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8일 일요일 이른 아침. 최재경(51·사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현 전주지검장)은 ㄱ검사의 집 앞에 있었다. 검찰 특별수사의 사령탑인 대검 중수부장이 휴일 아침 댓바람부터 서울중앙지검 소속 평검사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이다. ㄱ검사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팀의 일원이었다. 부실수사로 이미 한번 망신을 당한 검찰은 재수사를 시작하면서 ‘사즉생의 각오로’ 진실을 밝히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그러나 ㄱ검사는 검찰 지휘부가 ‘사즉생의 각오로’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ㄱ검사는 하루 전인 4월7일 새벽 사표를 썼다. 지휘부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때문이었다. 최 중수부장은 ㄱ검사의 마음을 돌리려 그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원본출처 http://news.zum.com/articles/5361730
■ 최재경 중수부장, 핵심 물증 수사팀 전달 막아 검찰은 2012년 3월16일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에 착수했다. 2010년 1차 수사 때 지원관실 하드디스크를 영구 삭제한 혐의(증거인멸)로 법정에 섰던 장진수(40) 주무관이 “증거인멸을 지시한 건 청와대”라며 녹취록 등을 폭로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당시 부장 박윤해)를 중심으로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수사팀은 일주일 뒤인 3월23일 이영호(49)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 이인규(57) 공직윤리지원관, 그리고 장 주무관의 지원관실 전임자였던 김경동 행정안전부 주무관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김경동 주무관은 2010년 7월 검찰의 1차 수사 착수 직전 지원관실로 찾아와 컴퓨터 자료를 삭제하고, 최종석(43) 청와대 행정관이 장진수 주무관을 회유할 때 동석했던 인물이다. 검찰은 김 주무관의 집에서 이동식저장장치(USB·유에스비)를 확보했고, 이를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에 보내 데이터 복구를 의뢰했다.
수사팀은 시간이 촉박했다. 관련자들이 1차 수사 때처럼 또 입을 맞추고 증거를 인멸하기 전에 물증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데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에 보낸 김 주무관의 유에스비 분석 결과가 2주일이 지나도 수사팀에 오지 않았다. ㄱ검사는 대검에 “유에스비 분석 결과가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느냐”고 문의했다고 한다. “복구 및 분석은 진작에 끝났는데, 유에스비에서 출력된 자료가 중수부장실에 가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사팀에 전달돼야 할 자료가 중수부장실에서 ‘발이 묶인’ 형국이었다.
김경동 주무관의 유에스비에서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라는 제목의 문건이 복원됐다. 이른바 ‘일심 충성’ 문건이다. 지원관실을 “브이아이피(VIP)께 일심으로 충성하는 별도 비선을 통해 총괄지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밖에도 지원관실의 비선 활동을 입증하는 다수의 문건이 김 주무관의 유에스비에서 튀어나왔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최재경 중수부장이 틀어쥐고 수사팀에 전달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는 얘기다.
상부서 “총선전 진경락 조사말라”…결국 총선 지나 체포
‘증거인멸전 신병확보’ 지휘부가 막아…검사 셋 “사표 내겠다” 불만 표출도
권재진 장관-최재경 중수부장-최교일 서울지검장 ‘TK 라인’이 방패노릇
■ 검찰 “사표 낸 검사 없다” 거짓말 ㄱ검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앞서 지휘부의 수사 방해에 항의하며 다른 검사 2명과 함께 ‘사표를 내겠다’는 뜻을 밝힌 적도 있었던 탓이다. ㄱ검사는 4월7일 토요일 새벽에 사표를 썼고,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은 발칵 뒤집혔다. 주말이었지만 ㄱ검사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동료 검사와 선후배 검사들이 전화를 걸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ㄱ검사는 사의를 접지 않았다.
4·11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최 중수부장의 수사 방해와 ㄱ검사의 사표 제출 소식이 밖으로 알려질 경우 파장이 클 터였다. 더욱이 수사팀의 다른 검사들도 ㄱ검사의 사의 표명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일이 커지자, ‘원인 제공자’인 중수부장이 일요일 아침 직접 ㄱ검사를 찾아간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최 중수부장이 ㄱ검사의 사직을 막은 건 ㄱ검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도 살고 판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한 것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최 중수부장을 만난 ㄱ검사는 사의를 접었다. 다른 검사 2명도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5일 뒤인 4월13일, 검찰은 수사팀에 검사 5명을 새로 투입하면서 사직에 동참하려 했던 ㄴ검사를 수사팀에서 빼내 원래 부서로 복귀시켰다. 검찰은 그 이유에 대해 “ㄴ검사가 기소한 피고인의 공판을 챙기기 위해서”라고 둘러댔다.
그 무렵 검찰 안팎에서 ‘검찰 지휘부의 수사 방해에 항의해 검사가 사표를 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검찰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공식 부인했다. 파국으로 치달을 뻔했던 ‘사표 파문’은 그렇게 넘어갔다. ㄱ검사는 서울중앙지검에 더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그해 7월 정기인사 때 근무지를 옮겼다. 검찰 관계자는 “최 중수부장이 자신이 가진 영향력으로 검사 인사에 힘을 써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고 말했다.
