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커넥션-박정희 정권과 친한파
4 · 19 혁명의 희망을 쿠데타로 무산시킨 박정희.
그의 20년 장기집권 뒤에도 역시 일본 커넥션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 도입 사건이다.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에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핫이슈로 다루어졌다. 의혹은 일본에 4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2배나 높게 받은데서 비롯됐다. 4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 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에 250만 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 더 이상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는 당시 아사히 신문 사회부 기자 오치아이 씨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일본에 정치가와 관료, 기업에 유착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왔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그 돈에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 커미션이란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리베이트 입니다. 저는 취재를 더 진행해서 상사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체이스 맨하탄과 외환은행에 구좌명을 알아보니 이름이 알파벳으로 S.K.KIM 이었습니다. 즉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이 단계에서 일본은 그야말로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130만 달러는 실은 일본 정치가에게 간 것이 아니냐고 모두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에 정치인은 전직 수상은 2명이며 그 중 한명으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한국 그 철도공사 입찰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시 전 수상에게 부탁해서 직접 담판 했습니다. 김형욱 부장이 자신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를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커넥션의 상대역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일본이 대소련 전쟁기지로 건설한 만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41년 부터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역임,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는 성전을 수행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면서도 그는 냉전 돌입에 따른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전략에 고심한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기본적으로 스케일이 큰 정치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느 아시아 전체를 놓고 정치를 폈습니다."
함께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반면 기시는 무죄로 풀려난다. 냉전체제로 돌입하면서 미국의 대일정책이 변화된 때문이었다.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기시는 자민당을 창당,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를 이끌어 나간다. 기시 전 수상이 한일관계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5 · 16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실세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국의 건설자 기시 전 수상과 같은 만주 인맥이었다. 61년 11월 이케다 수상과 회담 후 박정희는 도쿄 시내의 한 요정에서
『20세기의 리더들』-기시 노부스케 저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당시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시 전 수상에게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지사들의 의지와 같다. 앞으로 새한국 건설을 위해 좋은 의견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기시 전 수상은 박정희의 후원가가 된다. 기시 전 수상이 관여해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것으로 의심받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본 쌀 도입이다. 일본 쌀은 69년부터 3차례에 걸쳐 103만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의회에서 문제가 됐다.
일본 참의원 자료실. 이곳에는 73년 쌀을 둘러싼 일본 국회에서의 논란이 모두 속기록으로 보관돼 있다. 논란의 핵심은 박 정권에 대한 특혜시비였다. 당시 도입 조건은 30년 안에 현물로 상환한다는 거저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박 정권은 그것을 국내가격으로 시중에 판매했고 27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카리 아키라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그 쌀이 일본의 원조미라는 형식으로 한국국민에게 전해졌다면은 뭐 아무 문제가 없죠. 하지만 여수하고 인천, 그리고 포항의 항구에 내려진 일본 쌀들은 그 시점부터 일본의 원조미가 아니라 한국의 보유미로 둔갑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만약 돈이 되면은 당시에 정치 상황 헌법을 개정해서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할 정치자금이 되는 것입니다."
103만톤의 쌀은 일본 돈으로 1300억엔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량관리법은 쌀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법률적 근거 없이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수상으로 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 전 수상의 친동생이었다. 기시 전 수상은 일본 국회의 반대를 무마하고 국내법상의 문제를 법 개정으로 해결하면서 박 정권에게 쌀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70년, 기시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등 수교 훈장을 받는다. 그가 이렇게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기시 전 수상은 미국과 같은 노선을 펴서 아시아를 지킨다라는 형태로 일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사고 속에는 언제나 한반도가 들어있었죠. 따라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해 한국을 전위국가로 지원한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속에서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기시 전 수상. 그에게 남한은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는 방파제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극우단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노다 아키히로 당시 공동통신 서울특파원-"반공(反共)에 대해서 우익, 특히 일본 애국당을 비롯한 극우의 단체가 친한파였습니다. 심한 표현으로는 반공을 위해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집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죠. 그렇다면 도대체 친한파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이 희생양이 되어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않겠습니까."
80년 당시 일본이 북한 남침설을 제공해 신군부의 집권을 도왔다는 주장 역시 당시 일본이 가졌던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선원 박사 연세대 국제학 연구소-"1980년 4월 24일 미국이 이란에 인질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이후 약 3~4일 동안, 즉 1950년대 이후 서태평양에서 최초로 3~4일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있지않고 중동으로 향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홋카이도에 가까운 북방 4개섬에 소련에 무장력이 급속하게 증진하고 있는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일본으로선 상당히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정치적 안정을 바랬을 것이고 그 정치적 안정을 유도해 내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남침 가능성을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전두환 그룹이 조기에 상황을 정리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해서 이런 의도적인 정보공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본의 안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그가 한국에 올림픽을 양보한 것 역시 한국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카시마 노부요시 오끼나와 유구대학 교수-"올림픽을 한국에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세지마는 한국을 일본이 병합했을 때 발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셔야 됩니다. 즉 이것은 한국이 힘을 갖게되면 일본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일본을 위해서 한국이 그만큼 부담을 나누려면 올림픽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재오 국회의원-"일본에 정치인들은요 딱 밖에 나오면요 여야가 없습니다. 오직 일본국에 자국의 이해입니다. 그거는 일종의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에 근거 있다고도 봐야죠. 과거에 우리가 이런 나라였는데 대동아 공영권에 중심이었는데"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에 일본의 친한파가 적극 나섰던 것도 자국에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차관 제공 20억 달러
대한무역흑자 86억 달러
20억 달러의 자본을 빌려준 결과로 12년 동안 86억 달러의 대한무역흑자를 거두어 갔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일본이 경제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그걸 위해서는 한국이나 대만같은 이런 후방기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런 전략을 배경으로 해서 그 당시 한국으로 봐서는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가 들어서고 난 후에 경제를 재건해가지고 혁명을, 그 당시 5 · 16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할려고 하는, 또 그 당시 워낙 가난했으니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는데 일본 돈이 필요로 했던 것이죠.
