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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부친은 조선총포사장아니라 창고계장 - [이한구의 한국 재벌사]한화그룹 편 1화 [펌]

김용준 총리후보의 부친 김봉수씨는 조선총포화약의 사징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조선총포 총무과의 창고계장이었다는 것이 수원대 이한구교수의 주장입니다. 친일기업인 조선총포는 해방뒤 곧바로 미군정에 귀속되면서 김종희[한국화약 창업자]씨가 지배인으로 선임돼 경영을 맡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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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01호] / 등록일 :

 

[이한구의 한국 재벌사]한화그룹 편 1화
일제 때부터 화약업체 독점운영…‘땅짚고 헤엄치는’ 그룹토대 쌓아
http://weekly2.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9457
우리나라 경제의 중심에는 재벌이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 LG, 현대, SK 등이다. 이 들 기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창업주인 1세대들이 한국전쟁 이후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발 빠른 대응으로 일감을 생산한 것이 그 시초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1세대들의 창업정신이 흐트러진 느낌을 받는다. 재벌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난무하지만, 제대로 정리된 책이 없다는 것도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책으로 이한구 교수의 ‘한국재벌사’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재벌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 재벌이 성장해 온 배경과 역사, 대표 재벌들의 특징, 한국 재벌의 성과와 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재벌사’는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이자 한국 산업사이며 현대 경영사이기도 하다.

CNB저널은 연속 기획을 통해 이 교수의 한국재벌사를 연재한다. 이번호는 한화 편 1화다. 한화 편은 3화에 걸쳐 이어진다. <편집자 주>

ⓒ2012 CNBNEWS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金鐘喜, 1922~ 1981)는 1922년에 충남 천안 부대리에서 빈농이었던 김재민(金在民)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두뇌가 명석했고 형제들 중 덩치가 제일 크고 건강했을 뿐 아니라 유머감각도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그는 고향인근의 직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성환공립심상학교 고등과 1년을 수료하고, 1937년에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에 16대 1의 경쟁을 뚫고 입학했다. 당시는 인재가 드물었던 터라 좋은 직장에 비교적 쉽게 취업할 수 있어 상업고등학교는 단연 최고 인기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경기상고는 국내 최고의 명문 상고(商高)여서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었는데 이 학교에는 한국인 재학생이 드물 정도로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숙과 일본인 경찰 도움으로 화약과 인연 맺어

김종희는 1940년 11월 경기상고 4학년을 중퇴하고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원산공립상업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같은 학교의 조선인 학생 3명과 일본인 학생 4명간의 패싸움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조선인 학생들이 밀리자 이들을 돕기 위해 싸움에 가담했다. 그 결과 김종희를 포함해 싸움에 연루된 8명 전원이 퇴학처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시름에 잠긴 그는 당숙인 김봉서(金奉瑞)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원산경찰서 서장인 고이께 쓰루이치(小池鶴一) 경부(警部)의 주선으로 원산상고로 전학했던 것이다.

김종희는 원산에서 고이께 서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1941년 12월 21일에 동교를 졸업하고 또다시 고이께 경부의 도움을 받아 1942년 1월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고이께는 김종희가 원산상고에 재학 중일 때 서울로 전근해서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것이다.

조선화약공판은 1941년 12월 1일에 설립된 신설기업으로 배경은 다음과 같다.

▲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한화빌딩. (사진 = 왕진오 기자) ⓒ2012 CNBNEWS
일제는 1942년에 수많은 중소기업들을 대기업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내용의 기업정비령을 발동했다. 식민지 조선 내의 모든 경제적 자원을 태평양전쟁에 우선 배분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환으로 함경도 흥남 소재의 화약제조공장인 조선질소화약과 조선화약제조(해주 벽성면), 조선유지(인천), 조선아사노카리트(해주 봉산면) 등 4대 화약공장을 통폐합했다. 또한 조선질소화약판매와 제국화약 계열의 조선화약총포판매 등 2개 화약유통업체들을 통합해서 조선화약공판으로 재발족했는데 이 회사는 국내 유일의 화약판매 독점업체였다. 즉 국내의 각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약류를 일괄 인수해서 각 수요처에 납품할 뿐 아니라 각 화약공장에 대한 생산량 할당 및 원재료 공급까지 독점했던 것이다. 조선화약공판에서 취급하던 화약류는 대부분 혼합화학류로 1943년 현재 생산량은 다이너마이트 80톤, 과염소산폭탄 10톤, 흑색화약 6톤 초안폭탄 3톤 등 총 99톤이었으며 이외에도 공업용 뇌관 60만개, 전기뇌관 1만개, 도화선 185km 등이었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에는 50여명의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조선총포화약 출신의 김봉수(金鳳秀)가 총무부 창고계장을 맡고 있었으며 평사원으론 민영만(閔泳晩), 김덕성(金德成) 등 4명이 근무했다. 그 외에 20여명의 노무직은 전부 한국인이었다. 김종희는 조선화약공판 설립 이래 최초로 입사한 한국인 관리사원이었던 것이다.

