고 있는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일본으로선 상당히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정치적 안정을 바랬을 것이고 그 정치적 안정을 유도해 내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남침 가능성을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전두환 그룹이 조기에 상황을 정리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해서 이런 의도적인 정보공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본의 안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그가 한국에 올림픽을 양보한 것 역시 한국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카시마 노부요시 오끼나와 유구대학 교수-"올림픽을 한국에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세지마는 한국을 일본이 병합했을 때 발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셔야 됩니다. 즉 이것은 한국이 힘을 갖게되면 일본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일본을 위해서 한국이 그만큼 부담을 나누려면 올림픽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재오 국회의원-"일본에 정치인들은요 딱 밖에 나오면요 여야가 없습니다. 오직 일본국에 자국의 이해입니다. 그거는 일종의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에 근거 있다고도 봐야죠. 과거에 우리가 이런 나라였는데 대동아 공영권에 중심이었는데"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에 일본의 친한파가 적극 나섰던 것도 자국에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차관 제공 20억 달러

대한무역흑자 86억 달러

 

20억 달러의 자본을 빌려준 결과로 12년 동안 86억 달러의 대한무역흑자를 거두어 갔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일본이 경제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그걸 위해서는 한국이나 대만같은 이런 후방기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런 전략을 배경으로 해서 그 당시 한국으로 봐서는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가 들어서고 난 후에 경제를 재건해가지고 혁명을, 그 당시 5 · 16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할려고 하는, 또 그 당시 워낙 가난했으니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는데 일본 돈이 필요로 했던 것이죠.

또 일본은 그 당시가 되면은 이제 말하자면 이제 해외시장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단계. 그러고 그 경제원조는 바로 일본의 이제 수출시장을 넓힐려고 하는 바로 그런 일본 시장의 일본 자본주의의 대팽창의, 전후 새로운 팽창의 일환으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수출 촉진을 위해 박 정권이 70년대 중반에 추진한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상징적인 의미를 던지고 있다.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사실 세지마 류조에게서 아이디어를 받은 것이었다.

 

김도형 연구위원 산업연구원-"종합상사의 경우에는 수출만에 기능을 우리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종합상사가 제대로 건전한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수입에 기능, 또 삼국간 거래에 기능을 무시한 채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그런 하나의 계기도 됐지 않은 점에서 제대로 그 당시 전문가가 있었더라면은 제대로 평가해서 제도를 도입했으면 좋았다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원으로 우리가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지속된 대일경제의존은 현재에 이르러 심각한 경제종속을 낳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가마우지 아시죠. 가마우지는 오리과에 속하는 겁니다만은 목이 길고 가늘고 그렇죠. 거기에 이렇게 쇠줄을 묶어놓으면요 물속에 가마우지가 다른 고기를 먹을려고 들어가면은 고 순간에 쇠줄을 잡아 당기면요 고기를 문 채로 못 넘기고 물고 오죠. 그럼 뺏아서, 입에서 뺏아가지고 집어 넣으면 고기가 잡히는 거죠. 가마우지 낚시법인데 한국이 부품, 소재, 기계 일본서 가져와 가지고 한국에 저임금 노동하고 결합해서 그걸 미국에다 수출해가지고 돈 번 것을 다시 그 돈을 일본 다 갖다주죠. 일본서 또 부품, 소재 가져와가지고 또 만들어가지고 또 미국에 수출해서 그 돈 또 일본 다 갖다주죠. 우리가 지난 65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35년간 한국이 가마우지 노릇을 했는데"

 

물론 쿠데타 정권과 일본의 관계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든지 대일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일외교는 '검은 유착' 또는 '커넥션' 이라는 말로 일본인들 사이에 불리고 있다는 점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김중배 상임대표 언론개혁 시민연대-"이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 그러고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일본)한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대일무역적자라는 것은 거의 우리가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숙제로 지금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대단히 멸시하게 하는 이런 요인이 내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러고 우리 사회적인 여러가지 상황들 이런 것이 그리고 또 당당한, 아니 당당히 못한 지도자들에 대응"

 

강창일 교수 배재대학교 세계지역학부-"결과적으론 겉으로는 반일감정을 선동하면서 속으로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리도 국민을 위한 실리가 아니라 자기 그 정치집단 어느 세력에 경제적 실리 혹은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런 것들이 곧 한국인에 일본인식, 제대로 된 일본인식 같은 걸 큰 장애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죠."

