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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앞서면 김종필파가 박정희 먼저 죽인뒤 윤보선도 암살'첩보 -국무부 비밀전문 원문

'윤보선 앞서면 김종필파가 박정희 먼저 죽인뒤 윤보선도 암살' -국무부 비밀전문 원문'윤보선 앞서면 김종필파가 박정희 먼저 죽인뒤 윤보선도 암살' -국무부 비밀전문 원문


지난 1963년 민정이양을 표방하며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개표중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서가면 김종필일파가 투표당일 자정이후 박정희부터 살해한 다음 윤보선까지 암살하고 다른 지도자를 내세워 군사정부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첩보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입수됐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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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대통령선거당일인 1963년 10월 15일 새벽 5시 28분[한국시간 오후 6시28분] 미 국무부에 접수된 주한미국대사관 발신의 491호비밀전문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관계자가 10월 15일 윤보선의 비서 이재항[YI CHAE-HANG]으로 부터 제보를 받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항은 이 제보가 공화당관계자가 윤보선에게 전한 것이라며 10월 15일 자정께부터 도시지역의 투표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만약 그 결과가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면 김종필일파[KIM CHONG PIL FACTION]가 박정희를 먼저 살해한 다음 윤보선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말한 것으로 전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박정희까지 제거하는 김종필일파의 쿠데타음모설에 대한 첩보였습니다.


이재항은 또 이같은 암살음모는 자정이후부터는 언제든 실행가능하며 음모의 목표는 다른 리더십하에서 군정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재항은 이 음모의 아웃라인만 알고 있지만 그 계획이 신중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대사관에 알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한미국대사관은 이재항의 제보가 많은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 전문은 김종필일파의 암살음모설이 실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63년 대통령선거가 얼마나 박빙의 승부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윤보선을 약 1%차로 누르고 간신히 승리했습니다.


또 박정희등 군사정권 핵심관계자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으며 여차하면 박정희까지 살해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 내부의 권력투쟁도 심각했음을 의미합니다.


김종필은 1963년 1월말 공화당 사전조직, 4대의혹사건등으로 권력핵심에서 제거될 뻔하다 박정희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했지만 권력투쟁으로 판세는 다시 뒤집혀 한달만인 2월 25일 타의에 의해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박정희 또한 권력기반이 취약했고 대통령선거에 나서기 위해 다른 실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던 처지였습니다.


그뒤 김종필은 어떻게든 선거직전에 한국에 돌아옴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고 했지만 선거가 끝날때까지 귀국하면 안된다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암살음모가 나돌던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당일에는 외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종필은 외국에 있었지만 김종필 추종세력은 군부와 공화당등에 잔존했고 그들의 위기감이 극대화됨에 따라 여러가지 자구책을 궁리한 것은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추종세력과 김종필간에 교감이 있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이런 글에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윤보선은 4년뒤인 1967년 대선때도 승리할 경우 암살될 뻔 하기도 했습니다. 방준모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은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고 저격병을 배치했었다고 고백했었습니다. 


1963년과 1967년 두개의 사건은 너무나 일치합니다면 1963년은 박정희의 권력기반이 취약한 반면 1967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2년에 이어 4년의 집권을 통해 기반을 공고히 다졌던 때였습니다. 특히 월남파병으로 인해 미국과도 밀월관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때는 박정희 사살운운하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윤보선 우세하면 박정희부터 암살