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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해외부동산/삼성

나는 이건희의 알바였다


지난 여름 나는 약 2달간 삼성 이건희 회장 가족의 독일여행을 도와주는 '알바'로 일했다. 지금부터 그때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삼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국가 수출의 20%를 담당하고 상장기업 주식가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삼성은 반도체와 휴대전화로 세계를 누비며 자칭 '초일류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 1위가 삼성이며,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이건희 회장이다.

그러나 이와는 모순되는 또다른 삼성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세금을 적게 내고 대물림하려 했다는 변칙 상속 증여의 의혹을 계속 받아왔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절대로 안된다"던 이병철 선대 회장의 뜻이 그의 눈에 흙이 들어간 한참 뒤에도 여전히 굳건히 지켜지고 있는 '무노조 삼성'의 이미지가 있다.

이러한 모순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 이중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지난 여름, 약 두 달간이라는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나는 삼성의 '알바'가 되어 삼성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세계 일류를 꾀하고자 하는 기업의 업무 시스템 및 삼성 직원들의 업무 능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노조 경영' 혹은 '황제식 경영'을 통해 형성된 노사 관계가 일반 직원들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게 만드는가를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지난해 8월 베를린에서는 무슨 일이

지난해 8월 2일자 연합뉴스의 한 기사는 이렇다.

… 2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이 회장은 오는 13일 아테네올림픽 개막식과 이에 앞서 열리는 11~12일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6일 삼성그룹 업무용 비행기편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11일(현지시간) 올림픽 주경기장 인근의 '삼성홍보관' 개막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이와 함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삼성전자 현지법인과 헝가리의 삼성SDI 브라운관 공장 등을 방문해 현장경영에 나설 계획이다.…

그로부터 거의 한 달 뒤인 8월 31일, 이 회장의 유럽 순방 일정과 관련한 기사가 뒤따랐다.

… 31일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 회장은 3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인근에 위치한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삼성SDI 복합단지를 방문, 업무보고를 받고 현장 근로자들을 격려한데 이어 31일에는 슬로바키아 갈란타의 삼성전자 사업장을 방문한다.…

그런데 8월 중순 아테네에서의 공식일정과 8월 말의 헝가리 및 슬로바키아 법인 방문 일정 사이에 이 회장의 일정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언론 보도도 찾아볼 수가 없다. 언론 보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기간 동안에 계속된 이 회장의 일정이 바로 올 여름 나와 삼성을 관련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일정은 8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이 회장과 그 가족의 독일 관광이었다.

알바가 되다... '프로젝트'의 첫 출발

이건희 회장과 그 일가의 독일 관광은 8월 중순의 단 1주일이었지만, 삼성 독일 주재원들과 알바생의 준비는 두 달 전부터 시작됐다.

6월 초 어느 날. 베를린 소재 삼성SDI 독일 법인에서 통역 및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배를 통해 삼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 나와 삼성 그룹 사이에 맺어진 인연의 첫 출발이었다.

약 일주일여 간 번역과 통역을 하고 나서 다시 논문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6월 말의 어느 날, 삼성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당장 와서 일할 수 없겠느냐"고. 전화를 건 중년 남성은 훈민정음 프로그램의 구사 능력과 도표 및 차트 작성 능력을 묻고 있었다. 나는 가능하다고 답하고 다음날부터 삼성 SDI 독일법인으로 출근을 했다.

그날로 나는 인사과 한 간부로부터 일을 의뢰 받았다. 그는 A4 용지 이면지에 자신이 대략적인 그림으로 그린 내용을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일단 만들어주기를 원했다. 베를린 쉐네펠트 공항에서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인 아들론 호텔까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서 아들론 호텔까지, 아들론 호텔에서 관광명소인 포츠담 상수시 궁전까지 등 몇가지 장소의 동선과 이동 도로명, 주변의 명소 등에 관해서….

