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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이맹희 소송 여인, 두 재벌가 자식 낳았다 - 여성중앙 2004년 4월호




[기타기사]
[여성중앙]‥ 두 재벌가 자식 낳은 박귀희씨 파란만장 인생고백.| 연예기타기사모음
즐^^뒷다마™ 조회 1682 | 04.04.15 00:28 http://cafe.daum.net/backstory9/7fRl/17872





취재_강은영기자 사진_김근호기자


저는 1939년 일본에서 출생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일본에서 세무서를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첫돌을 맞을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해방 후 어머니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저는 4녀 중 막내인데 어릴 때 언니들이 돌아가셨고, 바로 위 언니가 4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귀국 후 대구에서 60년까지 살았습니다.
여자 혼자 몸으로 두 딸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생이 아주 컸습니다. 고등학교는 마치고 싶었으나 집안 사정상 중퇴를 했고 집안 전체가 서울로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산동에서 살았지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꽤 많았지요. 저의 어릴 때 꿈은 영화배우였습니다. 서울로 와서는,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고 막 꿈이 조금씩 실현되려는 찰나였습니다. 그때 첫 남자, B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61년도였지요. 당시 그는 아버지 그룹의 한 계열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후배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를 한번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습니다. 제가 만남을 거절하자 그는 1년 이상을 우리집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저를 끈질기게 따라다녔습니다.

막무가내로 쫓아다닌 그였지만 마음은 따뜻한, 자상한 남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물건들을 외국에서 오더를 내려 선물 공세를 펼치기도 했지요. 그의 그런 끈질김 덕분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스물세 살 철없던 저는 그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마음이 약하잖아요. 그는 저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했습니다. 저의 기구한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본격적으로 만난 지 1년 만에, 63년 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이었지요. 그는 집안에서 쓰는 돌림자를 써가며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아들이 학교 갈 즈음 되어서야, 핏줄 찾아주지 못할 걸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애를 낳자, 친척들은 저와 가족을 외면했고, 저와 유부남이었던 그의 결말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A그룹 회장은 중개인을 보내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이가 B의 아들이냐는 거죠. 스물여섯에 첫아들을 낳은 저는 벌벌 떨었습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이는 제가 봐도 너무도 예뻤고 저는 그 아이를 뺏길까봐 몸을 떨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마구 나왔습니다. 아들은 A그룹 회장의 손자가 아니고, 사실은 돈이 필요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소문이 났는가 보다…라구요. 저는 아들을 뺏길까봐 B의 아들이 아니라는 각서까지 써주었습니다. 그도 알고, 저도 알고 하늘도 알지만, 첫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그렇게 깊더군요.

아들을 낳은 후 3년까지는, B는 저에게 생활비도 보내주고, 아들도 만났지만,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저와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장충동에 2, 30평대의 집(당시 가격으로 380만원)을 한 채 사주었고, 저는 ‘아들은 결코 당신 아들이 아니다’라는 각서를 써서 건네주었습니다. 그 후 그와 오랫동안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여자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아들이 학교 갈 즈음이 되어서야, 아들에겐 집안을 찾아주는 것이, 핏줄을 찾아주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눈물을 흘릴지라도….

내성적으로 자란 아이는 속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어렴풋이 눈치로, 우리집이 다른 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생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달라졌습니다. 반항을 하더군요. 고2 때는 아버지가 그립다고 크게 울어 제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생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84년도에 우연히 그와 연락이 되어서, 부산에 있는 별장으로 우리 모자를 초대했습니다. 아들도, 아버지도 별 말이 없었습니다. 셋이서 바닷가를 묵묵히 거닐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혈육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으니까요. 그는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그 뒷받침은 아버지가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 후, 지금은 그룹을 이끌고 있는 그의 아들들 중 막내와 제 아들이 연결이 되어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86년도에 다시 한번 서울 조선호텔에서 셋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가끔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미국으로 갔다가 10년 후인 91년 귀국 후 양평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몸이 굉장히 나쁘다고 합니다. 내 인생의 첫 단추를 꼬이게 만들었지만, 아들을 그에게 보내지 않은 것을 지금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생이고, 그와 나의 운명적인 인연이었다고,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문득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A그룹의 황태자 B와 헤어진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친척들한테 멀어지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면서,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한국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일본계 한국인이 운영하던, 일본 긴자의 비원 레스토랑(한식 레스토랑)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습니다. 떠나고 싶었던 저는 지원했고, 용모단정을 기준으로 뽑던 그때, 운 좋게 뽑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와 언니에게 맡기고 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원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숙소에서 잠을 잤습니다. 일은 고되지도 않고 쉽지도 않고 그냥 그랬지요. 다만 생경한 곳에서 일하다 보니 외로웠습니다.

S그룹의 C회장을 만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때 그는 단지 손님일 뿐이었습니다. C회장은 해외에서 일을 따내는 일이 많아 해외 출장이 잦았습니다. 그는 일본에 올 때마다 저를 찾아왔고, 저는 그가 싫지도 좋지도 않았습니다. 4개월의 근무기간을 마치고 서울에 오자 그는 귀신같이 제 도착일에 맞추어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를 좋아한다며 만나자고 했고,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저돌적으로 구애를 해오는 남자를 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남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여자는 피해갈 수가 없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와 내가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인지….