김종희는 입사와 함께 구매부서에 배속됐는데 그의 초임은 50원으로 조선식산은행의 초임 45원보다 많았다. 화약계통은 위험물을 취급하는 특수직종인 탓에 관리직이라 해도 여타 직종 종사자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는 당숙 김봉서와 고이께 경부의 도움으로 화약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김종희는 나이 23세 때인 1944년 1월에 생산부 다이너마이트계 계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같은 해 9월 22일에 조선화약공판(주)의 지배인으로 선임됐다. 미야모도 사장과 기무라, 스즈키 상무 등으로 구성된 중역회의에서 김종희에게 경영권을 일임했던 것이다. 당시 회사 내에는 선임사원이자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의 김봉수 계장을 비롯해 약간 명이 있었음에도 김종희를 선택한 것이다.

동사는 3일 후인 25일에 미군정의 귀속기업으로 접수됐다. 해방과 함께 수많은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이 무주공산인데다 당시 국내 화약공장에는 한국인 기술자들이 단 한명도 없는 터라 모든 여건이 김종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 한화그룹의 창업자 故 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 회장의 기념메달. (사진출처 = 한화그룹) ⓒ2012 CNBNEWS
이후 김종희는 지배인으로써 경영에 충실한 결과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7일자로 조선화약공판 관리인에 임명됐다. 관리인은 귀속기업의 경영책임자를 의미하며, 김종희는 약관 29세에 국내 유일의 최고경영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52년 6월 12일에 귀속재산 불하에 참여해서 23억4568만 원에 동사를 낙찰 받았다. 당시에는 귀속기업의 관리인들이 해당 기업을 불하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승연 부친 김종희 29세 때 조선화약공판 관리인에

김종희는 그동안 미8군 화약관리 용역사업을 통해 벌어놓은 1만3000 달러와 농지증권을 헐값으로 구입해서 불하대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공정환율은 6000대 1이었으나 시장환율은 1만1000대 1이어서 1만3000 달러는 1억4300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또한 귀속재산 불하대금은 농지개혁법에 의해 발행된 농지증권으로도 납부가 가능했기 때문에 어렵게 계약금 2억3457만 원을 납부하고 나머지 잔금은 이후 장기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불하받았던 것이다. 김종희는 살인적인 전시인플레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던 농지증권으로 재벌의 터전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김종희는 1952년 10월 9일에 자본금 5억 원의 한국화약주식회사를 발족시켰다. 발기인으론 김종희, 종철 형제와 종철의 처삼촌인 유삼렬 및 화약공판에서 동고동락해온 김덕성, 민영만, 홍용기, 권혁중 등이었다. 액면가 5만 원의 총 1만주 중 김종희 5200주, 김종철 4000주, 유삼렬 200주, 김덕성 150주, 민영만 130주, 홍용기 130주, 권혁중 100주 등이었다.

