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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자유시장경제와 나의 삶 -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 [퍼온글]

나는 삶의 경험과 학문세계 탐색을 통해 자유시장주의자가 되었고,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원본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06/2013120601274.html?news_Head1

◇ 북으로 간 큰 형이 의문을 남기다

나는 가끔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가 남쪽에서 태어나지 않고 북쪽에서 태어났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나의 성장과정과 관련된다.

나 는 시골 한학자의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7년, 나의 큰 형은 20살의 나이에 혁명가의 꿈을 품고 북으로 갔다. 큰 형은 이미 18세 나이에 만주 벌판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줄곧 곁에서 지켜본 나는 이념이 무엇이란 걸 어렴풋이 느낄 때까지 형은 왜 북으로 가야만 했을까 오랫동안 의문을 달고 살았다. 내가 20대 초반 문학도를 꿈꾸며 헤밍웨이, 바이런 등을 읽고 나서야 나의 큰 형도 1940년대의 세계적 사회주의 열병을 앓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게 되었다.

나 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장학금을 받고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대학의 비리를 규탄하는 조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2학년 마치고 퇴학당했다. 2년 후 편입하여 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모교의 대학신문사 일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현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66년 6월경이라고 생각된다. 한자로도 이름이 같아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필요할 때 자문을 해주시던 당시 한국일보 박동운 논설위원님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의 한 마디는 한 ‘찰라’에 역사학도를 꿈꾸던 나를 경제학도로 바꿔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정교사를 두고 쌔뮤엘슨의 『경제학 3판』을 공부하신다네.”

당 시 세계적 화두는 ‘후진국 경제발전’이었다. 나는 전남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원 졸업 전인 1969년 나는 미국연방정부 장학금을 받고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가 있는 하와이대에서 공부할 행운을 얻었다.

북으로 간 큰 형 관련 연좌제와 처음 들어간 대학에서의 비리 규탄 경력이 미국 유학을 앞둔 나를 무척 괴롭혔다. 행운의 여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학 기초가 없었던 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나는 해냈다. “자네가 넘어지면 대한민국이 넘어지네”라는 은사님의 격려가 힘이 돼 주었다.

◇ 밀튼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를 읽고 자유시장주의자가 되다

공 부를 마치고 전남대 상경대로 온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심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자신이 한낱 ‘지식 전수기(傳授機)’에 지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어떻게 한 경제학 공부인데!'

힘든 나날을 보냈다.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0년 가을로 기억된다. 전 해에 출간된 밀튼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⑵가 손에 들어왔다. 부리나케 읽어갔다.

어 둠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 느낌이었다. 프리드먼의 구구절절 명쾌한 자유시장경제 지지 논리는 나를 감동의 세계로 빠뜨렸다. 밀튼 프리드먼의 논문과 책들을 대부분 다 읽어 치웠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가 되어갔다. 사실 나는 누구에게서도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배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자생적(自生的)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선 택의 자유』로부터 나는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하나는 내 삶속에 오랫동안 자리했던 숙제 하나가 풀린 것이다. 프리드먼은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개인의 자유는 자유시장경제에서만 보장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선택의 자유』는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주의를 찾아 북으로 간 나의 큰 형을 바보로 낙인찍었다.

북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큰 형의 핏줄들

오 랜 시간이 흘러, 나는 큰 형의 핏줄을 제3국에서 만났다. 큰 형의 핏줄들은 북에서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조카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 나는 남쪽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선배들이 잘못하여 반쪽 낸 나라의 반쪽 하나를 지리적으로는 멀고 먼 자유시장국가 미국 편에 남겨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지식 전수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0년 단국대로 자리를 옮긴 나는 계속해서 자유시장경제에 관한 글들을 써내려갔다. 자유시장경제만이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이 굳어져 갔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으로 개설하다

1999 년 후학기 단국대 교무처는 내가 신청한 교양과목 <시장경제의 이해> 개설을 허가했다. 나는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으로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시장경제 안내서로 『Q&A 형식으로 엮은 시장경제 이야기』⑶를 썼다.

나 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이 책으로 북한에 가서 시장경제를 강의하겠다고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6?15 기념 2주년 행사가 2002년 금강산에서 열렸는데, 나는 남한의 한 조직의 대표로 북한의 <사회과학원 통일문제연구소> 대표를 만나 내 책 5권을 기증할 기회를 얻었다. 북한 학자 누군가는 내 책을 읽었을 것이다.