삼성의 한 해외 법인이, 베를린 최고의 특급 호텔인 아들론에서 시작해 각종 관광 명소에 관한 정보와 이동 동선을 작성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물론 누가 오는지는 당시 분명하지는 않았다. 삼성 내 그 누구도 방문 주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마치 그것을 금기시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일을 시작한지 며칠 후에는 파일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는 아들론 호텔의 최고급 숙박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Presidential Suite)에 관한 사진 자료들과 평가, 베를린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기본 정보, 인근 포츠담 상수시 궁전과 포츠담 회담으로 유명한 세실리엔 궁에 대한 정보, 리무진 임대업체, 베를린 공항 정보, 그리고 여행 가이드 후보들에 대한 여타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기존에 누군가가 자료 조사를 해놓은 것이었는데, 나를 비롯한 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의 임무는 앞으로 이러한 자료들을 계속해서 조사하고 보완하는 일이었다.

우리 학생 알바들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그 일가의 유럽 방문 일정과 관련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본적인 정보 데이타 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베를린의 관광 명소, 산업-교육 인프라, 박물관-미술관 전시 정보 등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등의 일을 했다. 이는 박식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의 독일 및 베를린 방문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한편, 회장의 여러가지 의문 사항에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상 시나리오에 대한 100% 준비

7월 초부터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의 대기 및 작업 공간이었던 3층 방에서 회의실로 쓰이는 1층 퀘페닉(Koepenick)실로 자리를 옮겼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옮겨놓고 본격적으로 자료 정리를 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이외에도 자료 조사에 필요한 인력이 더 보강되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곳에서 차근차근 요구되는 자료들을 인터넷이나 서적을 통해 찾고, 번역하고, 그리고는 요구되는 형식에 맞게 요약, 정리하는 작업들을 꾸준히 해나갔다. 8시 반에 출근해서 점심과 저녁을 회사와 인근 중국 식당에서 떼우면서 북유럽의 긴 해가 지고 컴컴한 밤이 되도록 자료들을 번역하고 정리했던 것이다. 7월 말로 예상된 프랑크푸르트 삼성 구주본부의 일차 점검 기간까지 말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료 조사의 주문이나 내용도 늘어났고, 그에 따라서 작업 강도도 점점 더 세졌다. 주말 휴일을 보내는 것은 날이 갈수록 불가능해졌다. 회장 일가의 예상 방문지 및 동선, 독일 주요 기업에 대한 정보, 독일 명문가, 베를린 쇼핑 명소, 최고급 레스토랑,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등에서부터 개(犬)학교에 이르기까지 회장 일정과 관련될 만한 모든 정보를 싹싹 긁어모아서 정리했다.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그에 관련되는 정보들을 100% 확보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인 요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분 입맛에 맞을까? 레스토랑 조사 및 시식

가령 베를린 소재 최고급 레스토랑에 관한 기본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하는 것은 우리 조사팀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직접 답사를 가서 분위기를 살피고, 또한 요리 종류들을 주문해서 시식해보고 평가를 해서 후보군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하는 등 답사조의 역할은 삼성SDI 독일 법인 주재원들의 몫이었다.

이 경우 나 또한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주재원 3명과 함께 시식을 하면서 전반적인 분위기, 인테리어, 메뉴 등을 직접 조사 및 평가를 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 불여일식(不如一食)인 법. 4명이서 샴페인을 시작으로, 독특한 소스를 곁들인 손가락만한 사슴고기 조각이나 생선 조각을 먹으며 각자 맛이 어떠한지를 품평했다.

난생 처음 보는 이 낯선 음식들에 대한 품평회는 일단 우리 각자의 미각에 근거하지만, 핵심은 그 최종 시식자에게 어떠할 것인가를 중심에 두고 추체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최종 시식자가 누구인지는 불문가지이다.

최종 시식자의 사적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과정의 하나로 삼성 SDI 법인 주재원들과 한 알바의 레스토랑 품평회에 지불된 비용은 이곳에서만 총 280유로(한화 약 40만원). 조사 후보군에 포함된 베를린의 최고급 레스토랑들만 해도 약 10여 곳. 업무 시간에 법인의 주재원들이 총수의 여행 준비를 위해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출동'한 이 '행복한' 업무분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 시식 비용은 이 회장 개인 주머니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삼성 SDI 법인의 공적 비용으로 처리되었을까?