 

쿠데타 정권에 일본 커넥션에 관여했던, 혹은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취재를 거부했다. 따라서 대부분에 사실들은 일본 쪽에 증언에 의해 밝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권에 지지와 국가에 안전을 일본에 의존했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우리는 왜 아직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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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6일 자 방송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본 커넥션-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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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 문서를 분석하는 가운데 한일협정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 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미 중앙정보국

 

1966년 CIA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당시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에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액수는 1백만-2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6개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1백만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히고 있다.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으며,

 

 

당시 박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도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 또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권을 갖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5,000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 돈을 줬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런 사실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CIA 보고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 있다. well founded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신뢰도에 대해 미국인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Rob 교수/한국외국어대 영어교육과-well founded 의 의미는 근거가 있고 신용할만하며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 문장에 통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6,600만 달러라는 숫자, 6개 회사가 총 6,600만 달러를, 각각 1백만불부터 2천만불씩 지불했다는 것" 거기에는 특정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CIA 문건과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또 다른 미 국무성 문서를 입수했다.

 

국무성 전문

1964년 5월 20일

발신 : 서울

비밀

 

1964년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이다.

 

그는(박정희) 김종필을 당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왜 미리 그를 제외시키지 않았냐고 물었다.

 

문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버거 미 대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첫째는 오노(자민당 부총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오노는 김종필이 제거된다면 일본과의 협정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후 둘에 대화과정에서 박정희는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오노가 김종필이 제외되면 한일협정 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 제외시키지 못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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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15일 자 방송 KBS 일요스페셜-'[최초공개!] 베일 속의 한일협정, 문서 한일 양국은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 편에서 발췌

 

안티 박정희 카페매니저 상생러브 (http://cafe.naver.com/anti516park.cafe)

핫이슈 언론보도2009.09.1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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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5000억원대 땅 주인은 누구?

매경이코노미 | 입력 2009.09.12 09:21 | 누가 봤을까? 50대 여성, 서울

 




시가 5000억원대에 달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 '문제의 땅(17404.8㎡)'의 소유권을 놓고 소송이 진행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8월 10일 K씨가 P씨 외 13명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절차 이행 등 청구의 소'를 접수했다. 늘 있는 송사 중 하나로 치부할 만하지만 소장에 언급된 땅의 규모와 관련자들에 대한 의혹이 속속 제기되면서 이 일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소송에 휘말린 서울 대치동 일대.

K씨의 주장대로라면 이 부지의 원 소유자는 고(故) L씨의 아버지였다. L씨의 아버지는 고종황제의 종친으로 당시 '이대감'으로 불리며 강남일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원고 측 주장이다. L씨의 아버지가 47년 사망하면서 자연스레 장남인 L씨가 단독 상속했는데 문제는 L씨의 아버지나 L씨 모두 소유권보존등기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K씨는 82년 L씨의 땅 중 임야 부분 2100여㎡를 3.3㎡당 2만원씩 총 1400만원을 지급하고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K씨는 소장에서 "L씨가 소유권 이전등기를 해준다고 해 기다리던 중 83년에 사망해 등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속인을 찾아 백방으로 쫓아다니다 사고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최근에서야 유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유족은 이 사건에 거론된 토지 등을 매수한 경위와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사연을 듣자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고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들 역시 사건 토지를 포함, 자신들의 상속재산이 석연찮게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그 사람을 상대로 불법등기 혐의로 고소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K씨가 사실상 핵심인물로 지목한 현재 등기부 등본상 소유주 P씨였다. K씨는 이번 사건에서 우선 이땅이 L씨 일가 소유였음을 밝힌 다음 82년 당시 매매 사실을 바탕으로 소유권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기자가 직접 현장을 가보니 K씨가 제기한 땅은 제3종일반주거지역으로 현재 골프연습장이 들어서 있었다. 등기부 등본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67년 '환지(행정구역 변경)로 인한 전사소유권 이전'이란 명목 아래 H시멘트 창업주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70년에 P씨가 '소유권이전청구권가등기'를 받아 권리자가 됐다. 그리고 90년에 최종 매매 처리돼 P씨가 실소유자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K씨가 문제제기하는 부분은 67년 이전 상황부터다. 원래 소유자가 L씨인데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소유권을 취득해 매매까지 한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고 측은 "L씨 소유의 땅은 당시 지명으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OO-O번지였는데 서울로 편입되면서 이 땅이 서울 성동구 삼성동 산 OO-O번지와 산 OO-O번지(현재 강남구 대치동 일대)로 나뉘어졌다. 조사 결과 이 땅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임야조사령을 통해 소유권자를 찾았던 임야조사서와 국가기록원에 있는 지적원도(현 지적도)에서 소유주가 L씨로 돼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3년 6월 30일에 당시 면사무소 직원으로 추정되는 J씨가 나뉜 땅 중 일부인 OO-O번지를 '멸실회복에 따른 이전' 등기 신청해 정부에서 소유권을 인정받아버렸다. 당시 L씨는 소유권보존등기를 하지 않은 채 자기 땅인 줄 알고 있었는데 결국 불법등기에 놀아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것이 원고 측 주장이다. 70년에 H시멘트 창업주가 일종의 임시 등기로 소유권을 확보하는 소유권이전청구권가등기를 P씨에게 허용해주고 이후 90년이 돼서야 매매할 수 있도록 한 배경에는 뭔가 많은 의혹이 있다는 것.

