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혹사건 진상 보고서 전문/김형욱 실종사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어떻게 죽었나 - 1981년 3월 31일 데이빗 뉴스타트기자

김형욱의 사망판결과 관련, 미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미국법원이 김형욱의 사망을 선고한 배경을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번역본과 신문 복사본을 첨부합니다 

2012/10/07 - [대통령 후보] - [미의회가 밝힌 박정희정권 스위스계좌 2]걸프사,박정희방미자금 20만달러 스위스비밀계좌에 입금-UBS계좌번호는 626,965.60D: 스위스UBS입금전표,걸프사진술서등 첨부

2012/10/03 - [대통령 후보] - [미의회가 밝힌 박정희정권 스위스계좌 1]'박정희자금 이후락이 스위스계좌에 예치- 김성곤이 육영수에게 돈 상납' : 이게 프레이저보고서 원문

2012/10/06 - [대통령 후보] - 이정현, 우리는 [박근혜의 대변인이지] 박정희의 대변인이 아니다 : 분명한 선긋기?

2009/09/20 - [의혹사건 진상 보고서 전문/김형욱 실종사건] - 김형욱 전 중정부장 여기 잠들다 - 실종 30년만에 뉴저지서 발견

제가 며칠뒤에 뭐 하나 보여드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습니다 
===============================================================================================================

전직 중앙정보부장 사망 선고

1981 3 31일 데이빗 뉴스타트

 

전직 중앙정보부장이며 코리아게이트의 핵심증인인 김형욱이 청와대 지하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사실이 어제 법정에 제출된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 문서는 자신의 남편의 법적인 사망선고를 구하려고 소송을 제기한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법정에 제출한 증거의 일부이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증거서류들은 1979 10월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이 박정희에 대한 회고록을 준비중이었음을 보여줬으며 하비 스미스판사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법적인 사망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따라 김형욱의 유족들은 천5백만에서 2천만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김형욱가족의 변호사인 알란 싱거는 김형욱의 재산이 그렇게 많지 않으며 김형욱 재산을 추정한 은행직원은 추정치를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김형욱은 알파인저택을 27만달러 현금을 주고 구입했고 은행계좌를 푸에르토 리코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백40만달러를 잃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세계 카지노에 그의 계좌가 있었다

 

김형욱은 한국정부와 협상을 벌여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 대가로 한국정부가 2백만달러를 그의 스위스은행계좌에 입금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김형욱은 생전 인터뷰[.프레이저 청문회 인터뷰로 추정됨]에서 그의 월급은 천달러였지만 부동산 투자, 고금리로 돈 빌려주기, 선물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 설명했었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며 1973년 도망전까지 한국의 2인자였다. 김형욱은 박정희가 1972년 헌법개정[.유신헌법]을 통해 무한의 권력을 잡게 되자 박정희와 갈라섰다

 

1977년과 1978년 김형욱은 한국정부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한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의회 청문회의 핵심증인이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의 증언과 회고록에 대해 우려했으며 김의 유족들은 박정희가 김형욱을 납치, 살해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믿고 있다, 박정희는 새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다

 

일본 교도통신이 한국 망명자로부터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김형욱의 의회증언직후 오작교 작전이 시작됐으며 닥터 하인즈란 암호명으로 불린 김형욱은 그 작전의 첫번째 희생자였다

1979년 정태동 주미공사는 뉴저지주 알파인의 한 식당에서 김형욱을 만나 회고록 포기대가로 50만달러를 제의했지만 김형욱은 2백만달러를 자신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예치시키라고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

 

두사람은 다시 만나 2백만달러 지급에 합의했으나 지급방법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그후 김형욱은 2백만달러를 수용하기로 했으며 프랑스로 가서 이상열공사를 만나기로 합의했다

 

이상열은 1963년 군부내에서 계획돼던 반혁명음모를 제보해 대령으로 승진했다

 

김형욱은 1979 8월 유럽으로 가서 이상열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언급하며 나는 김대중처럼 납치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이상열은 우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처럼 뼈아픈 시련을 되풀이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증거문서는 이말이 김대중처럼 납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린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상열은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김형욱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망명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김형욱은 9 30일 콩코드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 (회고록 포기대가의) 돈 송금방법등을 어레인지하기 위해 이상열을 만났다

 

중앙정보부는 김형욱의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고 김형욱의 호텔을 옮기라고 지시했고 김형욱 이상열 두사람은 10 8일 스위스로 떠나기에 앞서 10 7일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

 

그랑세롤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뒤 이상열은 일본인여성이 운영하는 프라이빗 클럽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이상열은 일본인 중정요원인 그 여성에게 예약을 빌미로 전화를 해 그들이 갈 것임을 알렸다

 

중앙정보부 가옥으로 드러난 프라이빗 클럽에서 김형욱은 마취됐고 항공화물로 포장돼 한국항공기에 실려 한국으로 보내졌다

 

부산에서 학생시위가 격화된 10 16일 김형욱은 청와대 지하실로 끌려갔고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더러운 배신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김형욱은 당신이 배신자다, 나는 내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맞받아쳤다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지하사격장에서 김형욱에게 두발을 발사했다

그뒤 이상열은 서울로 돌아와 지부장으로 승진했다고 증거문서는 주장했다[.이상열의 전주지부장 승진을 의미]

 

김형욱유족의 변호사인 알레인 치럿은 이 문서가 부정확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핵심사항은 프랑스 르몽드지의 보도로 입증됐다고 말했다

 

김형욱유족들에 의해 고용된 프랑스 탐정들도 김형욱과 이상열이 그랑세롤 카지노에서 목격됐으나 그 이후 그들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김형욱의 부인은 한국정부가 회고록을 중단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그해 12월 회고록 미완성본이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김형욱의 유산은 부인에게 절반, 정한 정우 신해등 세 자녀에게 절반이 돌아가게 된다
=========================================================================


KCIA CHIEF DECLARED DEAD DAVID NEUSTADT 1981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