그와 깊은 관계가 되자, 그는 전의 황태자 B처럼 자신의 아이를, 그것도 꼭 딸을 낳아달라고 졸랐습니다. 저는 절대 안 된다고 그랬고, 그런 승강이가 몇 달 동안 벌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꼭 딸을 낳아달라고 하는 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한 상태였는데, 이혼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의 남매 중, 딸이 부모의 이혼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딸은 중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딸의 자살이 너무나 한스럽다고, 꼭 딸을 낳아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는 딸이 많이 그리웠나 봐요. 너무나 강한 그의 열망 때문일까요? 저는 임신을 했으나 곧 자연유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혹시 제가 일부러 유산을 한 것이 아닌지 펄펄 뛰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시 임신을 했고 그의 소원대로, 1969년 딸을 낳았습니다.

저한테 있으면 미혼모의 딸, 그 집에 가면 재벌가의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이 태어난 아이를 보자, 저는 그만 탁, 기가 막히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번 아이도 제가 키우고 싶었습니다. 임신 중에는 아들의 예에서 교훈을 얻었듯이, 이번에 아이를 낳으면 C회장에게 주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낳고 보니, 모성애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생각할수록, 막상 키우게 될 때 성이 다른 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몹쓸 짓인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딸을 아빠에게 주기루요. 딸이 저에게 있을 때는 미혼모의 딸이지만, 그 집으로 가면 재벌가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고, 그는 부인과 함께 와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갓 100일을 넘긴 아이는 정말 예뻤습니다….

출산과 아이를 빼앗긴 충격 때문일까요?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출산 후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당시 80%는 사망하는 가운데, 목숨이 질긴 저는 용케 살아남았습니다. 다시 살아나면서 저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C회장의 부인한테도 못할 짓이고, 아이를 제가 키우지 못한 죄책감도 있고, 제가 아이를 안 봐야, 조용히 살아야 아이가 행복하게 클 수 있다고, 아이를 찾아가지 말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출산, 아이와의 이별, 자궁암 등 세파 속에 제가 너무나 우울해하자, C회장은 저에게 기분전환하라며 충무로에 ‘로제’ 경양식집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얼마 가지 못해 접어야 했습니다. 남자 손님들이 로제에 찾아오는 것이 싫다고, 그는 로제를 그만하라고 말했습니다.

기억나는 일은, 한번은 C회장의 남동생이 찾아온 일입니다. 남동생은 제게 딸아이 엄마인데, 왜 이렇게 숨어사느냐며 효자동 본가에 가서 C회장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엉겁결에 따라간 저는 아이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고, 예상했던 대로 할머니는 저의 인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할머니는 제가 C회장 남동생의 여자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일은 예상치 못한 일로 번졌습니다. 제가 효자동에 간 것이 C회장 남동생의 부인한테 전해졌고, 그 부인은 형님인 C회장의 부인에게 제가 다녀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당연히 C회장의 집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끄러웠고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딸을 그 집안에 내어준 후 조용히 살고자 했던 저는 C회장에게 헤어지자고, 나를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결국 그와 협의 속에 1970년경부터 2~3년간은 일본으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함께 데리고 갔지요.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새 출발하겠다는 결심은 쉽게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왔고 우리는 사실혼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일본으로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가 알아봐주는 대로, 일본인과 위장결혼했고, 일본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활비는 C회장이 보내주고, 저는 그가 일본으로 올 때마다 만나는 숨겨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싫어서… 그건 안 겪은 사람은 모릅니다. 저는 삼십사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일본인과의 위장결혼이 들통나서, 한국으로 쫓겨왔고 다시 중국인과 위장결혼,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전했습니다. 일본에서 서울로 올 때는, 이중생활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완전히 떨어져 살고 싶었지만, 그는 어디든지 저를 찾아 쫓아왔고, 경제적 독립이 안 된 상태에서 완전한 도피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재벌과 함께 사니까 대단한 부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단한 절약가로 소문난 그와 함께 사는 것은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그는 간혹 저에게 땅을 사주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건축비를 주는 법은 없었습니다. 땅만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아무런 생활 대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빚을 내서 집을 짓게 되었고, 그런 생활이 반복되자 빚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태원에 상가를 지었는데, 그 상가에는 쑥탕이 있었습니다. 거기 오는 여자들은 말이 많았고, 건너 건너서 저의 귀에까지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박귀희라는 여자는, 재벌들만 상대해서 애를 낳는대, 그리고 돈을 착취한대.”