또 일본은 그 당시가 되면은 이제 말하자면 이제 해외시장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단계. 그러고 그 경제원조는 바로 일본의 이제 수출시장을 넓힐려고 하는 바로 그런 일본 시장의 일본 자본주의의 대팽창의, 전후 새로운 팽창의 일환으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수출 촉진을 위해 박 정권이 70년대 중반에 추진한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상징적인 의미를 던지고 있다.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사실 세지마 류조에게서 아이디어를 받은 것이었다.
김도형 연구위원 산업연구원-"종합상사의 경우에는 수출만에 기능을 우리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종합상사가 제대로 건전한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수입에 기능, 또 삼국간 거래에 기능을 무시한 채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그런 하나의 계기도 됐지 않은 점에서 제대로 그 당시 전문가가 있었더라면은 제대로 평가해서 제도를 도입했으면 좋았다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원으로 우리가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지속된 대일경제의존은 현재에 이르러 심각한 경제종속을 낳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가마우지 아시죠. 가마우지는 오리과에 속하는 겁니다만은 목이 길고 가늘고 그렇죠. 거기에 이렇게 쇠줄을 묶어놓으면요 물속에 가마우지가 다른 고기를 먹을려고 들어가면은 고 순간에 쇠줄을 잡아 당기면요 고기를 문 채로 못 넘기고 물고 오죠. 그럼 뺏아서, 입에서 뺏아가지고 집어 넣으면 고기가 잡히는 거죠. 가마우지 낚시법인데 한국이 부품, 소재, 기계 일본서 가져와 가지고 한국에 저임금 노동하고 결합해서 그걸 미국에다 수출해가지고 돈 번 것을 다시 그 돈을 일본 다 갖다주죠. 일본서 또 부품, 소재 가져와가지고 또 만들어가지고 또 미국에 수출해서 그 돈 또 일본 다 갖다주죠. 우리가 지난 65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35년간 한국이 가마우지 노릇을 했는데"
물론 쿠데타 정권과 일본의 관계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든지 대일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일외교는 '검은 유착' 또는 '커넥션' 이라는 말로 일본인들 사이에 불리고 있다는 점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김중배 상임대표 언론개혁 시민연대-"이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 그러고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일본)한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대일무역적자라는 것은 거의 우리가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숙제로 지금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대단히 멸시하게 하는 이런 요인이 내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러고 우리 사회적인 여러가지 상황들 이런 것이 그리고 또 당당한, 아니 당당히 못한 지도자들에 대응"
강창일 교수 배재대학교 세계지역학부-"결과적으론 겉으로는 반일감정을 선동하면서 속으로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리도 국민을 위한 실리가 아니라 자기 그 정치집단 어느 세력에 경제적 실리 혹은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런 것들이 곧 한국인에 일본인식, 제대로 된 일본인식 같은 걸 큰 장애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죠."
쿠데타 정권에 일본 커넥션에 관여했던, 혹은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취재를 거부했다. 따라서 대부분에 사실들은 일본 쪽에 증언에 의해 밝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권에 지지와 국가에 안전을 일본에 의존했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우리는 왜 아직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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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6일 자 방송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본 커넥션-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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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 문서를 분석하는 가운데 한일협정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 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미 중앙정보국
1966년 CIA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당시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에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액수는 1백만-2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6개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1백만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히고 있다.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으며,
당시 박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도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 또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권을 갖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5,000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 돈을 줬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런 사실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CIA 보고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 있다. well founded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신뢰도에 대해 미국인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Rob 교수/한국외국어대 영어교육과-well founded 의 의미는 근거가 있고 신용할만하며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 문장에 통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6,600만 달러라는 숫자, 6개 회사가 총 6,600만 달러를, 각각 1백만불부터 2천만불씩 지불했다는 것" 거기에는 특정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CIA 문건과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또 다른 미 국무성 문서를 입수했다.
국무성 전문
1964년 5월 20일
발신 : 서울
비밀
1964년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이다.
그는(박정희) 김종필을 당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왜 미리 그를 제외시키지 않았냐고 물었다.
문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버거 미 대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첫째는 오노(자민당 부총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오노는 김종필이 제거된다면 일본과의 협정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후 둘에 대화과정에서 박정희는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오노가 김종필이 제외되면 한일협정 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 제외시키지 못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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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15일 자 방송 KBS 일요스페셜-'[최초공개!] 베일 속의 한일협정, 문서 한일 양국은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 편에서 발췌
안티 박정희 카페매니저 상생러브 (http://cafe.naver.com/anti516park.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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