◇ 집필을 통해 자유주의를 맘껏 즐기다

밀 튼 프리드먼의 명쾌한 자유시장경제 논리의 도움으로 학문세계 탐색에 종지부를 찍게 된 나는 집필을 통해 자유시장주의 여행을 맘껏 즐겼다. 그러는 동안 내 곁에 자유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나는 교수 30여 년과 은퇴 후 6년을 합한 36여 년 동안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몇 가지 대표적인 저서를 중심으로 자유시장주의 여행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을 만나다

1990 년대에 들어와 세계 노동계의 화두는 ‘노동시장 유연성’이었다. 한참 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었지만 이는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뿌리내린 신자유주의의 성과였다. 노동경제학회 중심으로 노동시장 유연성을 주창하던 나는 1997년 청탁받지 않은 원고를 들고 당시 전경련 자유기업센터를 맡고 있던 공병호 소장과 김정호 부소장을 찾아갔다. 며칠 후 김정호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한국에서 그토록 혁명적인 글이 나올 수 있다니 반갑습니다.” 공병호·김정호 박사는 저절로 굴러들어온 내 원고를 <자유와 개혁> 시리즈 1 『노동시장 유연성』⑷으로 출간해 주었다.

마거릿 대처의 빛나는 기여를 밝히다

시 장경제에 대한 나의 열정은 세계사 쪽으로 향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쓰는 과정에서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한 정치가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마거릿 대처의 구조개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이를 계기로 마거릿 대처에 관한 논문들을 집중적으로 써오다가 314쪽에 이르는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구조개혁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 이야기』⑸를 펴냈다. 전경련은 2004년 말경 마거릿 대처가 한국을 방문할 때 이 책으로 이벤트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으나 불행하게도 마거릿 대처의 한국 방문은 치매증세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장경제 논리로 성경을 풀이하다

자 유시장경제에 관한 나의 열정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성경 속의 시장경제 이야기’를 쓸 계획으로 꼭 10년 동안 준비했다. 드디어 2009년 5개월 동안의 집중적인 집필 끝에 나는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⑹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나는 시장경제의 핵심요소인 ‘소유, 평등, 노동, 가족, 법치, 자유, 돈벌이, 사람 사는 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구약성경 첫 절부터 신약성경 마지막 절까지 인용해 가면서 성경 속의 시장경제 이야기를 펼쳐갔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기독교가 출발부터 인류를 잘 살게 해준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요소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장하준 허상’을 깨뜨리다

2010 년 말경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원명: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가 한국 독서계를 뜨겁게 달궜다. 그 무렵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칼럼 <장하준이 말하지 않는 것들>(동아일보, 2010. 12. 13)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장하준이 말하지 않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한민국의 경제학자들은 왜 남아공 사람만큼도 말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갔다. 한국경제연구원 칼럼에 <장하준 교수가 잘못 말한 것들>(2011. 1. 6)이 떴다. 글이 뜨자마자 조회 수가 삽시간에 눈부시게 팍팍 오르는 감동을 맛보았다.

장하준 교수의 책은 자유시장주의자의 자존심을 긁어놓았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자유무역·자유시장으로 잘 사는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며 한미 FTA를 반대한 장하준 교수의 반시장적, 좌파적 주장은 나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긁어놓았다. 드디어 집필을 시작했다. 나는 2011년 1월 6일 한경연 칼럼에 내 글이 뜬 바로 그 다음날부터 다음 달 2월 14일까지 한 달 8일 만에 『장하준 식 경제학 비판―그가 잘못 말한 23가지』⑺라는 390쪽짜리 책을 마무리했다.

정치가들을 향한 나의 메시지는 계속될 것이다

크리스 에버트라는 후진국 경제발전론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때 책상을 그대로 들고 경제학과에서 정치학과로 학과를 옮긴 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정치가들이 다루는 이슈를 큰 원으로 볼 때 경제학은 그 원 속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경제문제를 다룰 때 정치가들을 항상 염두에 둔다.

이런 생각이 드디어 나로 하여금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⑻를 쓰게 했다. 2012년은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이 치러진 해다. 집단주의를 지향하는 좌파들은⑼ 선거 2년 전부터 야권 연합을 내세우며 정권 탈환에 총력을 쏟았다. 경제학자의 책 한 권이 정권 변화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경제학도로서 올바른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깨우칠 필요는 있었다. 이 책에서 나의 외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진화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솟아올라야 한다. 국민은 ‘비전과 원칙, 그리고 소신’을 가진 정치가를 원한다.”

자유시장경제는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

인류의 사상 가운데 핵심적 가치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발전해 온 사상이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자본주의 발달에 힘입어 중세적 사회 특성을 근대적인 것으로 변혁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개인의 자유 보장에 필요한 제도 도입의 발판을 마련했고,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자유주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 확대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하여 지구의 약 3분의 1 지역에서 70여 년 동안 실험했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탓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자유주의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발전해온 자유주의의 실천적 측면인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