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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삿돈 77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조석래 효성회장의 처남 송형진 효성건설 대표등에 대한 항소심선고공판이 내일로 예정된 가운데 이들이 아직도 퇴직하지 않고 효성건설 임직원으로 재직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시간 11월 9일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규모기업집단공개시스템 조회결과 송형진씨와 안모이사는 아직도 효성건설의 대표이사와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약 공정거래위원회 자료가 사실이라면 효성은 경영진이 1심에서 회사돈을 횡령한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지만 이들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으로 주주들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 셈이 됩니다

검찰이 송형진 효성건설대표와 안모이사를 77억원의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것은 지난 2009년 10월이며
지난 6월 4일 서울중앙지법은 송형진 대표등이 최소 37억원에서 최대 46억원가량을 개인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며 송형진씨에게 징역 3년, 안모이사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각각 선고했었습니다

그러나 송씨등은 1심 판결에 불복, 항소를 했으며 내일 11일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27일자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송씨는 같은달 26일 열린 항소심공판에서 앞뒤가 안맞는 해명을 해 검찰의 질타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석래회장의 부인 송광자씨의 오빠인 송씨는 항소심 공판에서 '대출을 받아 개인자금으로 주식회사 효성에 2억1천만원을 변제하는등 일부를 변제했다며 재판부에 대해 선처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줄곧 회삿돈을 다 회사를 위해 썼다고 주장하다가 왜 개인자금으로 갚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송씨는 회사를 위해 썼지만 상당부분 이에 대해 증거를 제출하기가 어려워 변제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안모 이사도 송씨와 같은 논리로 진술했으나 검찰은 그간의 해명에 비춰 논리가 안맞는다고 반박했다고 합니다

1심 재판부는 송씨가 횡령 자금일부를 조회장의 집수리, 조회장 선친의 산소관리비용등으로 사용했다고 밝혀
내일 항소심 판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재계관계자들은 송형진 효성건설대표등이 1심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항소한 상태이므로 혐의가 확인되자 않아 퇴직시키지 
못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송형진 대표가 조석래회장의 손위 처남이라서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다른 직원이 회삿돈을 횡령했다면 파면은 물론 민사사송까지 제기했을 것이라며 결국 주주들만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효성건설은 지난 9월 30일 해산결의를 했다며 10월 5일 금감원에 보고했습니다

검찰은 또 효성의 무기납품비리와 관련해 지난해 12월 조석래 효성회장의 동서 주관엽씨등에 대해 미국에 범죄인인도요청을 했지만 아직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송형진 효성건설 대표는 조석래 효성회장의 장인인 송인상 전 재무부장관의 아들이며
주관엽씨는 조석래 효성회장의 장인인 송인상 전 재무부장관의 딸 송진주씨의 남편입니다




 

핫이슈 언론보도2010.09.0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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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時空社). 1990년 만들어져 올해 20년이 된 꽤 잘나가는 출판사 이름이다. 600명이 넘는 직원에 매출액이 2000억원을 넘는 커다란 회사다. 이 회사가 더 유명해진 건 오너 때문이다. 전재국(全宰國·51)씨. 제5공화국의 문을 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이 바로 그다. 지난 1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에 있는 시공사 건물로 찾아가 그를 인터뷰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국내 굴지의 출판사 사장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듣고 싶었다.
그는 출판인으로서는 크게 성공한 셈이지만 출판계의 작가들도, 언론도 그와 맞대면하기를 좀 꺼렸던 게 사실이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부담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는 그를 더 만나고 싶었다
원본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719/4432719.html?ctg=1200&cloc=home|list|list1
● 회사 이름이 특이하게 시공(時空·시간과 공간)이다. 소설가 이병주씨가 지어줬다던데 맞나.

“이름은 내가 지었다. 1989년에 아버지와 함께 백담사에 있을 때 지었으니 불교와 관련이 있을 거다. 작고한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 당시에 백담사에 자주 들렀는데 시공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하겠다니까 말리더라. 그런 이름의 출판사가 옛날에 망했다면서. 그런데 며칠 뒤 전화를 하셔서 ‘전군아, 곰곰 생각해 보니까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두 번은 안 맞는다니까 시공사도 괜찮겠다’고 하시더라.”

● 원래는 군인이 되고 싶었던 걸로 안다.

