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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한국관련 보고서

춘원 이광수 평양 투옥중 : CIA 보고서 1950년 12월 11일

CIA 미 중앙정보국이 625 한국전당시 춘원 이광수 선생이 평양 부근의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CIA 중앙정보부는 1950년 12월 11일자 INFORMATION REPORT 라는 문서번호 739346  보고서에서  SOUTH KOREANS IMPRISONED IN PYONGYANG 이라는 제목하에 춘원 이광수가 납북돼 평양에 수감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신동기 김동원 이광수씨등이 평양에 수감돼 있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있던 많은 정치범들이 10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특히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는 소설가이며 한국독립운동가 라고 소개했으며 중요요인으로 아직 평양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1892년 평북 정주출신인 춘원 이광수는 소설 무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근대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1949년 반민특위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석방된뒤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평양으로 끌려갔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1950년 납북된뒤 10월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 왔으나 CIA는 12월 11일 현재 이광수가 평양에 수감돼 있다고
보고함으로써 사망시기르 둘러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는 다음 사이트 인물사전을 옮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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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 한국 근대정신사의 전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전주.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
아버지 종원(鍾元)과 어머니 충주김씨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장사를 하던 중 11세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먼 친척집에 맡겨졌으며 어렵게 기식하면서 고대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03년 동학에 입도해 박찬명 대령 집에 머무르며 심부름하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타이세이[大成] 중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에 접하고 홍명희·최남선 등과 사귀었고, 1906년 학비 곤란으로 일단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건너가 장로교 계통의 메이지[明治]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 미션 학교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심취했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그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고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에 잠시 머물렀고, 이듬해 러시아에 들러 교포신문을 주간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행이 중지되자 귀국하여 다시 오산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1915년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편입한 후 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재학중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고 이후 〈자녀중심론〉 등의 계몽적 논설을 발표함으로써 문명을 날리는 동시에 봉건적 계층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허영숙과 베이징[北京]으로 애정도피를 했다. 이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21년 단신으로 상하이에서 귀국, 선천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1923년 동아일보사 객원이 되어 언론에 관계하기 시작하고 그해 〈조선문단〉 주재로 옮겨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가 1933년 사임하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당대 브나로드 운동이 확산되는 와중에 장편 〈흙〉을 발표했는가 하면, 1934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자하문 밖으로 이사, 〈법화경〉 번역과 독서 및 영화감상으로 소일하며 시름을 달래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안창호와 함께 수감되었다. 반 년 만에 풀려나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른바 '복지황군위문'에 협력하는 친일행위를 했다. 1940년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개명하고 학병권유차 도쿄[東京]에 다녀왔으며, 8·15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법으로 수감되었다가 곧 병으로 석방되고, 6·25전쟁중 병상에서 북한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해 10월 북한에서 병사했다.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1991년 미국에 살고 있는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에 가서 아버지 묘소를 찾아 1950년에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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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KWANGSOO CIA REPO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