정당한 나의 집마저 C회장에게 빼앗겼습니다


저는 그만 이태원이 싫어서, 동숭동 집과 맞교환 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숭동 집은 3억 5000만원이어서, 현금 2억 5000만원을 더 받아 거래가 성사된 것이었지요. 저는 이 동숭동 집이 나중에 ‘악마’로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아들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 아들 교육을 위해, 그리고 내심 C회장과 헤어지고 싶어 1983년부터는 미국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LA로, 그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로 갔습니다. 조용하고, 아들 공부하기가 좋았습니다. 미국에서는 햇수로 10년을 살았지만, 그래도 비자 문제 때문에 반은 한국에서 생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으로 이주할 당시 저는 제 이름으로 된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대지 200평과 지상에 주택 1동(건평 110평)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땅값만 60억원을 호가하는 것입니다. 82년도 당시에는 대충 3, 4억 했지요.

그러나 제가 미국으로 이주한 지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C회장은 소유주인 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임의로 명의변경을 해버렸습니다. 그 뒤 그는 타인에게 임대를 했고, 이후 1997년경에는 저도 모르게 건축물을 부숴버리고 빌딩을 신축하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 명의로 등재를 해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에 설정되어 있던 채권 7000만원만 변제하고 해지하였을 뿐, 저에게는 부동산 처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1996년경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91년 미국에서 완전 귀국했을 때 동숭동 집을 달라고 했는데, 왠지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돈이라면 그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 저는 생활 대책이 막연하여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터라, 결국 1996년 동숭동 부동산의 명의이전 원인무효확인 소송을 하겠다는 뜻을 그에게 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거에 제 뜻을 묵살하고 오히려 쇠파이프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 후 그는 저를 달래려고 2500만원짜리 코트를 사주었습니다.

악연이 된 딸과의 만남, 어떻게 이럴 수가…

그 해 제가 낳은 딸은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결혼식에도 못 가고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1998년에는 제 딸아이를 길러준 어머니인 C회장의 본부인이 사망하였습니다. C회장은 자신도 고령이 되고, 법률상 부인도 죽고, 딸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2001년 11월경에 딸과의 만남을 주선하였습니다. 34년 만에 제가 딸의 생모임을 밝힌 것이지요.

딸은 중학교 때 자신의 생모가 따로 있음을 알았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C회장은 은근히 엄마로서의 자리를 찾으라고 만남을 주선하였지만 34년 만에 만나는 딸의 반응은 뜻밖의 차가움이었습니다. 딸은 이미 노령화된 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34년 동안 딸을 위해 숨죽이며 살아온 저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보다 따뜻한 눈맞춤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저를 철저히 무시하였습니다. 생모로 인정해주기는커녕, ‘아줌마’‘당신’이라는 호칭으로 그동안 뭐하고 살았느냐고 당돌하게 물어왔습니다….

그 후 매주 토요일이 되면 C회장과 딸 저는 셋이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C회장은 제가 차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이제 한 차로 움직이자며 저에게 자신의 옆 좌석에 앉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말린 것은 놀랍게도 딸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고 그러더군요. 엄마로 인정 못한다면서요. 그 자리는 죽은 엄마 자리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말끝에, 딸은 자신을 낳고 당신은 보상을 받지 않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가슴속에서 불이 나고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저는 흥분한 나머지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너 때문에 34년을 살았는데, 대한민국에서 재벌 첩치고 나처럼 거지같이 산 여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34년 만에 만난 딸은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에 딸을 줄 때 다시는 안 보기로 했던 만큼 아니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딸이 딸이 아니고, 엄마가 엄마가 되지 못한다면…. C회장과는 말년을 함께 살려고 마음먹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부인의 묘자리도 함께 잡아주며,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랬더랬습니다. 그런데… 2002년 3월부터 C회장의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생활비가 드문드문해지더니 안 주더군요. 저랑 사실혼으로 33, 34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저는 최소한의 인간적 관계와 천륜마저 파괴되고 극도로 황폐해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노후 대책의 일환으로, 지극히 정당한 요구인 과거 제 소유의 부동산 반환을 요구하는 법적 소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온 데에 심한 자괴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살다 보니 C회장을 사랑했고, 마지막 여생은 그와 함께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 집은커녕, 빚만 남아 있구요. 내 인생도, 내 사랑도 허무하게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모두 저보고 바보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들고, 35년을 사실혼 관계에 있으면서 음지에서만 살아온 저…. 이제 제 나이 65세입니다. 아까운 세월이 다 흘러갔습니다.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생을 산다면 조용히 시골에서 남들 누리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재벌의 여자’를 쫓는 여자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 여자들을 보면 정말 말리고 싶습니다. 저를 보세요. 저는 새 출발하기에 너무 늦었습니다. 나름대로 화려한 생활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회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옷, 보석 등은 팔려고 하면 터무니없는 값만 부릅니다. 요즘은 아들이 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당한 저의 권리를 찾아 노후를 불안에 떨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여자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습니다. 평생 ‘세컨드’니 ‘첩’이니 하는 말들을 듣고 산 저입니다. 그 소리가 너무도 듣기 싫어 그렇게 빠져나오려고 했는데….아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물론 A그룹의 황태자 B도, S그룹 회장 C와도 모두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운명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고,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은 여생이라도 평범하게, 조용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의 마지막 남자였던 C회장이 저를 살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200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