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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돌풍 - 돌풍 계속 이어질까?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 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 김대중 자서전 > 1권 22쪽, 생의 끄트머리에서).

원본출처 http://zine.media.daum.net/sisain/view.html?cateid=100000&cpid=131&newsid=20100806095728917&p=sisain

8월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내 자서전은 반드시 사후에 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에 따라 서거 1주기를 앞둔 7월29일 < 김대중 자서전 > (도서출판 삼인)이 출간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04년부터 자서전 구상에 들어갔고, 2006년 4월 자서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구술을 시작했다. 700쪽짜리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2년 동안 총 41회에 걸쳐 진행한 김 전 대통령의 구술 인터뷰를 중심으로, 생전의 다양한 기록물들을 참고해 정리됐다. 최종 집필은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맡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원고를 직접 읽고 수정하고 빠진 부분은 보충하도록 추가 구술했다. 이를테면 '3공화국 출범과 한·일협정 파동'을 다룬 1권 2부 1963~1964년도 소제목의 경우, 당초 편집진이 붙인 제목은 '화려한 재기, 그리고 시련과 고통'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호남이 당선시킨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바꿨다. 그런 식으로 자서전 초고에는 김 전 대통령의 낯익은 글씨가 곳곳에 남아 있다.

1권에는 섬마을 소년에서 청년 실업가, 젊은 정치인, 그리고 사형수를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정이 담겨 있다. 2권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퇴임 후 서거 직전까지의 기록이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 집필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해 역사와 후손에 바치겠다"라고 강조했다. 이를 반영하듯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싸고 떠돌았던 각종 풍문에 대해 대부분 명쾌하게 정리했다. 자서전 첫 장을 "어머니가 둘째 부인이었다"라고 고백하면서 시작한 게 상징적이다. 김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 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1권 27쪽)라고 적었다.

김 전 대통령의 실제 나이를 둘러싼 궁금증도 풀린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을 때 반대 진영에서는 '고령'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졌다. '호적보다 실제 나이가 훨씬 많아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요지였다. 당시 일언반구도 안 했던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목포상고를 졸업할 무렵(1943년) 일본은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끌고 갔다. 나는 징집을 늦추기 위해 생년월일(1924년 1월6일)을 1925년 12월3일로 바꾸었다. 아버지의 기지였다"(1권 53쪽)라고 설명했다. 만 나이로 따지면 1997년 대선이 한창이던 즈음, 김 전 대통령의 실제 나이는 호적보다 두 살 많았던 셈이다.

"양김 단일화,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

그 밖에 고소공포증이 있어 높은 산에 잘 올라다니지 못했다는 고백, 첫 부인 차용애와의 사이에 첫딸 '소희'를 얻었지만 첫아들 홍일이 태어난 직후 허망하게 하늘로 보내야 했던 사연, 1946년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을 표명한 '조선신민당'에 가입했다가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붉은 깃발을 우리 깃발이라고 하는 놈은 때려죽여야 한다"라고 주장한 후 공산당 추종자들과 대판 싸우고 공산당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버리게 됐던 비화 등이 담겨 있다.

삶의 3분의 2를 정치인으로 보낸 만큼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판단, 그리고 정치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소회도 진솔하게 드러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서는 "세월이 흘러 박정희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뜻밖에 아버지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1권 385쪽)라고 적었고,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원성을 샀던 1987년 대선에 대해서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물론 단일화했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국민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1권 536쪽)라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정상회담 선언문에 누가 사인을 할지를 두고 벌어졌던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이의 기 싸움 과정 등이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다.

김정일:임동원, 김용순이 사인하게 합시다.
김대중:내가 직접 와서 정상회담을 한 건데, 일 처리 좀 시원하게 합시다.
김정일: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하군요.
김대중: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씨 아니오.
김정일:아예 개선장군 칭호를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
김대중:개선장군 좀 시켜주시면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2권 292쪽)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거침없이 토로했다.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운영이 걱정됐다. 통일부·과기부·정통부·여성부 등이 폐지 및 축소되는 부처로 거론되는데, 내가 보기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살릴 부처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걸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게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2권 565쪽)라거나, "이명박 정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너무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비핵 개방3000' 정책을 밀어붙였다. 한국 외교사상 최악의 실패작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컸다.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2권 581쪽)라는 식이다. 자서전을 통틀어 김 전 대통령이 끝까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보인다.

김대중평화센터는 8월10일 출판기념회를 시작으로 서거 1주기인 8월18일까지 다양한 추모행사를 열 예정이다.

이숙이 기자 / sook@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