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양반이 아직 살아 있었나?”
10월31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를 떠난 뒤 그는 30년 가까이 거의 뉴스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칩거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아직 신군부의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던 1984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의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여류 수필가를 만나러 갔다 그곳에 들른 이후락 씨와 합석하게 되었던 일이 있다. 여류 수필가는 그에게 술을 따르며 평양 방문 때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갖고 갔던 일을 찬탄하면서 “대체 그 독약을 어디에 숨기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후락 씨는 자신의 어금니 가운데 의치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청산가리를 숨겼다고 했다.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다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내가 그날 들은 이야기는 분명 의치 속에 숨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저 양반이 김종필 씨나 누구처럼 보직의 하나로 그냥 정보부장을 했던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09년 11월1일, 미국
그렇다. 이후락 씨는 원래부터 첩보원과 무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공식 기록을 보면 이후락 씨는 1924년생이다. 그리고 만 21세 되던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미 군정이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문을 열었던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에게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반년 정도 이수하게 해서 한국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던 일종의 세탁용 단기코스 같은 것이었다. 1기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전원이 해방 전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장교들로 적어도 23∼24세가 넘은 나이들이었다.
그런데 이후락 씨는 21세의 나이에 일정 코스를 거치고 임관까지 되어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미스터리다. 그래서 군사영어학교 1기로 뒤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김정렬 씨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가 미군과 거래하려면 첫째는 영어를 구사해야 했을 것이고, 둘째는 미군과 거래할 만한 무슨 내용을 갖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울산공립농업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그가 갑자기 영어를 구사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1980년대 초 한국의 군사관계 기사를 많이 쓰던 한 일본인 기자가 내게 이후락 씨가 일본에서 ‘나카노(中野)학교’를 다녔다는 설을 들려준 일이 있다. 진짜 나카노학교 출신들은 자신이 그곳 출신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니 이 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이후락 씨의 미스터리에 대한 의문점이 대번에 풀린다. 나카노학교란 일본 육군성이 1938년 문을 연 첩보원 양성학교로 외국어는 첩보원이 활동할 지역에 따라 영어·러시아어·중국어 중 하나를 집중 공부했는데, 72시간 잠을 안 재우는 논스톱 방식의 강훈련으로 반 년 정도면 회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5년제 농업학교 출신의 이후락 씨가 해방되던 해부터 영어를 구사했던 배경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1970년 2월20일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나카노학교에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나카노학교는 일본 육사나 예비사관학교가 중심이고 그 밖에 교도(敎導)학교 등 일본 육군이 관리하던 각종학교 재학생들 가운데 머리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기자든 정치인이든 미국대사든 이구동성으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영민한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8년 동안 나카노학교의 졸업생은 모두 2131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락 씨의 경우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있던 육군항공정비학교에 진학했던 기록이 있다. 그곳에 다니다 학교장의 추천을 얻어 나카노학교에 선발된 것 아닌가 추측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CIA 연락책
해방되기 전 나카노학교 출신들이 해방 후 조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군사령부에 투입된 것은 마루사키 요시오(丸岐義男) 소좌를 우두머리로 한 육군 소위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총독부 경찰의 경부나 경부보 또는 순사부장 등으로 위장해 지금의 중부경찰서인 본정서(本町署)와 일본 군속이 많이 살던 용산의 용산서(龍山署)에 집중배치됐다.
이후락 씨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2월 초 이들 나카노 출신 일본군 첩보장교들이 모두 귀국길에 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이후락 씨는 미 군정청이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진주미군의 G-2나 방첩대(CIC) 등의 정보기관은 방공망 구축과 조선 통치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총독부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대 등과 밀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락 씨의 학력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그를 반겼다.
군사영어학교 입학 5개월 만인 1946년 3월23일 그는 22세의 나이에 대위로 임관된다. 당시 미군이 그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준 것은 김정렬 씨의 증언처럼 그가 대위라고 우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정보 일을 맡기기 위해 그런 계급장을 달아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김정렬 씨가 언급한 ‘미군 측과의 거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군이 그를 밀어주는 대신 그는 미군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의 보직은 때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정보계통에 머무른다. 임관 2년 만인 1948년 육본 정보국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1949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 1950년에는 육군참모총장 정보보좌관, 1951년 육본 정보부 차장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그는 계속 정보계통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취득한 정보를 처음에는 미 제24군단 G-2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CIA에 제공했다. 그 후 주미한국대사관 무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는데, 이때 미국 CIA의 정식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귀국 후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CIA 연락책이 되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배경이 CIA였기 때문에 그는 4·19혁명이 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좌천되지 않았다. 4·19혁명 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그는 장면 총리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국무총리 안보비서관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있다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추천되었는데, 이 일에 대해 당시 장면 총리의 비서였던 선우종원(鮮于宗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고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에서 그를 민 것 같다.”
그 무렵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락 씨는 부패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의 옆방에 수감되었던 훗날의 국회의장 박준규 씨는 이런 말을 했다.“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
처신이 약삭빨라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CIA의 중재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미국 CIA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고…”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CIA는 그 적격자로 이후락 씨를 지목했다. 이에 당시 군사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씨가 그를 출옥시켜 <대한공론사> 사장 자리에 앉혔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힌다. CIA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의장의 입장에서는 CIA의 백업을 받는 이후락 씨를 이용해 미국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락 공보실장은 이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점차 박정희 의장의 신임을 얻는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글 강준식 작가 [arumdhaun@hanmail.net]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11/23/3547519.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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