김한솔 나우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소유권이전청구권가등기는 돈을 주고 땅을 샀는데 소유권 이전등기가 안 나거나 여러 가지 요건을 못 갖춰 일단 매입자 이름으로 가등기, 즉 나중에 본등기를 할 것을 전제로 임시로 등기해놓는 것인데, 가등기권자는 후순위로 가압류나 가처분 등이 기재돼도 소유권을 넘겨받는 데 별문제가 없어 원 소유자의 협조가 절대적"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부동산 전문가는 "통상 이런 등기는 차명으로 부동산을 매입했거나, 채권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실소유자임을 공증하기 위해 신청한다"고 설명했다.



취재 결과 이번 소송에서 피고가 된 P씨(76)는 강남구 대치동 일대 땅 3만여㎡ 외에도 역삼동과 광주광역시 일대 알짜 부지를 소유한 사람으로 확인됐다. 부동산 보유 사실만 놓고 보면 P씨는 재테크에 관한 한 대단한 혜안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씨가 집중 매입하던 70년은 당시 정부가 영동2토지구획사업지구(삼성동, 청담동, 압구정동)에 대해 그해 7월 토지구획정리 사업 시행명령을 내린 해다. 이듬해부터 82년까지 순차적으로 개발을 하면서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최근 소송이 걸린 땅(17404.8㎡)은 P씨가 70년 4월 H시멘트 창업주와 계약할 때만 해도 당시 매매가가 4095만원이었으나 이 지역의 올해 1월 1일 현재 공시지가만 1270억여원(1㎡의 공시지가 730만원 기준, 국토해양부)에 달한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P씨의 땅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이 땅의 취득과 관련해 종로세무서장을 상대로 P씨가 낸 '양도소득세부과처분취소' 소송 당시 소장 내용을 보면 P씨는 이 일대 2122㎡(642평), 201㎡(61평) 등 6필지의 토지도 사들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 밖에도 P씨는 각종 부동산 관련 소송 사건에 연루됐는데 광주광역시를 상대로 P씨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조성을 위한 토지 수용에 반대한 소송을 낸 것 등을 추정해볼 때 P씨 소유의 땅과 빌딩은 서울 대치동 외에도 강남구 일대와 광주광역시 일대 등에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산 전문가는 "토지 이외에도 소유 건물 등을 포함하면 수조원대 자산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P씨가 개인으로서는 70년대 당시로도 조성하기 힘든 돈으로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전 중앙정보부장 차명부지설 '파다'

대표적인 의혹으로는 전 중앙정보부장 관련설이 거론된다. 강남 소재의 공인중개사들 사이에서는 "P씨의 땅들은 사실상 전 정보부장의 차명부지란 말이 많다. 왜냐하면 P씨는 전 정보부장의 운전기사 출신으로 강남 개발 정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인사 역시 "정보부장을 지낸 그는 정권이 바뀌었을 때 부정 축재가 문제시됐다. 스위스 계좌 얘기도 나왔지만 강남 일대 땅은 대부분 그의 것이란 말이 돈 것이 사실이다. 한때 권투를 했던 P씨는 그 당시 전 정보부장의 운전기사 겸 경호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P씨는 이런 소문에 "모두 내가 그동안 적법하게 모은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얘기도 돈다.