한편, 최 전 중수부장은 2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경동씨 유에스비 출력물에 관해 저나 중수부가 중간에서 전달하거나 본 적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 검사들, 진경락 수사 방해 때도 집단 사의 민간인 사찰 사건 수사에서 핵심 인물은 진경락(46)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었다. 진 과장은 지원관실의 비선이었던 이영호 청와대 비서관의 심복으로 ‘일심 충성’ 문건을 작성했다. 또 검찰의 1차 수사 당시 이영호 비서관과 최종석 행정관을 대신해 증거인멸 혐의를 쓰고 구속기소된 ‘희생양’이어서, 재수사에 협조할 이유도 충분했다. 진 과장이 매달 지원관실의 특수활동비 280만원을 이 비서관 등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에 상납했다는 주장도 나온 상태여서, 소환조사에 불응하면 업무상 횡령 혐의로 체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말 맞추기와 증거인멸이 이뤄지기 전에 진 과장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수사팀은 재수사 착수 10여일 만인 3월27일, 진 과장에게 출석을 통보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귀띔을 받은 듯 진 과장은 나오지 않았다. 4월7일 소환 통보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서둘러 진 과장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검찰 지휘부가 이를 막아섰다. 검찰 관계자는 “상부에서 4·11 총선 전에 진경락 과장을 조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에 불리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의 확대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검사 3명이 3월 말 박윤해(47) 부장검사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했다. 쌓였던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성격 좋다’는 평을 듣는 최교일(51)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사들을 불렀고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다독였다. 수사팀은 총선 다음날인 4월12일에야 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
■ 권재진-최재경-최교일, 티케이(TK)라인이 방패막이 복수의 검찰 관계자들은 “권재진 법무부 장관의 뜻이 최재경 중수부장과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을 통해 전달됐다. 총선을 앞두고 진경락을 조사하거나 구속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권 장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권재진(60) 장관은 검찰총장 인선 과정에서 한상대(54) 총장을 탐탁지 않게 봤기 때문에 한 총장 취임 뒤에도 두 사람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권 장관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한 총장을 배제하고 수사에 개입했다고 한다. 그 통로는 ‘티케이’(TK, 대구·경북) 출신인 최재경 중수부장과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은폐를 위해 검찰 내 ‘티케이’ 세력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권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1년 7월까지 2년 동안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며 이명박 대통령을 보좌한 최측근이다. 그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민정수석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직행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반대했지만, 이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권 장관은 2010년 검찰의 1차 수사 당시에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재직했고, 민간인 사찰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이미 이영호 비서관이 지원관실을 비선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대통령이 권 장관을 내정한 시점은,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 상고한 장진수 주무관이 “청와대가 증거인멸을 지시했다”는 내용의 상고이유보충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이 대통령이 권 장관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방패막이’로 썼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최재경 중수부장의 출생지는 경남 산청이지만 대구고를 나왔다. 검찰 내 티케이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특별수사 쪽에서 이름을 날린 최 중수부장은 검찰 안에서는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특수검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권 장관한테는 ‘매우 아끼는 후배’였다. 최교일 지검장은 경북 영주-고려대 출신으로 이 정권 들어 제일 잘나간다는 이른바 ‘티케이케이’(대구·경북-고려대) 검사였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권 장관의 ‘뜻’은 최 중수부장과 최 지검장에게 전달됐고, 두 사람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총선 전에 진경락 과장에 대한 수사를 못하게 한 것은 물론, 사건의 폭로자인 장진수 주무관의 집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시킨 것도 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검찰 관계자들은 전했다. 검찰 관계자는 “권재진 장관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인 사찰 사건 수사는 애초부터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청법은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 재수사 팀장도 ‘티케이’…“애초 수사 의지 없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는 사건 배당부터 수사 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한때 특별수사팀을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심재돈) 중심으로 꾸리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한상대 총장이나 권재진 장관이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 이국철 에스엘에스(SLS)그룹 회장 수사를 통해 신재민(55)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과 이상득(78) 전 새누리당 의원의 보좌관 박배수(47)씨를 구속했던 특수3부에 사건을 맡기면 통제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건은 박윤해 부장검사가 이끄는 형사3부에 배당됐다. 박 부장검사는 1차 수사 실패의 책임이 있는 노환균(56) 전 서울중앙지검장(현 법무연수원장)과 같은 경북 상주 출신이고 공안통 검사였다. 검찰 관계자는 “박 부장검사는 성격이 말랑말랑하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다. 특수부가 아닌 형사부, 형사부 중에서도 박 부장검사에게 사건이 간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건이 형사3부에 배당되면서 수사의 결말이 이미 예견됐다”고 말했다.
수사를 막으려 했던 상부의 뜻은 서울중앙지검 송찬엽(53) 1차장-박윤해 부장을 거쳐 수사 검사들에게 전달됐다. 이로 인해 ‘현장 책임자’인 박 부장검사와 수사 검사들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수사 검사 3명이 ‘수사를 망치려는 수사 지휘’에 대한 불만이 쌓여 박 부장검사한테 사표를 내겠다고 항의하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검사들은 “검사가 의지를 가지고 수사해야 겨우 진실의 20~30%를 밝힐까 말까 한다”고 말한다. 검찰 지휘부가 앞장서 수사를 방해한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가 그랬다. 수사 검사들은 ‘사표’로 저항해 보기도 했지만, 정의보다 권력을 선택한 지휘부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렇게 진실은 묻혔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