그것이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회사 직원도 아닌 비정규직 임시 알바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세계 초일류 기업에서 설마 이러한 사소한 비용계산 하나 공사 구분 제대로 못하고 처리했을리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아들론 호텔의 상황실과 이 회장 숙소 준비

8월 초에 들어서 자료팀의 소재지였던 삼성SDI 독일 법인의 사무실에서 이 회장 일가의 숙소인 아들론 호텔로 이동했다. 아들론 호텔 2층에 위치한 2개의 회의실을 세내 제1회의실은 상황실로, 제2회의실은 운전기사 및 가이드들의 대기실로 이용했다.

이 회장 일행이 묵을 방들은 이미 몇 주 전부터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다른 준비팀들은 회장 일가들이 묵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설비들을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회장을 위한 삼성 초대형 평면 TV 설치에서부터 휴지 비치에 이르기까지 손이 안 간 구석이 없을 정도였다.

이 회장 본인이 묵을 아들론 호텔 512호 프레지덴셜 스위트와 주변 5층의 방, 그리고 4층의 방들을 포함한 수십개의 방들은 모두 삼성에서 세를 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복도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서울본사 비서팀의 상황실이 별도로 있었고, CCTV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모두 체크하게 되어 있었다. 가끔 본사 비서팀에게 식사나 필요한 것들을 전달하러 갈 때에는 일급 VIP 일행이 지근거리에 있다는 긴장감으로 걷는 것 하나라도 조심스러웠다.

5층 본사 비서팀이 이 회장 일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최일선의 팀이고, 이 팀을 지원하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삼성 구주본부와 SDI 베를린 법인의 주재원들로 구성된 2층 상황실의 역할이었다. 우리 알바 학생들은 2층 상황실에 상주하면서 그때그때 급하게 요구되는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역할과 더불어 주재원들과 함께 필요한 물품들을 조달했다.

회장님 영접 전야의 긴장감

원래 이 회장은 그리스 일정을 소화한 후 터키를 거쳐 독일로 오려 했으나, 터키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터키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독일로 날아왔다. 그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터키 법인에서는 지금쯤 만세를 부르고 있겠구만."

더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주재원들을 더욱 더 긴장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에서 이 회장이 관광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가이드에게 뭔가 전문적인 지식과 관련된 내용을 물었으나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좀 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부터였다. 이 회장이 도착하는 8월 18일까지는, D데이가 점점 다가온다는 압박감과 함께 이러한 '사고사례'가 덧붙여져 긴장은 날로 더해갔다.

영어 약자로 불리는 여행객들

상황실과 관련문서 속에서 삼성 일가의 이름은 영어 약자로 불렸다. 마치 3김이 본명 대신 영어 약자인 DJ, YS, JP 등으로 불리듯이 말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A, 부인인 홍라희씨는 A', 그들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JY, 그의 부인인 임세령 씨는 JY', 장녀 부진 씨는 BJ, 차녀서현 씨는 SH, 그리고 그 남편은 SH'로 불렸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삼성 그룹 총수의 직계 가족들인 이씨들은 모두 자기 이름의 약어로 불린 반면(그러나 특별히 이 회장은 알파벳의 제일 첫 문자로 지칭됨), 부인·며느리·사위는 배우자 이름 약어에 단지 2차적 관계를 표시하는 <'>로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이재용씨 부부의 아들인 JH군과 서현씨의 딸인 JE양 또한 동행했다. 베를린 여행 및 방문 일정에는 삼성 구주전략본부장인 양해경 부사장이 항시 동행하면서 이 회장을 보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이 회장 일행의 일상적 편의를 지원하기 위한 인력 또한 동행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다

홍라희씨가 한번은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저희 때문에 여기 법인 주재원 분들께서 고생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홍 여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삼성SDI 독일 법인의 한국 주재원들 대부분이 2층 회의실로 출동한 상태였으며,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삼성 구주법인 직원들도 아침부터 밤 11시 너머까지 호텔 회의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그곳에 상주했다.

그런데 이 회장 일가는 호텔 2층에 그들의 여행을 지원할 상황실이 차려져 있으며 그곳에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한국 정부의 어느 기관의 모토가 이렇게까지 잘 들어맞는 경우가 또 어디 있을까?