“어려서부터 군인만 보고 살았다. 푸른 제복이 멋있어 보였다. ROTC(학군장교)를 하려고 했는데 포기했다. 제가 79학번이데, 현직 대통령 아들이 군대 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서울에서 대통령 아들로 지내는 게 너무 답답했다. 어떻게 해서든 유학을 가려고 생각했다. 군대는 석사 마치고 돌아와서 파주시 법원리에서 석사장교를 했다.”

● 얼마를 가지고 출판사를 시작했나.

“5000만원이다. 서울 동숭동에서 직원 2명으로 시작했다. 삼성전자에 다니던 대학 동창도 합류했다. 그 친구가 지금 계열사 사장이다. 처음엔 일본 책을 다루려고 했다. 일본이 출판이 대단하다고 해서 일본에 가서 배낭 메고 서점을 돌아다녔다. 일본말도 잘 못하면서 하루 종일 서점에 앉아서 책 구경을 했다.”

● 5000종 정도의 책을 냈는데 뭐가 가장 기억에 남나.

“첫 번째 낸 책이 사르트르가 쓴 『아랍과 이스라엘』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냈다. 그땐 책만 만들면 교보문고에서 팔아주는 줄 알았는데, 대형 서점에 들어가는 것도 큰일이더라. 마침 무슨 전쟁이 나서(1차 이라크 전쟁을 지칭) 꽤 많이 팔렸다. ‘출판도 괜찮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 최대 히트작은 어떤 것인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100만 권을 넘게 팔았다.”

● 존 그리샴 소설도 많이 내지 않았나.

“그리샴은 원래 지명도가 별로 없었다. 첫 번째 책이 한국에서 나온 뒤, 두 번째 작품을 다른 출판사에서 검토하다 포기해서 우리가 계약했다. 그때는 하루에 주문 1000권이 들어오면 기분 좋아서 회식하고 그럴 때다. 그리샴 책은 책마다 10만 부, 20만 부씩 나갔다. 초반에 우리 출판사가 자리 잡힐 때까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

● 어떤 책을 낼지 누가 결정하나.

“직원들이 다 같이 읽어보고 의논해 결정한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무명작가의 책이었다. 그리샴 소설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잘 나가면서 내 스스로 흥행감각이 있다고 오판했다. 그래서 수업료를 꽤 치렀다. 책은 마케팅을 잘하면 히트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히트작을 낸 출판사들이 오래가진 않더라. 그래서 스테디셀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물을 생각한 것도 그때다. 어린이 책이 지금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어린이 책을 만들 때는 우리 애들이 어려서 코드를 맞출 수 있었다. 이젠 못한다. 내가 젊은 직원들의 감각을 못 맞춘다.”

● 출판사를 아버지의 비자금으로 시작했다는 의혹이 있다.

“우리 출판사 때문에 번역 로열티가 무지하게 올랐다는 소문도 있었다. 존 그리샴에게 떼돈 주고 번역권을 사왔다는 거다. 제가 명색이 경영학석사(MBA) 출신인데 터무니없이 장사를 안 한다. 오해와 의혹이 많지만 일로 모든 걸 보여주려고 했다. 내 30~40대 시절을 출판사에 쏟아부었다. 시공사는 제 인생과 동의어다.”

● 출판에 대한 철학 같은 게 있나.

“사실은 출판이란 단어 자체가 생명력을 잃고 있다. 종이책만 책이 아니지 않은가. 전자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바로 소통할 수 있다면 출판사가 왜 필요한가. 음반업계에선 이미 가수가 직접 발매를 한다. 정보기술(IT) 혁명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데 어떻게 서핑(파도타기)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출판사가 직접 콘텐트를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네트워크(creative mind network)’를 찾고 만드는 게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미국의 ‘스크리브드 닷컴(www.scribd.com)’이라는 회사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보여준다. 기존 출판사는 대개 저자에게 10% 정도 인세를 주는데, 이 회사는 전자책을 만들어주고 저자에게 70%의 인세를 준다. 앞으로 태블릿 PC나 스마트 PC 같은 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것이다. 국내에선 아직 전자책 시장이 부진하다. 교보문고가 1등인데 매출이 연간 50억원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IT 기기의 종류와 숫자가 늘면 시장도 달라질 것이다. 최근 3~4년간 책을 계약할 때 e-북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많이 하고 있다. 기기 보급이 100만 대를 넘으면 5만 대도 안 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 종이를 기본으로 하는 콘텐트 사업은 끝났다고 보나.