취재 결과 가장 유력한 실마리는 역시 법원 판결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P씨가 제기했던 소송의 2004년 서울행정법원 판결문 중 일부 내용에는 "1970년 원고(P씨를 지칭)는 1960년대에 내무부장관, 체신부장관,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박경원과 잘 아는 사이로 부동산임대업을 영위했다"는 내용과 "71년에는 박경원의 천거로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근무했다"는 내용, 그리고 "원고가 부동산 전문가이고 고위공직자와의 친분을 통해 환지전 임야 일대의 개발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토지를 집중 매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나와 있다.

소송을 제기한 K씨 측은 "일제시대 이전 자료를 확보한 만큼 진실을 꼭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23호(09.09.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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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9년 10월 발생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통째로 반영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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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언론보도2009.09.0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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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서 김대중 납치영화 '케이티' 추모상영
(도쿄=연합뉴스) 이태문 통신원 = 고(故)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케이티(KT)'가 일본에서 재상영된다.

   영화제작ㆍ배급사인 시네콰논(대표 이봉우)은 오는 12일부터 일주일간 도쿄 유라쿠초의 시네콰논에서 영화 '케이티'를 특별 상영한다고 4일 밝혔다.

   이 영화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다룬 나카조노 에이스케의 원작 소설 '납치'를 원작으로 2002년에 개봉된 액션스릴러로 제목 '케이티(KT)'는 작전명 'Killing The Target'의 약자다.

   작품은 일본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최일화가 김 전 대통령 역을, 김갑수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지휘하는 한국대사관 일등 서기관 역을 맡았다.

   영화 제작에는 한일 합작으로 총 6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영화는 지난 2002년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와 함께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개봉됐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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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살해기도사건과 자위대 그리고 일본영화 KT

 

오래전부터 김대중 납치-살해기도사건과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등이 관심이 많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다시 한번 당시 사건을 찾아보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김대중 납치 사건 보고서 전문을 구해 블로그에 옮겨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검색도중 우연챦게 접한 일본영화 KT는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영화 KT는 이 사건에 일본 자위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아주 깊숙히 관련돼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세가지다 첫째 박정희가 지시했다 둘째 납치가 아닌 살해작전이었다 세째 일본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런 메세지에다 첩보요원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부차적인 메세지다 
 

그동안 우리가 알기로는 자위대 출신 정보요원들이 사설 흥신소를 차려 디제이의 소재를 알려주는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한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 영화가 모두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탄탄한 취재에 바탕을 두고 있어 다시 한번 자위대 관여범위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하나 과감하게 자위대의 관여를 영화로 그린 감독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꼭 한번 이 영화를 보고 현대사의 비극을 되짚어보기를 간곡히 권한다

 

짧은 감상을 말하라면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면서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함과 무거움이 엄습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KT로 일본인인 사카모토 준지가 감독한 영화로 138분 길이이며

김갑수 최일화등 한국배우들이 출연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납치를 당한 디제이 입장이 아니라 납치를 실행하며 갈등하고 절규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어쩔수 없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본 자위대원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중정요원들을 미화 내지는 호의적으로 그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준지 감독이 디제이 납치에 자위대 관여사실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스파이 비밀경찰이면서도 인간으로서 어쩔수 없이 겪게 되는 번민과 갈등, 그리고 절규를 잘 전달했다는 생각이다

 

일본 자위대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도미타 삼좌는 이제 그늘속에 사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전역을 희망하지만 자위대 고위층에서는 그에게 가계를 열고

중앙정보부 KCIA를 지원하라고 명령한다

 

자위대 간부는 일광욕을 하고 싶다는 도미타에게 그늘속에서 일할 때 국가와 국민이 행복하다는 선배장교의 말로 설득을 하고 결국 도미타는 현역 자위대 대원들과 함께 흥신소를 차린다

 

도미타 삼좌와 김차운 1등 서기관은 여러 차례의 업무협조를 통해 잘 아는 사이.

 

여기서 잠깐 영화에서 빠져나와 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암묵적 지시에 의해 이후락이 이철희를 통해 지시하고 김기완 주일 공사- 김동운 1등 서기관 한국의 제임스 본드라 불리던 윤진원등이 사건을 실제 주도한 핵심인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김차운 1등 서기관은 바로 김동운 1등 서기관.