그 당시 나는 이 회장이 "준비하느라고 수고한다"며 격려차 잠깐이라도 상황실에 들르지 않을까 생뚱맞은(?)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상은 역시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상황실과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들 중 가이드와 운전기사, 그리고 이 회장 일가가 이동을 할 때 나서는 지원조를 제외하고 그 당시 이 회장 일가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이 회장 및 가족들이 호텔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무전으로 들어오면 2층 회의실 근방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학생 알바를 포함한 모든 주재원들은 이 회장 일가가 숙소로 올라갈 때까지 회의실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존재였으므로.

베를린에서의 차량 접촉사고

이동 동선과 일정은 역시 그룹의 총수인 이 회장을 중심으로 짜여졌지만, 이 회장의 손자 손녀인 JH군과 JE양 등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또한 삼성 주재원들의 몫. 동물원이나 놀이공원, 유람선 등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또 자료조인 내가 할 일이었다.

아무튼 자료조가 수집한 자료에 따라 주재원들과 가이드, 유모들이 JH군과 JE양을 차에 태우고 목적지 별로 이동하던 어느 날, 동물원에서 포츠다머 플라츠로 이동하는 도중에 도로에서 가벼운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한 독일 운전자가 몰던 BMW 승용차가, 일행들이 타고 있던 벤츠 승합차가 신호 대기 상태에 있을 때 뒤에서 살짝 받은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차량 내에서 느끼기에는 급브레이크를 살짝 밟은 정도의 충격만 있고 어느 누구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독일 운전자의 과실인 것은 명백했다. 일단 사고가 난 뒤 서로 운전자들이 내려서 상태를 살피던 중에 사고차량 독일 운전자가 핸드폰을 꺼내서 경찰에 전화를 하는데, 바로 그 핸드폰이 재미있게도 바로 삼성 제품이었다고 한다.

이 독일인은 자기가 애용하고 있는 핸드폰 회사 총수의 손주들, 아니 한 세대 뒤에는 혹시 삼성그룹의 또다른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가 타고있던 자동차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아무튼 우연히 일어난 사고 속에서도 삼성 제품을 확인할 만큼 세계 속의 삼성은 베를린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투샨'과 '타쉔'....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이 회장 일가 방문 일정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물품구입 주문이 떨어졌다.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미즈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등 20세기 건축사의 슈퍼스타들과 관련한 건축 도서들을 베를린의 건축 및 미술 관련서 전문 취급 서점에 가서 구입하는 것.

누가 이것을 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비정규직 알바생에게 쓸모 없는 법. 그 물건들을 가서 사온 후에 다시 추가 주문이 떨어졌는데, '투샨'이라는 건축 관련 잡지(?)를 구입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과 관련한 건축잡지는 인터넷 검색을 해도, 서점에 문의를 해보아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주문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다시 비서팀에 문의를 해서 알아내면 될 것을,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문을 확실히 확인해달라는 나의 요구에도 상황실의 주재원들은 답답해 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건축 및 미술 관련 유명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다룬 책들이 '타쉔(Taschen)'이라는 총서 형식으로 발간된다는 것을 우여곡절 끝에 알게 되었다. 외국어이다보니 주문 전달과정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문제는 문제해결 과정이 의사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회장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다보니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부실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 최고급 호텔의 엘리베이터에 갇히다

이 회장이 다음 기착지인 이태리 밀라노로 떠나기 전날 저녁, 기어코 일이 터졌다. 거의 모든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좀 여유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회장과 그의 가족들 및 수행원들이 아들론 호텔 지상층에 위치한 '차이나클럽'이라는 중국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회의실 옆 복도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데 상황실에 있던 주재원들이 긴장되고 상기된 얼굴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뭘까? 마지막 날이라고 총수가 그동안 수고했던 주재원들에게 격려인사라도 하려고 하려는 것일까? 물론 앞서 얘기했듯이, 이는 지극히 순진한 착각이었다. 회장 일가에게 우리를 포함한 주재원들은 호텔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알고 보니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5층 숙소로 올라가던 이 회장과 그 가족들 및 수행원들이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그 안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꼼짝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상기된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주재원들은 바로 그 사고를 수습하러 가던 길이었다. "회장님 올라가셨습니다"라는 보고가 있고 몇 분이 지났는데도 이 회장 일행이 올라오지 않자 5층 비서실에서 이 회장 일행이 올라오지 않았다며 상황을 다시 체크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진 직후였다.