1955년 10월에는 막대한 전화(戰禍)를 입은 남한유일의 독점생산업체인 조선유지 인천 화약공장마저 인수했다. 인천공장은 1939년 건설에 착수해서 조선화약공판이 설립된 1941년부터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했는데 해방직후에는 일본인 50명과 조선인 350명이 근무 중이었다. 김종희는 33세의 약관에 국가기간사업체를 거머쥔 것이다. 이로써 김종희는 국내 유일의 화약판매 독점업체뿐 아니라 생산까지 독점하게 되어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독점기업가가 됐다. 해방 후 국내 화약산업은 한국화약과 정부 간의 쌍방독점 형태로 유지되어 한국화약은 정부의 비호 하에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6년 8월 분상화약 뇌관도화선 등의 생산을 개시했으며, 1957년 국내 최초로 니트로글리세린 시험생산에 성공하여 다이너마이트를 생산, 전후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62년 6월에는 글리세린 정제공장을 증설했다. 1963년 6월에 폭약자동포장시설을 갖추는 등 꾸준히 생산능력을 증대시켜 1970년 4월부터 해외수출을 개시했다.

한화그룹의 성립에는 김종희의 친형인 김종철(金鍾哲, 1920~1986)의 도움도 매우 컸다. 김종철은 주경야독으로 1942년에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마포에 있던 조선목재주식회사에 근무했는데 이 회사에는 정년퇴직한 고이께 경부가 취체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의 선전부장으로 청년운동에 투신했던 김종철은 향후에 전개될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예견하고 틈이 있을 때마다 아우인 김종희에게 조선화약공판의 불하 충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1952년에는 한국화약 설립에 가담해서 회장에 취임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향리 천안에서 출마하여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 뒤 자유당 충청남도 도당위원장 및 대한필드하키협회장 등을 지냈다.


▲ 한화그룹의 대표적 사회공헌프로그램인 ‘서울세계불꽃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서울세계불꽃축제 모습. (사진출처 = 한화그룹) ⓒ2012 CNBNEWS
한국화약, 정부와 쌍방독점 형태로 지속적 성장

1960년 4·19혁명과 함께 퇴진했다가 1967년 천안·천원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 후 제8~10대 국회의원으로 민주공화당 충청남도지부 위원장·국회 경제과학 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1981년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후보가 됐다. 총재로 당을 이끌면서 1985년 전국구 1번으로 제12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총재직을 사퇴한 뒤 한국화약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산업용 화약수요가 많지 않았던 시절의 한국화약은 정부와의 돈독한 관계 하에서만 성장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생 여당의 국회의원으로 일관했던 김종철의 이력이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한화솔라에너지 제1태양광발전소 전경. (사진출처 = 한화그룹) ⓒ2012 CNBNEWS
한국화약이 다각화를 시도한 것은 1964년에 국내 베어링시장을 석권했던 신한베아링(현 한화기계)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1953년 신한베어링(주)으로 설립됐다가 1964년에 한국화약에 인수되면서 한국베어링(주)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1년에는 일본정공(주)과 합작해서 한국정공(주)을 설립하고, 1973년에 주식을 상장했다.

1965년 한국화성공업(현 한화L&C)을 설립하고 1968년 진해에 연산 1만5000톤 규모의 PVC공장 및 PVC 가공공장을 세웠다. PVC제품은 국내 피혁, 철강재, 건축재료로 공급됐는데 특히 비닐하우스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크게 기여했다. 1966년 7월에는 태평물산(한화 무역사업부)을 설립하고 1968년 9월에는 제일화재해상보험㈜을 인수했다. 제일화재는 정부수립 이후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보험회사로 1949년 3월 22일에 설립되었다. 1955년 해상보험업 인가를 획득하여 제일화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제일화재의 실제 오너는 박정희정부 때 실권자 중의 한사람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들인 이동훈인데 그는 김종희의 사위이기도 했다.


사업다각화 착수…10대 재벌 토대를 쌓다

1969년 11월에는 세계 4대 석유메이저중 하나인 미국의 유니온오일(현 코노코필립스)사와 50대 50의 합작투자로 경인에너지(주)를 설립했다. 경인지역은 일제 강점기 이래 국내 최대의 공업벨트지대로써 최대의 석유소비지역이기도 했는데 경인에너지는 이 시장을 주목했던 것이다. 1971년 9월에는 제삼석유판매㈜를 설립하고 1972년 4월에는 경인에너지 정유공장과 발전소를 각각 준공했다. 경인에너지는 이후 한화에너지로 상호를 변경하고 전국에 1100여 개의 주유소를 거느린 과점기업으로 성장했으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현대정유에 매각됐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