 

김차운이 도미타에게 도저히 디제이를 찾을 수가 없다며 소재파악을 부탁하고 그 와중에 디제이 진영에서는 살해위협이 진행된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는다

 

이 제보의 당사자는 뒤에 밝혀지지만 바로 이 작전 가담을 명령받은 중정요원으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다 목숨을 걸고 제보를 하게 되지만 결국 제보사실이 드러나면서 동요요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김차운이 마땅챦아하는 도미타에게 내 목숨이 걸린 일이며 조직의 일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일이라고 설득하고 협조를 약속받는다

 

71년 대선때 트럭테러로 다리를 절게 된 디제이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일본에서 유신독재 타도에 나선다

 

김기완 공사와 김차운 1등 서기관은 동경의 중정 안가에서 중정요원 6명을 모아놓고 기필고 과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한다

 

이때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김차운의 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전달한다

 

이 회의에서 김대중의 입을 막는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할 때 김차운은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목이라며 간접적으로 박정희의 살해지시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동백림사건때는 납치해 한국으로 데려가서 문제였지만 여기서 없애버리면 된다며 강경론을 편다

 

어렵게 소재파악을 마치고 감시에 나서게 되지만 일본 경시청에서 디제이를 미행하는 중정요원들의 사진을 촬영함에 따라 다시 2명의 요원이 교체됐고 새로 투입된 요원은 임무수행에 갈등하다 이호 주일대사에게 이를 직보한다

 

이호대사가 김기완을 불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김기완은 나도 수차례 만류했지만 어쩔 수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김차운등은 1973 8 9일 디제이가 자민당에서 연설을 하기로 했다며 자민당에서 연설을 하게 되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됨으로 그 전에 디제이를 납치 살해하기로 하고 요원들과 함께 최종 도상연습을 마친다

 

또 도미타에게도 8 8일이 디데이라며 마지막까지 함께 해 달라며 2천만엔을 전달한다

 

도미타는 깜짝 놀라 마지막까지 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자 김차운은 끌어다 주면 뒷처리는 우리가 하겠소라며 자위대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한다

 

김차운은 도미타가 결심하지 못하자 자신의 세 자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이가 문제가 있어 성형수술을 꼭 시켜주고 싶다고 말하는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도미타의 협조를 끌어낸다

 

도미타가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암살이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모두 죽는다는 김차운의 말

 

결국 도미타는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암살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이에 갈등하는 중정요원이 디제이 인터뷰기사를 실은 신문기자에게 접근해 다시 한번 중정의 디제이 암살계획을 제보한다

 

일본의 포르노극장에서 중정요원은 기자를 은밀히 접촉, 내용을 전달하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이 기사가 다른 잡지에 게재된다

 

디제이를 미행해 납치하려던 중정요원들은 현장에서 이 기사를 접하고 다시 한번 철수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번은 디제이를 미행하다 경시청에 사진이 찍히게 되고 한번은 모든 요원을 동원해 결행할 준비를 마쳤지만 납치계획을 실은 기사 때문에 중단하는 것이다

 

도미타는 마침내 2천만엔 수표를 받아들이며 가담을 결심한다

도미타의 가담 결심은 김차운에 대한 의리와 우정이 가장 큰 이유지만 수표를 받은 것은 그가 사랑하던 한국여자, 학생운동을 하다 중정에 끌려가 고문으로 큰 흉터를 남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에게 수술비용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여자는 수표를 거부하게 되고 나중에 도미타는 다시 그 수표를 김차운에게 돌려주게 된다

 

잡지에 암살기사가 게재된뒤 김차운은 요원내 배신자를 찾게 되고 요원들을 동원 디제이 암살 예행연습이라며 그 배신자를 죽이고 시신을 절단해 유기하게 한다

 

각 요원에게 마취 절단 등을 시키던 김차운은 피를 모두 빼내고 절단하려다 도저히 못하겠다며 구역질을 하며 돌아서는 요원의 목을 붙잡고 이제는 돌아설 수 없다고 말한다

 

하수구 시설이 있는 방에서 비닐천막위에 사람을 누이고 절단을 하고 한 요원을 수도호스를 들고 피를 그대로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바로 이날 중정암살계획을 보도했던 기자는 다시 극장에서 중정요원을 만나기로 했지만 이미 살해당한 중정요원은 나타나지 않는다

 

드디어 1973 8 7, 암살실행 하루전 최종점검에 나선다

김기완 주일공사는 제군들 내일 반드시 신병을 확보하도록이라는 말로 엄염을 내린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았던 자위대의 역할은 소재파악에서 끝났지만 이 영화에서의 자위대의 역할을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끝까지 가달라던 김차운의 말에 따라 도미타, 자위대 정보장교 도미타도 호텔에서 함께 디제이를 납치하게 된다