“우리 세대까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활자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책과 글도 호흡이 긴 것보다는 짧은 것 위주로 간다. 여러 패턴의 콘텐트 방식이 공존할 것 같다.”

● 세상이 돌아가는 트렌드를 알기 위해 뭘 하는가.

“보통 하루 2시간 이상 웹서핑을 한다. 밤에 와이프한테 ‘야동 보느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단순한 콘텐트보다는 댓글 같은 반응을 재밌게 본다. 현장에 있는 프로들을 찾기 위해서다. 파워 블로거들이 훌륭한 저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회사 직원 하나도 채식주의자로 유명해 방송에도 출연한다. 요새는 50세만 되면 직장이 흔들리는데 뭔가 하지 않으면 100세까지 사는 게 지옥일 수도 있다.”

● 파워 블로그들의 책은 성공적인가.

“요리와 인테리어, 빵 만들기 등 취미와 여행·실용서가 인기다. 독자들이 10만 명씩 움직이기도 한다. 옛날에는 문단, 화단 같은 이른바 ‘단(壇)’이라는 게 있었다. 인터넷에 가면 그런 거 없다. 옛날에 강했던 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 같은 건 지금은 없어졌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나는 살고 경쟁업자는 죽는 시대가 아니다. 산업 자체가 동시에 없어지기도 한다.”

● 경기도 연천에서 허브 농장을 하는데 돈 벌려는 비즈니스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관심인가.

“둘 다로 보면 된다. 2006년에 시작했다. 총 1만6000평이다. 1년에 7만 명쯤 오는데 내년부턴 수익도 날 것 같다. 우리가 그림책을 워낙 많이 팔아서 그걸 테마로 갤러리 같은 걸 만들려고 했는데 그 아이디어를 허브 농장으로 확대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드닝’ 체험 같은 걸 해보게 하고 싶다. 허브농장은 내가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기술에 목매지 않고 직접 접하는 ‘로 테크, 하이 터치(Low tech, High touch)’가 필요했다.”

● 당시 언론이 땅투기 의혹을 제기했었는데.

“KTX를 타고 부산 출장을 갔다 오다 TV 보도를 봤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한 것보다 내 뉴스가 먼저 나와 어이가 없더라. 물론 그 땅은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강남 땅이 더 올랐다. 내가 일주일에 2~3일은 거기서 산다. 시골은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잡초도 끊임없이 뽑아야 한다. 새카맣게 타니까 나보고 골프 엄청 친다는데 골프는 거의 안 나간 지 몇 년 됐다.”

● 부인과는 연애결혼을 했나.

“여동생의 동창인데 동생이 소개시켜 줬다. 시카고에서 미술을 전공한 내 딸은 스물여섯인데 직장 다니다 쉬고 있고, 아들은 스물셋인데 공익요원으로 근무 중이다.”

●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가훈 같은 게 있나.

“나에게 기댈 생각 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아이들한테 출판사를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걸 만들려면 괴롭지 않겠나. 애들이 자기 힘으로 당당한 사회인이 돼서 ‘저 사람이 있으면 좋다’라는 말을 들으며 살면 좋겠다.”

● 이름이 ‘재상 재(宰)’에 ‘나라 국(國)’인데 정치할 생각은 없나.

“엄숙하게 사는 게 내 스타일과는 잘 안 맞는다.”

옛 청와대 생활을 말하다
“아버지 전두환, 손녀 업어주느라 출근 늦기도”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전재국 사장은 부친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비화(秘話)와 소회를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커다란 아버지 밑에 있다 보니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만들어지더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좀 다른 인생을 택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89년 백담사에서 생각 많이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앞으로 이 일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내 인생도 중요하니 뭔가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살아보고 싶었는데, 힘든 상황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요즘은 편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출판하길 잘한 것 같다.”

●부친은 정치를 한 걸 후회하진 않나.

“그러시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 아들로 사는 게 그리 힘든가.

“너무 힘들었다. 처음에 청와대도 부모님만 가면 되는 줄 알았다. 대학생 때 연애하는데도 늘 경호원들이 따라다녀 스트레스가 컸다. 따돌리고 도망도 가고 그랬는데 감시하는 인원만 늘어나더라. 청와대는 너무 휑해서 가족들끼리도 인터폰하고 혼자 자는데 외롭고 심심했다. 집에 가면 경비원들이 플래시로 얼굴을 확인해 소주 한 잔 마시고 들어가기도 불편했다. 20대 초반을 유쾌하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청와대에서 나오시면 편하겠다 했는데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더라.”