회장 일행은 호텔 직원들까지 달려와 엘리베이터를 다시 작동시킨 뒤에야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나서 일행 중 어느 누군가가 "좋은 경험 했구만!"이라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수행원, 특히 비서실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중한 상황이 발생한 것임을 의미한다.

사고가 수습되고 난 뒤 내가 잠시 상황실 자료를 점검하려고 문을 연 순간, 회의실 탁자 한 가운데에 이제까지 못 보던 사람이 앉아 있고, 나머지 긴 탁자를 따라 주재원들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5층 비서실에서 누군가 내려오면 그날은 엄청 '깨지는' 날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 회장이 출발하기 하필이면 바로 하루 전날 그런 일이 터졌던 것이다.

철수 작업.... 이 회장 숙소를 돌아보니

8월 24일 이 회장 일행이 '드디어' 밀라노로 떠나고나자 남은 뒤치닥거리 또한 삼성 직원들의 몫이었다. 짐들을 옮기며, 사진으로만 얼핏 보았던 프레지덴셜 스위트와 다른 가족들이 묵었던 고급 객실들을 둘러보았다.

보통 호텔 객실이라고 하면 방 하나에 침대와 가구들이 놓여있는 것을 연상하지만, 그날 내가 둘러본 객실들은 마치 주택처럼 여러 방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나 프레지덴트 스위트는 워낙 넓고 방도 많아서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찾느라 잠깐 헤매기도 했다.

나와 다른 한 직원에게 부여된 '철수' 작업은 선물용으로 포장된 삼성 캠코더, 디지털카메라 및 MP3를 박스에 넣고 밀봉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일단 이들 물건의 포장 및 목록작성을 마친 후에는 이 회장의 다음 기착지로 보낼 최고급 포도주를 포장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도주 포장을 끝내고 나서야 우리 작업은 일단 끝났다. 모든 뒤치닥거리, 아니 '프로젝트'가 모두 끝난 것이었다.

초일류 기업다운 회장님 모시기는?

이건희 회장의 유럽 일정은 삼성이 공식후원하는 아테네 올림픽에 참석하고, 삼성의 현지공장을 돌아보는 등의 공적 일정이 분명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바로 상황실에서 주재원들과 동고동락했던 시기인 8월 18일에서 24일까지의 독일 체류속에서 공적 일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베를린 장벽 관람, 포츠담 상수시 궁전 산책, 국립박물관, 베를린 필하모니 방문이 삼성그룹 회장의 공적일정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건희 회장의 8월 유럽일정은 앞뒤의 공적 일정 중간에, 적어도 베를린에서 8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일주일 간은 사적 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사적 일정까지도 약 50여 명의 국내외 삼성 회사법인 직원들이 동원돼 일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 중에 내가 알바로 동참한 상황실 팀은 이 회장의 독일체류 1주일을 위해 무려 2개월간이나 준비를 한 셈이다.

그들중에는 현지 삼성공장의 운영을 담당하는 주재원들도 있었는데 이 회장이 베를린에 체류한 날 중 어떤 날은 그들이 호텔 상황실에서 이메일을 통해 공장 운영 상황을 체크하는 모습을 보았다. 불량율을 줄이고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해야하는 공장운영 담당자들이 총수 일가의 여행을 보좌하기 위해 그렇게 공장을 떠나 있는 모습이 내게는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건희 회장은 삼성 독일법인이 자신의 1주일간의 독일여행을 위해 2개월전부터 회사조직을 동원해 준비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삼성 독일법인이 '과잉충성'을 한 셈이다. 만약 이건희 회장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자신의 1주일간의 여행을 위해 삼성의 고급인력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동원됐는지를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그 '음지에서의 작품'을 만들어낸 이들을 칭찬할까 나무랄까?

'초일류 기업' 삼성의 회장님은 워낙 그 비중이 중요하니 사적 일정에도 공적 조직에 의해 2개월전부터 레스토랑 시식까지 하면서 모셔져야 하는가. 아니면 삼성이 진정한 초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회장님 모시기도 이젠 바뀌어져야 하는가?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고 싶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600&no=206467&rel_no=1&inde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