 

이들은 잘 아는 데로 디제이와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만난뒤 방을 나올 때 디제이를 납치하기로 했고 이 경우 목격자는 디제이뿐이라서 디제이만 살해하면 완전범죄라는 구상을 한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 디제이의 먼 친척동생인 김경인 의원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김차운은 디제이를 호텔복도에서 납치하려다 김경인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되고 디제이가 납치된 방으로 돌아와 침대를 걷어차고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절규한다 실패를 절감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작전변경이다 차에 실어

감독은 이 말을 통해 디제이납치가 아니라 디제이 살해가 당초 계획이었음을 알리려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일본경시청이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을 발견, 한국정부를 압박한다

 

자위대가 깊숙히 관여해 사실상 납치를 묵인해 주었으면서도 바로 이 지문을 근거로얼르고 달래고 빰치는 식으로 한국을 갖고 노는 것이다

 

이 지문에 대해 이 영화는 김동운 즉 극중 김차운이 의도적으로 지문을 남긴 것으로 해석한다

 

지문이 발견돼 신원이 확인되면 한국정부등에서 작전에 실패해도 이름이 알려지고 신원이 확인된 이상 자신을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김차운이 지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고 아마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들은 우여곡절끝에 마취된 디제이를 호텔주차장으로 끌고 나와 차에 싣고 오사카로 향하게 되고 자위대원 도미타는 납치 승용차 앞좌석에 앉아 검문검색에 대비한다

 

자위대원이 용금호가 있는 기다리는 부두까지 동행했다는 것도 이 영화의 첫 주장이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일본어에 능하다 하더라도 경찰 검문등을 당할 경우에는 당황해서 탄로가 날 수도 있으므로 일본인 1명을 동승시킨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뒤늦게 납치를 알게 된 재일동포 청년은 자신의 소홀로 디제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엉엉 소리내어 울게 된다

 

한편 부두로 가기전 미행을 눈치채고 안가로 가면서 김차운은 김기완에게 전화를 건다

 

김차운의 전화를 받은 김기완은 당초 살해작전이 실패했음을 알고 이제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살든 죽든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반드시 살려시 돌려보내라고 말한다

 

김차운은 김기완에게 이제 어떻게 하실겁니까라고 묻자 김기완은 이제부터는 나보다는 자네를 먼저 생각하게라고 말한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후배를 생각하는 말같다, 당신 살길만 생각하라는 말이다

 

김차운과 전화를 끝낸 김기완도 위협을 직감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즉시 미국으로 가서 영주권을 신청하고 자신과 딸을 초청해 달라고 당부한다

영화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후일 김기완은 미국에서 살게 되고 [망명인지는 모르겠음] 김형욱의 코치로 한국정부에 디제이 납치사건을 폭로하겠다고 협박, 한국정부로 부터 거액을 챙기게 됩니다  

 

한편 김차운은 통화뒤 야음을 틈타 도미타와 함께 용금호에 가기 위한 통선부두에 도착하는데 느닷없이 검은 승용차가 굉음을 내고 달려온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자위대의 도미타 부하수사관들,

본부로 연행해 오라는 명령이라며 더 이상 관여하면 안된다고 설득한다

 

도미타는 중정요원들과 작별을 고하게 되고 오사카로 오는 도중 2천만엔 수표를 돌려받았던 김차운은 자신이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도미타에게 수표를 자신이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말로 작별을 고한다

 

중정요원들은 코만 내놓은채 얼굴을 비롯해 디제이 몸전체를 테이프로 둘둘 말아싼뒤 통선으로 한시간가량 달려 용금호에 오르고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일본 외해로 도망치는 속에서 갑판아래쪽에서는 디제이를 수장시키기 위해 무거운 추를 메달기 시작한다

 

디제이는 이제는 때릴 필요도 없다 때리지 마라 하느님 상어에게 몸둥아리 반이 먹히더라도 살아나게 해서 한국을 민주화시킬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바로 이때 한 중정요원이 추를 메달면서 디제이의 발등에 손가락으로 안심이라는 글을 쓴다

 

이 중정요원은 갑자기 총을 빼들어 김차운등에게 겨누며 이사람을 죽이면 안됩니다 ,. 김선배님 상호 죽이는 일은 그만합시다라고 울부짖는다

 