●‘권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청와대에서 같이 살았던 동거인에 불과하다. 청와대 관저 2층은 출입구가 식자재가 들어오는 주방 옆 쪽문으로 돼 있다. 왜 그런 데 만들어 놨는지 처음엔 너무 이상했다. 밤이 되면 셔터를 내려 라면도 못 끓여 먹었다. 나는 권력을 행사해 보지 않았지만 ‘이 자리가 뭐가 좋아서 다들 오려고 그럴까.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예전처럼 가족끼리 밥 먹고 같이 떠들고 그런 게 즐거운데. 청와대에선 죽어나간 사람은 있어도 태어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가 85년에 딸을 낳았을 때 아버지가 너무 좋아했다. 청와대 생긴 이후 처음 태어난 생명이라고. 아버지가 손녀딸 업어주느라 출근이 늦어진 적도 있었다.”

●동생들은 어렸으니 더 힘들었겠다.

“청와대 들어간 뒤 동생들 보면서 ‘떠날 때까지 평범한 상식을 유지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 거기선 자기가 직접 하는 게 없다. 기사와 비서가 있어서 그렇다. 막내 재만이는 초등학생인데 친구도 못 데려오고 혼자 자기 방에 있어 안돼 보였다. 동생들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집안에서 그러기가 쉬운 게 아닌 것 같다. 다른 전직 대통령의 자녀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너무 큰 아버지가 있으면 편치 않다.”

●요즘은 가족들이 자주 모이나.

“일요일마다 연희동 부모님 집에서 형제들과 다 만난다. 우리는 교회에 간다고 표현한다.(웃음) 아침 같이 먹고 오전에 배드민턴 한 게임을 치고 저녁까지 있다 온다. 애들도 다 데리고 간다. 그게 우리 집안 룰이다. 미국에 사는 막내는 MIT대학 석사를 마치고 자기 장인 회사에서 근무한다. 여동생 효선이는 서경대 교수다. 아버지는 요즘 바쁘시다. 결혼식 부지런히 다니고 붓글씨로 축사도 써주고. 그런데 후배가 죽으면 거기는 기분이 안 좋다고 안 가는 것 같다.”

●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리더십은 뭔가.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집에 오라고 위협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아버지는 남자답다. 나는 그런 점에서 아버지를 안 닮았다. 처음 회사를 시작한 뒤엔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해 힘들었다. 아버지는 주위에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한다. 용모는 둘째가 제일 닮았다. 머리카락이 제일 없으니까.(웃음) 형제들이 성격은 아버지를 별로 안 닮은 것 같다.”

●아버지를 백담사로 보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서운한 감정은 없나.

“청와대가 무서운 데라는 생각이 든다. 제일 친했던 노 대통령과도 퇴임 뒤 그렇게 되고…. 권력이 뭔지,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그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출판계에선 70~80대에도 ‘누구 누구야 놀자’라면서 재밌게 사는 분이 많다. 우리 아버지는 60세가 되기 전에 은퇴했고 재밌게 못 산 거 같다. 남자로서 안됐다. 아버지는 워커홀릭이어서 잘 못 노신다. 달리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j 칵테일 >> 백담사 계곡물 속에서 시작된 시공사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정권이 바뀐 뒤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대학생들이 조직한 ‘전두환 체포 결사대’가 연일 서울 연희동의 사저를 습격하고, 야당이 죽기살기로 공세를 펴던 와중이었다. 차기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이 해외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전임자를 산중으로 쫓아보내는 고육책을 택한 것이다.

백담사 인근의 계곡.장남인 전재국씨는 그때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은 뒤 공공정책학으로 2년간 박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지도교수와 캘리포니아 토지정책 논문을 쓰려고 자료를 준비 중이었던 그는 백담사로 달려가 부친을 만났다. 아버지는 “오지 마라”고 펄펄 뛰었지만 아들은 갔다. 89년 어느 여름날 그는 술 한잔 걸치고 백담사 앞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막막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마침 집사람이 애들을 슬슬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직업을 뭐라고 적어야 하느냐고 묻더라. 박사과정? 무직? 참 갑갑하더라.”