김차운은 네놈이 배신자구나, 남산 지하 5층에서 이 세상 하직할 준비나 해라고 외치다 헬기 소리라 들리면서 방심하는 틈을 타 배신자로 낙인찍은 중정요원을 총으로 제압한다[디제이의 생환뒤 기자회견에서 이 부분은 없어 '픽션'으로 추정]

그뒤 김차운은 갑판으로 뛰어올라와 헬기를 향해 총을 발사하며 너희들이 무얼 알느냐 상관하지 마라 돌아가, 참여할 권리가 없어 라고 울부짖는다

 

김차운이 헬기에 총을 쏠 동안 헬기에서는 모르쓰전신을 통해 용금호에 무전을 보낸다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

 

역사의 전환점이다 만약 이때 수장됐다면 한국 현대사는 다시 쓰였을 것이다

헬기, 비행기부분에 대해서는 디제이는 들었다고 진술했지만 중정요원들은 완강히 부인한 부분이다

 

장면이 바뀌고 자위대로 연행된 도미타

 

도미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자위대에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가게 즉 흥신소를 열어 중정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간부는 권총 한정을 도미타에게 내민다 총알은 한발만 들었네라는 말과 함께

 

자결하라는 의마다

 

그러나 도미타는 일본 자위대는 미군의 제2중대다, 일본은 미국의 엘로몽키다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며 자신은 자결하지 않을 것이라며 쓸쓸히 자위대를 떠난다

 

조직에서 버림받은 도미타의 등뒤로 자네는 이미 흥신소 차리기 전날 전역한 것으로 처리했네, 자네 몸은 스스로 지키도록이라는 냉정한 말만 들려온다

 

디제이는 부산을 거쳐 결국 6일만에 서울의 집으로 돌아온다

 

도미타는 자위대에서 나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마지막 우정을 발휘한다

 

김차운이 보험을 든다며 지문을 남긴 것을 의식, 사건현장에 김차운의 지문이 있음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림으로써 김차운의 목숨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다

 

도미타는 중정 암살계획을 보도한 기자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며 보도를 부탁하고 자신은 이미 시골에 숨어 지내겠다고 작별인사를 ㅎ나다

 

그러면서 도미타는 다시 이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의 단서를 남긴다

 

일본 자위대 최고위간부가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라고

결국 그래서 자위대가 디제이 납치 살해기도사건에 관여했다는 배경설명이다

 

시골 깊숙한 것으로 잠적한 도미타, 자위대는 도미타의 행적을 찾지 못하다 납치사건 약 3개월뒤인 11 2일 마침내 그를 찾는다

 

도미타의 한국인 애인이 도미타가 있는 시골을 방문하게 되고 자위대가 그뒤를 밟은 것.

 

도미타는 사랑하는 여인을 마중하기 위해 시골 간이역으로 나간다
간이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간이역은 만남과 헤어짐이요 설렘이자 아픔이다 

도미타에게 간이역은 헤어짐이요 아픔이었다
그가 경멸했던 것들과의 영원한 헤어짐.

영화는 도미타가 총에
맞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마침 이날은 일본이 이사건이 한일 양국간에 원만히 마무리됐음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이상이 이영화줄거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일본 자위대가 깊숙히 개입했다는 전제하에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에 가담한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자위대의 백% 깊숙한 개입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이영화가 일본에서 제작, 상영됐음을 감안하면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국민을 어떻게 취급할까요

 

조센징은 역시 바가야로. 말도 한마디 못하구나하지 않을 까요

 

사족입니다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그늘에 살아가는 정보요원들의 터질듯한 고뇌를 잘 그려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 갈등하면서도 일부는 목숨을 걸고 대항했고, 일부는 살기 위해서 무조건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속에 악역을 맡아야 했던 한일 정보요원들의 아픔이 어렴풋이 나마 드러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실감나게 느꼈다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꼭 한번 KT를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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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살해기도사건관련 국정원 진상보고서는 자위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정 전문, 보고서등이 수록돼 있어 한번
살펴볼 가치는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분은 이블로그 과거사 의혹 진상보고서 편을 참고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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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김형욱이 실종된지 30년이 됩니다 하나씩 그동안 제가 조사한 자료를 밝혀나갈까 합니다
우선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한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보고서 전문을 보기쉽게 10부분으로 나눠서 올려봅니다
생각보다는 자료가 상세해 실종사건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데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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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실종사건 국정원 과거사위 진상조사보고서 전문 5-10 captured by 안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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