그렇게 고민하는데 갑자기 출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게 시공사다. “인생에서 어떤 일들은 참 미스터리하게 이뤄지는 것 같다. 내가 출판사 한 것도 그렇고.” 기자는 그의 대답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들인 내가 좋은 책을 펴내 아버지가 맺은 시대와의 악연을 풀고 싶었다’는 정도의 근사한 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시공사는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커다란 회사로 성장했다. 어린이 책, 추리소설, SF, 연애소설, 무협소설, 만화 등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그간 펴낸 책의 숫자는 6700만 권. 대한민국 인구의 1.5배다. 출판뿐만이 아니다. 이젠 SBG(시공 북 그룹)로 진화했는데, 단행본과 잡지 등만이 아니라 유통업도 하고, 인테리어 사업도 하고 말 그대로 그룹 형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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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용이 대표이사로, 박상아가 감사로 재직중인 비엘 에셋의 2008 감사보고서 입니다
주석을 살펴보면 기백억원대의 부동산 매매도 나타납니다
이 회사는 주주가 전체 6명으로 모두 전두환 인척입니다
뚜렷한 직업도 없었던 친구가 적지 않은 돈을 가졌다면
전두환의 비자금이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bl asset audit rep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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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엘에셋 주주는 전재용-박상아-전우성-전우원-전혜현-전가현등 6명으로 전두환 일족입니다
아래는 주주명단과 지분율입니다

주주명 소유주식수 지분율 비고
전재용 30,000 30% 대표이사
박상아 10,000 10% 감사
전우성 20,000 20%
전우원 20,000 20%
전혜현 10,000 10%
전가현 10,000 10%
합계 100,000 100%
핫이슈 언론보도2010.01.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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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14741

전두환 전 대통령 차남인 전재용 씨가 부동산개발사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재용 씨는 부동산개발업체인 비엘에셋(BL Asset)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이 회사는 2000년 10월 설립돼 부동산의 개발, 시행, 건설을 주요 사업으로 정했다. 전재용 씨가 회사 지분 30%(주식 3만주)를 보유해 최대주주이며 2007년 7월 전 씨와 결혼한 탤런트 박상아 씨가 감사로 등재돼 있다. 박상아 씨의 보유 지분은 10%(주식 1만주)다. 전재용 씨를 비롯한 일가친척 6명이 지분 100%를 나눠 갖고 있다. 현재 직원은 6명뿐이다.

비엘에셋은 서울 태평로 옛 삼성 본관 인근 서소문구역 5지구(서소문동 85번지 일대) 부지를 매입해 오피스빌딩으로 개발하는 자체 사업을 추진 중이다. 서울 도심을 재개발하는 일명 ‘도시환경정비사업’이다. 비엘에셋 관계자는 “대지면적 기준으로 2436㎡(800평) 정도 규모이고 연면적은 3만6363㎡(1만1000평) 수준”이라며 “서울 도심 4대문 안에 들어 있는 핵심부지라 사업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은 주택 재개발사업과 달리 부도심에 위치한 상업·공업지역을 개발해 주거환경, 상권 활성화를 동시에 노린다. 일반상업지구로 용적률이 500% 이상이라 초고층 주상복합, 오피스텔이 들어설 수 있다.

비엘에셋 관계자는 “사업에 필요한 부지매입을 완료했고 현재 차질 없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사실상 이번 사업이 비엘에셋의 첫 프로젝트인 만큼 실적은 미미한 수준이다. 금감원 전자공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납입자본금은 5억원 수준. 2008년 매출액은 3억2481만원으로 전액이 임대료 수입이다. 하지만 영업손실은 12억4032만원, 당기순손실은 27억2477만원이나 된다.

그런데 회사 실체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사실 비엘에셋은 재용 씨의 전처인 최모 씨가 2001년 10월까지 대표이사로 있던 회사다. 수년간 휴면 상태로 방치돼 있다가 재용 씨가 2008년 4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 후 특별한 사업이 없던 비엘에셋에 10개 이상 사업 목적이 추가됐다. 발행 총 주식 수도 4만주(5000만원)에서 100만주(5억원)로 늘어났다. 이는 전재용 씨가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기 위한 절차로 보인다. 비엘에셋은 새해에도 도심 유망부지를 매입해 부동산 개발사업을 지속할 방침이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